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미얀마의 마지막 왕비 - 수파얄랏

★금삿갓의 은밀한 여성사★(260318)

by 금삿갓

타이크 수파얄랏(Supayalat)은 미얀마 역사상 마지막 왕후로, 아름다움과 잔혹성, 권모술수와 고집이 뒤섞인 극단적인 여성이었다. 그녀는 만달레이(미얀마 제2의 도시)에서 통치한 민돈 민(Mindon Min) 왕과 알레난도 신뷔마신(Alenandaw Hsinbyumashin) 왕비의 둘째 딸로 1859년에 태어났다. 어니는 수파야지(Supayagyi), 여동생은 수파얄라이(Supayalay)였다. 콘바웅(Konbaung) 왕조는 1752년부터 1885년까지 버마를 통치한 마지막 왕조로 이들은 권력의 독점과 혈통의 순수성을 보장하기 위해 근친혼(近親婚)을 하는 관계였다. 말하자면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사촌지간이었다. 어머니도 바기도우(Bagyidaw) 왕과 왕비 난마도 메누(Nanmadaw Menu)의 딸로서 그녀는 버마 역사상 가장 영향력이 세고 가장 잔인한 왕후 중의 한 명이었다. 그녀는 1878년 남편 민돈 민 왕이 죽자 자기 소생의 아들이 없어서 다른 왕비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가 바로 티바우 민(Thibaw Min)인데, 그의 어머니 라웅셰(Laungshe)는 궁정에서 추방되어 불교에 귀의했다. 그런 연고로 그는 불교에 심취했고, 아버지로부터 인정은 받았다. 그러자 왕비 신뷔마신이 왕권을 장악할 욕심에 자기의 장녀 수파야지를 티바우의 왕비로 결정하고 혼사를 추진했다. 그런데 결혼식장에서 전례 없이 티바우 왕이 둘째 딸 수파얄랏을 더 사랑한다고 선언하여 관례를 깨고 두 자매를 동시에 왕후로 맞아들였다. 신뷔마신은 궁정에서 실권을 틀어쥐고, 남편이 사망할 당시에 자기 딸들의 권력 유지에 걸림돌이 될 만한 왕족 모두를 불러서 죽은 왕과 임종 인사를 한다는 명목 밀실에 모이게 한 후에 재상 킨원 민 지 우 카웅(Kinwun Mingyi U Kaung)을 포함한 일부 성직자들과 공모하여 모두 학살했다. 이때 목숨을 잃은 사람이 80~100여 명이 된다고 한다. 정말 잔인한 왕후였다. 그 어머니에 그 딸이라고 수파얄랏도 매우 잔인했다. 같은 왕후로서 결혼식장에서 공개적으로 언니를 모욕하고, 심지어 남편을 독차지하기 위해 친자매들을 '감금된 포로'로 만들기도 했다. 이것만 아니다. 영국과의 전란이 빈번했던 시대에 수십 명의 무장하지 않은 왕실 친척들을 몽둥이로 때려죽이고 강가에 생매장시켰다. 많은 사람들의 인상 속에서 왕후는 항상 온화하고 현명하며, 모성 이미지를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수파얄랏은 은밀하게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그녀는 콘바웅 왕조의 마지막 여왕으로서 이 왕조의 멸망을 앞당긴 조력자이기도 했다. 전설에 따르면 그녀는 어릴 때 작은 새를 잔인하게 다루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 작은 생명체의 고통스러운 울음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녀는 안타까워하기는커녕 오히려 묘한 평온함을 느꼈다고 한다. 야망에 찬 그녀의 어머니 신뷔마신 왕후는 딸의 이런 '독한 기질'을 보고 오히려 사람들에게 자랑스럽게 말했다고 한다. "이 아이, 정말 좋은 재목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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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역사에서 왕위 계승은 항상 '죽음의 혈투 게임'과도 같았다. 원래 민돈 민 왕에게는 55명의 아들이 있었지만, 유독 명확한 후계자를 정해 놓지 않았다. 이로 인해 그가 사망한 후, 왕실 전체는 끝없는 내부 다툼에 빠져들었다. 수파얄랏의 어머니 신뷔마신은 이 기회를 포착하여, 나약하고 통제하기 쉬운 티바우(Thibaw) 왕자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의 어머니가 폐위되어서 가장 다루기 쉬웠을 것이다. 그녀는 판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처음에는 자신의 두 딸을, 나중에 막내까지 모두 그에게 시집보냈을 뿐만 아니라, 역사에 길이 남을 왕실 대학살을 직접 계획했다. 1878년 어느 날 밤, 만달레이 왕궁은 등불로 화려하게 장식되었고, 연회가 열리고 있었다. 그날은 미얀마 역사상 가장 피비린내 나는 밤이었다. 왕실 구성원들이 집단으로 궁전 뒤편으로 끌려갔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몽둥이로 맞았다. 비명이 끝난 후, 이 시신들은 자루에 담겨 이라와디(Irrawaddy) 강에 버려졌다. 