88. 영국 최초의 흑인 귀족 - 디도 엘리자베스 벨

★금삿갓의 은밀한 여성사★(260317)

by 금삿갓

19세기 영국 상류사회를 배경으로 하는 넷플릭스의 드라마 <브리저튼(Bridgerton)>에는 흑인 귀족이 다수 등장하는 설정인데, 이는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다양성을 반영한 픽션이다. 보수적인 영국 현실에서는 흑인 귀족은 말이 되지 않는다. 노예무역이 성행하고 인종 차별 개념이 뿌리 깊게 박혀 있던 그 시대에 흑인 혈통이 귀족이 되기는 하늘의 별을 따기보다 어렵다. 그런데 1761년에 흑인 노예의 딸로 태어난 흑인 여자애가 운명이 바뀌면서 나중에 귀족이 되는 것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존 린지 경(Sir John Lindsay)으로, 영국 해군 장교였으며 후에 기사 작위를 받고 제독으로 승진했던 사람이다. 그는 당시 영국령 서인도 제도에 주둔하는 영국군 함대의 함장으로 있었다. 그는 제3대 남작 알렉산더 린지 경(Sir Alexander Lindsay)과 그의 아내이자 제5대 스토몬트 자작 데이비드 머레이(David Murray)의 딸인 아멜리아(Amelia)의 아들이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마리아 벨(Maria Belle)이라는 젊은 아프리카계 여성이었다. 어머니에 관한 기록은 없어서 일반적인 견해로는, 영국 해군에 나포된 노예선의 매매 대상 '화물(노예)' 중의 하나로 인식되었다. 존 린지는 젊은 장교로서 노예 마리아를 잠시 성적 욕구 해소의 대상으로 인연을 맺었고, 그렇게 하여 디도가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되었다. 당시 '노예의 신분은 모계를 따른다.'는 법이 적용되던 시대에, 디도는 태어나자마자 법적으로는 노예였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 린지가 1765년 영국으로 돌아올 때 사생아인 디도를 데려갔고, 그녀의 양육을 외삼촌인 윌리엄 머레이(William Murray, 초대 맨스필드 백작)와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 머레이(Elizabeth Murray, 맨스필드 백작부인)에게 맡겼다. 공교롭게도 그들 부부는 자녀가 없었다. 머레이 부부는 디도 벨을 교육시키고, 어머니가 사망한 또 다른 조카딸인 엘리자베스 머레이(Lady Elizabeth Murray )와 함께 런던 햄스테드에 있는 저택인 켄우드 하우스(Kenwood House)에서 자유로운 귀족여성으로 키웠다. 엘리자베스 머레이와 벨은 사촌 관계였다. 디도 벨은 그곳에서 30년 동안 살았다. 1793년의 유언에서 맨스필드 경은 그녀에게 일시금과 연금을 제공했다.

다운로드.jpeg <영화의 한 장면>

디도 엘리자베스 벨(Dido Elizabeth Belle)은 친아버지인 존 린지에게 공개적으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린지라는 성을 받지 못하고 어머니의 성을 사용했다. 디도는 이복형제자매들과 달리 아버지의 유언에서 상속이나 인정도 받지 못했다. 전설적인 카르타고의 여왕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디도는 당시 여성 노예들에게 흔히 붙여지던 이름이기도 했다. 하지만 사랑이 없었던 아버지가 자기의 외삼촌에게 맡겼기 때문에 도리어 행운이 된 케이스다. 린지는 1768년에 메리 밀너(Mary Milner)와 결혼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고, 디도의 어머니 마리아 벨은 1774년까지 린지와 함께 영국에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린지는 마리아를 노예에서 해방시켜 주고, 펜사콜라에 있는 부동산을 마리아에게 양도해 주었다. 본처와는 아이가 없었지만, 그는 1761년에 디도 벨, 1762년에 존 에드워드 린지, 1766년에 앤 린지, 1766년에 엘리자베스 린지(후에 팔머), 1767년에 존 린지 등 다섯 명의 다른 여성에게서 총 다섯 명의 사생아를 낳았다. 그런데 그의 유언장에 이름이 언급된 사람은 마지막 두 명뿐이었다.

