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인도 산적두목에서 국회의원된 풀란 데비

★금삿갓의 은밀한 여성사★(260325)

by 금삿갓

풀란 데비(Phoolan Devi)는 1963년 8월 10일 인도의 우타르프라데시(Uttar Pradesh) 주 잘라운(Jalaun) 지구의 고르하 카 푸르와(Gorha Ka Purwa) 마을에서 태어났다. 풀란 데비의 어머니는 물라(Moola)였고 아버지는 데비딘(Devidin)이었다. 그녀에게는 네 명의 자매와 한 명의 남동생이 있었다. 이곳은 남아선호 사상이 심해서 그녀가 태어나기 전부터 아버지는 아들이 너무 갖고 싶어 여기저기 알아보던 중, 임신한 여성이 진주가루를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소문을 듣는다. 아버지는 가산을 털어 귀금속가게에서 값비싼 진주를 사서 가로로 만든 뒤, 아내에게 억지로 먹였다. 그런데 정작 풀란이 태어나자 아버지는 실망하여 그녀를 외면했다. 이 지역은 야무나(Yamuna) 강과 참발(Chambal) 강이 흐르고 협곡과 계곡이 많아 산적(山賊)이 활동하기에 적합한 지형이었다.  그녀의 가족은 가난했고 인도 힌두 카스트 제도의 최하층에 속하는 말라(Mallah) 계층 출신이었다. 말라 계층은 전통적으로 어업에 종사하는 수드라(Shudras) 계층이다. 풀란 데비와 그녀의 자매들은 이 지역의 일반적인 관습대로 땔감으로 쓸 소똥을 만들어야 했다. 그녀의 가족은 병아리콩, 해바라기, 진주조를 재배했다. 아버지 데비딘에게는 비하릴랄(Biharilal)이라는 형이 있었고, 그에게는 마이야딘(Maiyadin)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아버지가 진주를 살 때 팔았던 토지를 비하릴랄과 마이야딘이 사면서 마을 지도자에게 뇌물을 주고 토지 기록을 바꿔 풀란 데비 아버지의 모든 땅을 빼앗았다. 그녀의 가족은 마을 변두리의 작은 집에서 살 수밖에 없었고, 삼촌과 그의 아들은 계속해서 풀란 가족을 괴롭히고, 농작물을 훔치며 마을에서 쫓아내려고 했다. 나약한 아버지는 아무런 대응도 못 해서 당하기만 했다. 10살이 된 풀란 데비는 이러한 불의에 항의하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언니 루크미니(Rukhmini)와 함께 빼앗긴 땅에 앉아 그곳에서 자라는 병아리콩을 먹으며 그 작물은 자기 가족의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촌오빠 마이야딘은 그녀들에게 떠나라고 명령했고, 그녀가 거부하자 의식을 잃을 때까지 때렸다. 그러자 마을 지도자는 그녀의 부모도 때려야 한다고 명령했다.

이러한 사건 이후, 사촌오빠 마이야딘은 풀란 데비의 부모를 위협하여 그녀를 강제로 결혼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녀는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30대의 홀아비 푸틸랄(Puttilal)이라는 남자와 결혼했다. 그 남자는 그녀의 부모에게 100 인도 루피와 소 한 마리, 그리고 자전거 한 대를 주었다. 원래 여자가 지참금을 가지고 시집가야 되는데, 도리어 아버지가 지참금을 받은 것이다. 원래 마을 관습대로라면 결혼한 여자아이는 초경(初經)을 하거나 성인이 될 때까지 친정에서 살다가 남편이 데려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어린 풀란 데비는 3년 후에 그와 함께 살기로 합의했지만, 푸틸랄은 3개월 만에 와서 그녀를 데려갔다. 그는 그녀보다 세 배나 나이가 많았고, 풀란은 ‘남편’이랑 무엇을 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녀는 무더위 속에서 곡식을 수확하고, 소를 몰고, 밥을 하고, 모욕을 당했으며, 조금만 실수해도 심한 구타를 당했다. 또한 그녀는 밤마다 그의 성적 학대에 시달렸다. 3년 내내 학대를 견디던 풀란은 해골처럼 수척해져서 지쳐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남편은 그녀가 집에서 죽으면 불길하다고 생각했고, 또 죽지도 않으면서 일도 못 하니 밥만 축낸다며 풀란 집에 연락해, 1만 루피의 지참금을 주지 않으면 데려가라고 통보했다. 