더욱 소름 끼치는 점은, 목격자에 따르면 당시 20세가 되지 않은 신부인 수파얄랏이 현장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았고, 그녀의 눈빛에는 오히려 흥분이 반짝였다고 한다. 비록 그녀는 말년에 당시 너무 어려서 그 학살 계획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변명했지만, 의심할 여지없이 그 학살은 티바우 왕의 장애물을 제거했고, 수파얄랏을 온전한 왕궁의 여주인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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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녀는 나약한 남편 티바우 왕을 닦달하여 자기가 독점을 했다. 온갖 권모술수를 부려서 언니를 제1왕비에서 몰아내고, 자기가 제1왕비 자리를 차지했다. 그 후에는 남편에 대한 통제욕이 강해 병적으로 변했다. 그녀는 티바우 왕이 다른 여성과 접촉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친자매들조차 그에게서 격리시켰다. 그녀의 강력한 압박 아래, 원래 나약했던 그 왕은 역사상 최초로 '일부일처제' 군주가 되었다. 자기의 여동생만 명목상의 왕비로 앉혔지만 밤 생활은 철저히 감시하여 합방을 시켜주지 않았다. 수파얄랏은 임신 중임에도 불구하고 티바우 왕의 후궁인 다잉 킨 킨(Daing Khin Khin)을 처형했다. 한편으로는 잔혹하고 독재적이어서, 내부적으로는 정적을 억압하고 조정을 장악하며 권력을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녀는 특히 왕실 지출과 관련된 개혁파 장관들의 왕권 제한 시도에 저항했다. 서구 역사가들은 수파얄랏 여왕이 좋아하는 하인, 궁정 음악가, 무용수, 연예인들에게 상당한 양의 금과 보석을 보상으로 자주 주었다고 기록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의 대의에 직면했을 때 그녀는 영국인조차 골머리를 앓게 만든 강경파였다. 그들 부부가 즉위할 시기에 버마의 남부는 이미 영국이 점령하고 있었다. 하지만 수파얄랏은 영국의 미얀마 내 모든 침투를 단호히 반대했다. 재상 우 카웅이 영국 군대의 위력을 잘 알고, 왕실이 영국과의 충돌을 피하고 적절하게 화의(和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단호히 거절했다. 도리어 노인이 너무 소심해서 여자가 입는 치마를 입어야 한다면서 집으로 여성옷과 화장품을 보내라고도 했다. 영국 식민 관리들이 '국왕을 알현할 때는 신발을 벗어야 한다.'는 전통에 대해 그녀는 단호히 양보하지 않았다. 영국인의 눈에는 이것은 야만적인 오만함이었지만, 수파얄랏의 눈에는 이것이 미얀마 주권의 존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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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영국에 고개 숙이는 것을 거부했고, 심지어 프랑스를 외부 지원 세력으로 끌어들여 동남아시아에서 영국의 세력을 견제하려 했다. 그녀는 여학교 설립을 추진하여 미얀마 여성들이 문자를 알 수 있도록 했고, 심지어 사유 재산을 동원하여 노예들의 몸값을 지불해 주기도 했다. 이러한 행동들은 그 암울하던 시대에 다소 앞서가는 정책이었다. 그러나 영국이 원한 것은 미얀마의 목재, 토지 등 전략적 자원이었다. 그들은 누가 국왕이고 누가 왕후인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재물을 획득하는 것을 가로막기만 하면 대상을 멸망시킬 이유가 될 뿐이었다. 1885년, 영국은 '목재 탈세 사건'이라는 모호한 구실로 3차 영국-미얀마 전쟁을 일으켰다. 2만여 명의 영국군이 직접 미얀마 상부로 진격했다. 얼마나 허무하게 무너졌는지, 보름도 채 안 되어 영국군은 수도 만달레이 성 바로 아래까지 이르렀다. 티바우 왕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항복을 선택했다. 그 장면은 수치스러운 역사로 기록되었다. 영국군이 왕궁에 난입했을 때, 모든 신하들은 무릎 꿇고 항복하며 살아남을 방법을 찾으려 애썼다. 티바우 왕은 벌벌 떨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오직 수파얄랏만이 여전히 높이 의자에 앉아 있었고, 화장은 정교했으며 표정은 냉담했다. 그녀는 심지어 위세를 부리는 침략자들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돌려 아무렇지도 않게 한 영국 군인에게 자신의 담배에 불을 붙여 달라고 명령했다. 그 담담한 태도 속에 담긴 경멸은 현장에 있던 영국 장교들까지 오싹하게 만들었다. 그 순간의 오만함은 미얀마 왕실의 마지막 존엄이 되었다.