Dido_Elizabeth_Belle.jpg <데이비드 마틴이 그린 초상화>

디도 벨 보다 한 살 위인 엘리자베스 머레이를 키우고 있었는데, 다시 흑인 여아를 입양받아서 맨스필드 백작 부부는 정성을 다해서 양육했다. 돌이켜 보면 1760년대 런던, 흑인 여자아이가 잉글랜드 최고의 귀족 영지인 '켄우드 하우스'에 들어가서 생활한다면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켄우드 하우스는 당시 런던 교외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중 하나였고, 맨스필드 백작은 영국 법조계의 거두였다. 백작에게는 자녀가 없어서 종손녀 엘리자베스 머레이를 데려와 양육하면서 디도도 함께 기른 것이다. 아마 처음에는 이 흑인아이를 손녀딸의 시녀로 키울 생각이었지만 점차 식구처럼 되었다. 그 후로 이 두 사촌 자매는 이 호화로운 영지에서 함께 책을 읽고, 피아노를 연습하고, 승마를 하며 표준적인 귀족 아가씨들의 생활을 했다. 비록 영지 내에서 디도의 지위를 단정 짓기는 어렵지만, 영지의 구매 내역 목록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엘리자베스를 위해 비단 커튼이나 고급 장신구를 구입할 때마다 항상 한 벌 더 구입하여 디도에게 주었다. 그녀는 정교한 침실을 가지고 있었고, 훌륭한 교육을 받았으며, 성인이 된 후에는 백작 외종조부의 중요한 서신과 법률 문서를 처리하는 일까지 도울 수 있었다. 이것은 당시 영국에서는 상상하기조차 힘든 일이었다. 그 당시 런던 거리에는 최소 1만 5천 명의 흑인들이 배회하고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도망친 노예였고, 지위는 미천했으며 심각한 차별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디도는 어떠한가? 그녀는 값비싼 비단 드레스를 입고 사촌 언니의 손을 잡고 저택의 정원을 산책했다. 마차를 타고 외출을 함께할 수도 있었다.

Sir_John_Lindsay.jpg <아버지 존 린지>

할아버지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영국의 권력자들은 가끔 그들의 일기에서 "이 흑인 여자아이가 여기 있다니 참 이상하군. 백작의 젊은 정부인가?"라고 중얼거렸을지 모른다. 그녀가 매우 똑똑하고, 품위 있으며, 높은 교양을 지녔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이러한 총애에는 약간의 한계가 있었다. 맨스필드 백작의 가계 기록에는 디도가 공주처럼 자랐지만, 그녀의 연간 용돈은 30파운드였고, 사촌 언니 엘리자베스는 100파운드였다. 이것이 아마도 그 시대가 이 특별한 유색인종에게 그어 놓은 '보이지 않는 경계선'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가문 내에서 사랑을 받았지만, 영지 담장 밖으로 나가면 여전히 항상 조심해야 하는 '이방인'이었을 것이다. 맨스필드의 친구 중 한 명인 미국인 토머스 허친슨(Thomas Hutchinson)은 매사추세츠 주지사를 지냈으며 왕당파로서 런던으로 이주했는데, 1779년 켄우드를 방문했다. 그는 그곳에서 흑인여자 아이가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하고, 손녀와 같이 산책을 하며, 맨스필드 경의 서류작성 등의 시중을 드는 것을 보고 그의 젊은 정부로 생각했다. 당시 사회에서 그것은 별 흉이 되지 않은 것이었다. 스코틀랜드의 시인 제임스 비티(James Beattie)도 그의 저서 <도덕과학의 요소>에서 켄트우드 저택에서 디도의 역할과 생활 약식에 대한 다양한 사실을 기록하며, 그녀가 만찬장에서 모든 사람들 앞에서 아주 우아하게 시를 암송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적었다.

William_Murray,_1st_Earl_of_Mansfield_by_John_Singleton_Copley.jpg <맨스필드 백작 모습>

디도의 가장 놀라운 점은 그녀의 기이한 신분만이 아니라, 그녀로 인하여 노예 역사에 미친 간접적인 영향력 때문이기도 하다. 그녀를 양육한 외종조부 맨스필드 백작은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대법원장으로서 두 건의 매우 중요한 사건에서 노예제에 대해 강한 분노를 표출했다. 그 첫 번째 것은 1772년 유명한 '서머셋 대 스튜어트 사건'이었다. 영국으로 팔려 온 노예 서머셋(Somerset)이 도망친 후, 주인 Stewart는 그를 강제로 납치하여 자메이카로 팔아넘기려 했다. 맨스필드는 판결문에 역사에 길이 남을 이 문장을 적었다. "노예제는 너무나 혐오스러워서, 실정법 외에는 그 어떤 법도 그 근거가 될 수 없다." 즉 노예 제도가 관습법에도 존재하지 않으며, 실정법에 의해 도입된 적도 없다고 판결했다. 이것이 노예제를 완전히 폐지한 것은 아니었지만, 법적으로 영국 본토의 노예 거래에 종말을 고하는 신호탄이 되었다. 나중 1781년에는 전국을 충격에 빠뜨린 노예무역선 '종(Zong) 호 학살 사건'도 있었다. 선원들이 아프리카에서 자메이카로 가던 중, 식량과 식수부족과 전염병 등의 이유로 노예 133명을 바다에 빠뜨려 죽였다. 당시 보험규정이 노예는 운송 중에 사망하면 보험금을 받지 못하지만, 선박의 안전을 위해 물건을 배 밖으로 투하하는 것은 보험금 지급 사유가 된다. 그래서 노예는 선적물이므로 선박의 안전을 위해 그들을 바다에 빠뜨린 것이다. 이러한 만행은 영국에서 쇼킹한 사건이 되어 여론의 첨예한 초점이 되었다. 법적 쟁점은 선원들의 노예 투하 행위가 살인죄를 구성하는가와 노예의 투하로 인한 손해를 보험사가 지불해야 하는가의 쟁점이었다. 맨스필드 백작의 심리 아래, 영국 사회 전체가 노예무역의 피비린내 나는 본질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는 국왕 입회하에 판결을 내렸다. 노예를 바다에 던진 것이 불가항력적인 사유가 있다면 말을 바다에 던진 것과 같은 것으로 살인죄를 구성하지 않으며, 비가 내리는 중에도 노예를 던졌다면 식수 부족에 대한 관리 책임이 선장에게 있으므로 보험사가 보험금을 지급한 이유가 없다고 판시했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바로 집에서 디도라는 똑똑하고, 선량하며 깊이 사랑하는 흑인 소녀를 키웠기 때문에, 맨스필드 백작이 처음으로 그 먼 곳의 '노예'들을 생생하고 존엄 있는 생명체로 보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디도는 백작의 마음속에서 노예제에 반대하는 등불이 되었던 것이다.