그녀의 부모가 그녀를 데리러 왔을 때, 그들은 그녀를 의사에게 데려갔고 의사는 홍역이라고 진단했다. 아내가 소박맞는 것은 스캔들이었고, 풀란 데비의 부모가 수치심을 느끼지 않으려면 지참금 1만 루피를 주어야 했다. 하지만 그 돈을 구할 수 없었던 부모는 풀란 데비를 테오가(Teoga) 마을에 있는 먼 친척 집에 머물게 하였다. 그곳에서 그녀가 농장에서 일을 하다가 동네 남자에게 성폭행을 당할 뻔했는데, 최근 결혼한 이웃인 카일라쉬(Kailash)가 구해주었다. 이런 인연으로 둘은 가까워져 불륜 관계를 맺었고, 이런 사실이 카일라쉬의 아내에게 발각되어 마을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당하고, 마을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풀란 데비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자 마을 지도자의 둘째 아들이 그녀에게 반했고, 그녀가 그의 애정을 받아들이지 않자 그녀를 공격했다. 풀란 데비는 다시 마을을 떠나야 했고, 사촌 마이야딘은 그녀의 가족에게 전남편 푸틸랄에게 그녀를 다시 받아달라고 부탁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푸틸랄은 그렇게 하기로 했는데, 그 사이에 푸틸랄은 다른 아내를 맞이했다. 새 아내 풀란 데비를 노예처럼 부리고 학대했다. 이른 아침부터 일을 시키면서 밥도 잘 주지 않았다. 몇 년을 버티던 풀란은 다시 병에 걸렸고, 푸틸랄은 야무나 강가에 풀란 데비를 버렸고, 그녀는 다시 친정으로 돌아가야 했다.

원래 성질이 강직하고 급했던 풀란은 이런 고초를 겪으면서 더욱 강인한 성격으로 변했다. 소박맞은 여자라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에게 돌을 던지고 맞붙어 싸웠다. 그러니 자연히 친정 집의 일에 발 벗고 나서서 다른 사람들의 간섭을 막았다. 틈만 나면 풀란 가족의 재산을 가로채려고 하던 사촌 마이야딘은 풀란이 눈에 가시였다. 사촌은 풀란 가족의 농작물을 파괴하고, 그 땅에 있는 님(Neem) 나무를 베어서 팔아먹었다. 화가 난 풀란 데비가 그에게 돌을 던져 얼굴에 상처를 입히자, 마이야딘이 자신을 강도 혐의로 고발했기 때문에 그녀는 지역 경찰에 체포되어 한 달 동안 구금되었다. 그녀는 경찰서에서 여러 남성 경찰관들에게 성추행이나 성폭행을 당했다. 풀란 데비는 나중에 "그들은 나를 가지고 많이 즐거워했고, 나를 끔찍하게 구타했습니다."라고 회상했다. 당시 지역 사회에서 강간은 여성을 제자리에 묶어두기 위한 통제 및 처벌 수단으로 자주 사용되었다고 알려졌다. 가족들이 어렵사리 뇌물을 만들어 경찰에게 바치고 그녀가 풀려났다. 그녀가 다시 풀려나자 사촌오빠는 못마땅하여 무슨 수를 쓰더라도 그녀를 죽이거나 그 집에서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1979년 7월, 사촌오빠는 이리저리 연줄을 놓아 산적 두목과 연결했다. 두목의 이름은 바부 구자르(Babu Gujjar)로, 높은 카스트인 크샤트리아 계열 출신이었다. 그는 풀란과 같은 하층 말라인을 전리품이나 그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에 불과했다. 풀란은 바부에게 잡혀 참발 계곡 깊숙한 산적 소굴로 끌려가 매일같이 모욕과 성폭행을 당했다. 하지만 소굴 내부도 평탄치만은 않았다. 두목의 카스트는 높았지만, 휘하 부하들 중에는 풀란과 같은 말라(Mallah) 카스트 출신도 적지 않았다. 도적단의 2인자는 비크람 말라(Vikram Mallah)라는 남자로, 풀란과 같은 낮은 카스트였고 소굴 내 말라 출신 형제들의 실질적인 우두머리였다. 그는 말수가 적었지만 총솜씨가 좋고 위엄이 있어, 두목 바부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평소에도 그는 풀란이 두목에게 성폭행당하는 것에 분개하면서 그녀를 잘 돌봐주는 편이었다.