제3차 영-버마 전쟁에서 패배하여 항복한 후 그들은 1885년 영국에 의해 퇴위할 수밖에 없었다. 1885년 11월 25일, 그들은 덮개가 있는 마차에 실려 만달레이 궁전 성벽 남문에서 출발해 영국 군인들과 울부짖는 신하들이 늘어선 거리를 따라 이라와디 강으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투리야(Thuriya, 태양)'라는 증기선이 기다리고 있었다. 티바우는 27세, 수파얄랏은 26세였다. 그들은 죄수처럼 머나먼 인도로 압송되었다. 그녀는 아들을 임신 중이었고 남편과 두 딸, 두 자매, 그리고 어머니와 함께 있었다. 영국 병사들은 그녀를 발음이 비슷한 '수프 플레이트(Soup Plate)'라고 별명으로 불렀다. 왕궁에서 황급히 철수하는 상황에서 몇몇 왕관의 보석이 사라졌는데, 그중에는 슬레이든(Sladen) 영국 대령이 안전하게 넘겨달라고 고집한 큰 루비인 응 마우크(Nga Mauk)도 포함되었다. 티바우는 1911년 조지 5세 영국 국왕이 인도를 방문했을 때, 버마 왕관의 보석 반환을 요청했으나, 슬레이든 대령이 1890년에 사망했다는 답변만 받았다. 이 루비는 이후 영국 왕관에서 가장 큰 루비로 발견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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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라트나기리(Ratnagiri)에서 보낸 세월은 한때 권력을 휘둘렀던 이 수파얄랏 왕후의 생애에서 가장 암울한 시간이었다. 영국은 미얀마 사람들의 미련을 완전히 끊기 위해, 그녀를 일부러 불교 신앙의 고향과 먼 인도에 감금했다. 그녀는 아라비아해를 마주한 낡은 왕궁에서 30년이 넘는 긴 유폐 생활을 보냈다. 그녀는 거기서 아들과 딸 둘을 더 낳아서 1남 4녀를 두었으나, 아들은 일찍 죽었다. 여동생 수파야지는 남편 티바우 왕과의 사이에 자녀가 없었다. 아마 수파얄랏의 견제로 임신을 못 했나 보다. 그래서 언니의 아이들을 돌보다가 1912년에 죽었다. 남편 티바우 왕도 1916년에 5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수파얄랏은 남편의 시신을 버마에서 제대로 된 장례 의식과 함께 안장할 권리를 위해 싸웠다. 그녀는 궁전 부지에 묻힌 여동생과 남편의 시신을 당국에 넘기기를 거부했고, 결국 당국은 그들을 강제로 1919년 라트나기리에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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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이 되어서야, 한때 생살여탈권을 쥐었던 이 여인은 미얀마로 돌아오는 것이 허락되었다. 이때 그녀는 이미 그 위세를 떨치던 왕후가 아니라, 풍상에 시달린 노인이 되어 있었다. 돌아온 그녀는 여전히 왕후로서의 마지막 집착을 유지했다. 그녀는 영국적인 요소가 담긴 옷을 입는 것을 거부했고, 영국인을 접견하는 것을 거부했다. 비록 자신의 땅에서도, 그녀는 모든 방문객이 전통적인 미얀마 왕실 예절에 따라 자신을 배알 할 것을 고집했다. 즉 여왕은 손님 위에 앉고, 하인들이 배를 대고 방 안을 미끄러지듯 돌아다녔다. 그것은 골수에 사무친 자존심이었다. 비록 나라는 망했고, 비록 몸은 갇혔지만, 그녀는 '대미얀마'의 마지막 체면을 유지하려 한 것이다. 그녀가 버마로 돌아왔을 당시, 나라는 민족주의 열기에 휩싸여 있었다. 그녀는 반식민주의와 민족주의 정서의 중심이 되었다. 버마의 위대한 민족 시인이자 정치지도자였던 흐마잉(Thakin Kodaw Hmaing)은 다른 민족주의자들과 함께 여왕 보호 위원회를 창설했다. 위원회는 영국 정부에 수파얄랏의 생활 여건을 개선하고 소액의 수당을 제공할 것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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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파얄랏은 끝까지 영국 통치를 경멸했으며, 그녀는 영국 제품과 자국 식민 통치자들과의 모든 연관성을 멀리했다. 그녀는 1925년, 66번째 생일 직전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식민지 정부는 장례식 당일을 국경일로 선포했으나, 왕실의 만달레이 매장 요청도 거부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장례식은 버마 왕비답게 성대하고 의식적으로 거행되었다. 그녀의 시신은 8개의 흰색 왕실 우산 아래 보호된 채 안치되었으며, 90명의 불교 승려들이 독경을 하고, 영국 총독 하코트 버틀러 경이 직접 의장대를 이끌었고, 그리고 30발의 예포와 함께 기마경찰의 근위대가 참석했다. 수파얄랏은 수도 양군의 황금탑인 슈웨다곤 파고다 근처의 칸다민 가든 영묘에 묻혀 있으며, 이는 국무(國務) 고문(顧問) 아웅산 수치(Aung San Suu Kyi)의 어머니인 킨치(Khin Kyi)와 전 유엔 사무총장 우 탄트(U Thant)의 무덤 사이에 있다. 역사의 결과로 보면 그녀는 영국 식민지배자의 전리품인 동시에 미얀마 국민들의 마음속 민족 영웅이었다.(금삿갓 芸史 琴東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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