Kenwood_House.jpg <켄우드 저택의 모습>

이 시대에 태어난 혼혈 사생아가 영국 귀족 가문의 일원으로 자란다는 개념은 사실상 들어본 적이 없는 일이다. 사생아를 가족 구성원보다 낮은 지위로 취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디도 벨은 손님과 함께 식사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벨은 값비싼 의료 치료를 받고 호화로운 침실 가구를 제공받는 등 그녀의 삶의 다른 측면들이 켄우드에서 사촌 엘리자베스 부인과 동등한 지위에 있었다. 벨은 나이가 들면서 켄우드의 낙농장과 가금류 사육장을 관리하는 책임을 맡게 되었다. 이는 귀족 여성들에게는 전형적인 직업이었지만, 백작의 서신 업무를 돕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이는 보통 남성 비서나 서기가 담당했다. 사촌 레이디 엘리자베스는 백작과 함께 왕실 무도회와 파티에 참석했지만, 벨은 참석이 허용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백작 맨스필드 경은 이웃을 방문할 때 엘리자베스를 데리고 말을 탔지만 벨은 데리고 가지 않았다. 벨은 용돈을 분기에 5파운드씩, 생일과 크리스마스에 5파운드씩 받았다. 사촌은 벨보다 반기에 50파운드를 받고, 생일과 크리스마스는 별도로 더 주었다. 당시 구매력을 보면, 고위층 여성 가사 노동자의 연봉이 20~70파운드이고, 해군 중위는 100파운드였는데, 런던 외관의 정원 있는 침실 3개짜리 집이 200파운드 정도였다. 결말에 가서 맨스필드 백작이 사망 시 유언장에 벨을 정식 손녀로 기록하지 않았고, 다른 백인 손녀들만 상속자로 기록했다. 그녀의 버팀목이었던 외종조부 윌리엄 머리가 1793년에 사망했다. 백작이 유언장에서 특별히 디도에게 500파운드의 유산과 연간 생활 보조금을 남겼고, 그녀가 자유인임을 명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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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한 장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여성에게 경제적 지위가 거의 없고, 특히 흑인 혼혈아가 직면할 사회적 장벽에 디도의 미래는 밝지 않았다. 백작 사후 얼마 지나지 않아 32살이었던 디도는 25세인 프랑스인 집사 장 다비니에(John Davinier)와 결혼했다. 그의 출생기록은 부정확하지만 1780년대 말경 프랑스를 떠나 영국으로 건너가 하인이나 집사로 일했다. 그들은 결혼 후 런던에서 청빈하고 조용한 삶을 살며 세 아들을 두었다. 쌍둥이 찰스와 존은 둘 다 1795년 5월 8일 세인트 조지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고, 윌리엄 토머스는 1802년 1월 26일 그곳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벨은 백작으로부터 상속받은 유산으로 부유하지는 않아도 중류 이상의 삶을 살 수 있었으나, 그녀의 건강 악화로 43세 되던 1804년에 병으로 사망하여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세인트 조지 필드에 초라하게 묻혔다. 그녀의 사망 후에 남편은 다시 디도 벨 보다 21살 어린 백인 여자 제인 홀랜드와 결혼했다. 흑인 노예의 사생아로 태어나 영국 최고의 귀족 가문에서 자란 그녀가 생전에 남긴 흔적은 지금도 켄우드 하우스에 걸려 있는 그림이다. 백작은 영국 화가 데이비드 마틴(David Martin)에게 벨과 그녀의 사촌인 엘리자베스 머레이 부인의 이중 초상화를 의뢰했고, 이 작품은 1778년에 완성되었다. 그 초상화는 그녀가 이 세상에 남긴 가장 깊은 흔적이 되었다. 그림 속에서 그녀는 열대 과일이 담긴 접시를 들고, 눈빛은 생생하며, 옆에 있는 사촌 언니와 손을 잡고 서 있는 모습은 여느 귀족 숙녀와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이 그림은 흑인 여성과 백인 여성을 거의 동등하게 묘사한 18세기 영국 미술에서 독특한 작품이다.(금삿갓 芸史 琴東秀)

hq720.jpg <영화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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