어느 날 두목은 만취한 술김에 일부러 부두목 비크람에게 시비를 걸었다. 비크람이 무시하자, 두목은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풀란을 성폭행하려 들었다. 풀란이 미친 듯이 저항하고 비명을 지르자, 두목은 이성을 잃고 칼을 뽑아 풀란을 위협했다. 그 순간, 총성이 울리고 두목이 그대로 쓰러졌다. 총을 쏜 사람은 바로 비크람이었다. 두목이 죽자 그가 새로운 우두머리가 되었고, 풀란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에서 두목이 보호하는 여자로 탈바꿈했다. 비크람은 풀란에게 “집에 가고 싶어요? 내가 사람을 붙여 돌려보내 드릴 수 있고, 돈도 좀 드리겠소.”라고 물었습니다. 하지만 풀란에게 가고 싶은 집이 어디 있겠는가. 풀란의 머릿속을 스친 것은 자신을 학대했던 남편, 경찰서에 넘긴 사촌오빠, 마을 사람들의 경멸 어린 시선, 그리고 경찰서에서의 지옥 같은 순간들이었다. 집에 돌아간다면 풀란은 여전히 다른 남자들이 마음대로 유린하는 계집애일 뿐, 그녀를 기다리는 것은 끝없는 성폭행과 경멸, 모욕뿐일 것이었다. 풀란은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녀는 비크람의 허리춤에 찬 총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도 남아서 함께 도적이 되겠습니다.” 풀란은 똑똑히 알고 있었다. 법이 자신을 보호해주지 못한다면, 스스로를 지키겠노라고. 풀란이 도적이 되어 가장 먼저 한 일은, 과거 자신을 학대했던 늙은 남편을 찾아가 때려눕히고, 마을에 끌고 가 온 마을 사람들 앞에 세운 뒤, 반쯤 죽은 그를 강가에 던져버린 것이었다. 그리고는 “늙은 놈이 어린 계집애를 탐내다간 이렇게 된다.”라는 내용의 쪽지를 목에 걸어놓았다.

그 후 1년 동안 비크람은 풀란에게 도적에게 필요한 무술을 가르쳤다. 풀란은 소총 분해법은 물론, 움직이며 사격하는 법까지 빠르게 익혔다. 그녀는 긴 머리를 잘라버리고 남성용 군복으로 갈아입었으며, 머리에 붉은 두건을 두르고 군화를 신었다. 두 사람은 부대를 이끌고 참발 계곡을 휩쓸었다. 그들은 이전 두목과는 달랐다. 여성을 모욕하지 않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서는 약탈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높은 카스트 악당들만 집중적으로 털어 일부 고(高) 카스트들은 집 밖에도 나가지 못할 정도로 공포에 질렸다. 풀란과 비크람은 그 덕분에 현지 빈민들에게 극진한 칭송을 받았고, 마을 사람들은 그들을 찬양하는 노래까지 지어 불렀다. 그들은 아름다운 도적이라는 다슈 순다리(Dasyu Sundari)로 불리며, 의적(義賊) 로빈훗이 된 것이다. 한편 두 사람의 관계도 날로 깊어졌다. 웨딩드레스도, 하객도 없었지만, 그들은 낡은 사원에서 두르가(Durga) 여신상 앞에서 서로의 사랑을 맹세했다. 그녀는 힌두 여신 두르가의 화신으로 여겨졌으며, 민간에는 경찰 제복을 입고 탄띠를 두른 그녀의 인형이 제작되기도 했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존재했다. 비크람의 도적단 내부도 모두가 하나는 아니었다. 옛 두목은 고 카스트인 타쿠르(Thakur)였기에 그가 우두머리여도 딱히 문제 될 게 없었다. 하지만 비크람은 달랐다. 저 카스트였기에, 도적단 내 고 카스트 출신들은 그를 잘 따르지 않았다. 비크람이 진정으로 의지할 수 있는 부하라고는 같은 저 카스트 출신 형제들과 풀란뿐이었다.

전통적인 인도 사회에서 고 카스트는 주인이고, 저 카스트는 노비이다. 그런데 이 도적단에서는 고 카스트가 도리어 저 카스트인 말라 출신에게 명령을 받고, 저 카스트 여자의 눈치까지 봐야 하는 상황이니, 누가 이를 참아내겠나? 도적단 내에 크샤트리아 계열의 타쿠르 출신인 스리 람 싱(Sri Ram Singh)과 동생 랄라 람 싱(Lalla Ram Singh) 형제가 있었다. 그들은 전임 두목이었는데, 같이 구속되어 있었다. 그들은 최근 비크람의 도움으로 가석방되었다. 그래서 겉으로는 비크람에게 극진한 척했지만, 뒤로는 자기편을 모아 다른 고 카스트 출신들과 수군거렸다. “어째서 우리가 이 불가촉천민들에게 머리를 숙여야 한단 말인가?” 이 형제들도 비크람의 총 솜씨와 능력을 알고 있었기에 정면으로 맞서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적당한 기회를 노리게 된 것이다. 두 형제는 타쿠르 출신 산적들을 대거를 새로 영입해, 풀란이나 비크람 같은 저 카스트 말라인들을 점차 배제하려고 했다. 마을을 약탈할 때면 두 형제는 말라 카스트 주민들만 골라 괴롭혔다. 산적단은 점차 저 카스트와 고 카스트, 두 파로 나뉘어 불과 물처럼 용납할 수 없게 되었다. 비크람은 이렇게 싸우느니 차라리 부대를 둘로 나누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두 형제는 단호히 거부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부대 전체였기 때문이다. 1980년 8월 12일, 타쿠르 출신 형제는 때가 왔다고 판단해 비크람이 잠든 사이에 방에 난입해 몇 발의 총으로 비크람을 살해했다. 그리고 잠들어 있던 풀란을 주먹으로 때려 깨운 뒤, 결박해 그들의 고향인 베흐마이(Behmai)로 끌고 갔다. 베흐마이는 비교적 폐쇄적인 타쿠르인 집성촌으로, 약 50여 가구가 살고 있었다. 마을 전체가 지주에서 농민까지 모두 고 카스트였다. 풀란은 이 마을 중심부의 흙벽돌집에 던져져 낮에는 끌려 다니며 마을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하며 일을 했고, 밤에는 마을의 남자들이 돌아가며 그녀를 찾아와서 강간했다. 그녀는 마을 사람들 앞에서 발가벗은 채 우물에서 물을 길어오도록 강요당하는 굴욕도 겪었다. 불과 3주 만에 풀란은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어 곪고 고열에 시달리며 인간의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망가졌다. 두 형제는 이쯤 됐으면 됐다 싶어 부하에게 풀란을 소달구지에 실어 근처 강에 던져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이 부하가 게으름을 피우는 바람에 풀란은 도중에 버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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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풀란의 생존 본능은 아주 강했다. 배고프면 풀뿌리를 씹고 목마르면 진흙탕 물이라도 마시며 죽음의 늪에서 기어 나와, 마치 짐승처럼 황야에 몸을 숨겼다. 그러던 중 비크람의 오랜 부하였던 만 싱(Man Singh)을 만나게 되었다. 만 싱은 강인한 남자로 의리를 중시했으며, 두 형제의 배신을 골수까지 증오하고 있었다. 두목 비크람이 죽은 후, 그는 부하들을 이끌고 숨어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우연히 풀란이 쓰러진 풀숲에서 그녀를 발견한 것이다. 몸을 회복한 풀란은 만 싱의 도움으로 신속하게 부대를 재건했다. 부대원은 모두 고 카스트에게 피해를 입은 저 카스트 빈민들이었다. 이 새로운 산적단은 이전처럼 부자들에게서 훔쳐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협객 집단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죽은 비크람과 학대당한 풀란의 복수를 위해 만들어진 복수 혈맹단이었다. 1980년 말부터 1981년 초까지 풀란은 이 부하들을 이끌고 계곡 일대를 샅샅이 뒤졌다. 그들은 돈도, 식량도 약탈하지 않고, 오직 사람만 잡았다. 곳곳에서 두 형제의 거점을 습격하고, 그들의 첩자를 고문해 두 형제의 소재를 캐물었다. 1981년 2월, 누군가 풀란에게 두 형제와 그녀를 괴롭혔던 폭도들이 베흐마이 마을로 돌아와 결혼식에 참석할 것 같다는 정보를 알려주었다. 2월 14일, 아무런 표시도 없는 지프차 몇 대가 황토 먼지를 일으키며 베흐마이 마을로 돌진했다. 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경찰의 카키색 제복을 입고 있었다. 주민들은 처음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이 무법 지대에서 경찰이 산적단을 잡으러 마을에 오는 건 일상다반사였고, 대개 돈을 좀 주거나 닭 한 마리 잡아 대접하면 가버렸기 때문이다. 특히 고 카스트 마을이라면 경찰과 한통속이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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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경찰들’이 신속하게 길목을 봉쇄하고 총구를 마을 사람들에게 겨누자, 그제야 주민들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선두에 선 ‘경찰관’은 체구가 작았고, 얼굴은 붉은 천으로 반쯤 가렸으며, 손에 든 것은 경찰용 소총이 아닌 다른 총이었다. 이 사람은 바로 복수하러 온 풀란이었다. 풀란이 이끄는 도적단은 마치 가축을 몰듯 마을의 장정들을 집 밖으로 끌어냈다. 풀란은 총을 든 채 이 남자들의 머리채를 잡아 얼굴을 들어 올리며 하나하나 확인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두 형제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확성기를 통해 마을 사람들에게 스리 람 싱과 그의 동생을 넘겨달라고 요구했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 죽이겠다고 했다. 형제가 나오지 않자 산적들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귀중품을 약탈했다. 마을에 있던 22명의 남자를 야무나 강변에 줄 세워 뒤에서 총살했다. 20명이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2명만 살아남았다. 이는 인도 현대사에서 저 카스트 집단이 고 카스트 집단을 대상으로 자행한 최초의 대규모 역학살(逆虐殺) 사건이었다. 원수는 없지만, 이들이 이 마을 출신이니 마을 전체가 함께 책임을 지라는 심정이었다. 범죄 심리학에서는 이를 ‘증오의 일반화’라고 부른다. 구체적인 복수 대상이 사라지면, 피해자는 증오심을 집단 전체에 투사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 남자들 중에는 자신을 괴롭혔던 얼굴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1981년 2월 15일, 베흐마이 마을 대학살 소식이 인도 전역에 퍼졌다. 정부와 상류 사회는 극도로 분노했다. 당시 사망자들이 모두 타쿠르족으로 여겨지자 타쿠르족 농민들은 인디라 간디(Indira Gandhi) 총리에게 강력한 법 집행을 촉구했다. ‘철의 여인’ 인디라 간디는 이 사건을 직접 지휘했다.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우타르프라데시 주의 수상은 사임했다. 경찰은 현상금을 10만 루피로 올렸고, 수천 명의 특별 경찰을 투입해 풀란 토벌에 나섰다. 하지만 저 카스트 빈민가의 오랜 시간 억압받아 온 사람들 사이에서 풀란을 ‘사자를 탄 두르가 여신’이라 부르며 숭배했다. 수천 년 동안 고 카스트가 저 카스트를 죽이는 일은 있어도, 저 카스트가 고 카스트를 죽이는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풀란이 쏜 이 총성은 어떤 이들의 수천 년 된 우월감을 산산 조각냈을 뿐만 아니라,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겠는가?”라는 확신까지 만들어냈다. 장사꾼들은 이틈에 풀란의 초상화와 인형을 팔아 한몫 챙기기도 했다. 이처럼 민심이 갈리면서 이후 체포 작전에도 큰 어려움을 겪었다. 1981년부터 1983년까지 무려 2년 동안, 인도 정부는 풀란을 잡기 위해 2만여 명의 인력을 동원했다. 경찰뿐만 아니라 국경수비대까지 투입했지만, 풀란의 그림자조차 찾지 못했다. 한 가지 이유는 참발 계곡의 깊은 협곡과 험준한 지형으로 경찰이 들어가면 길을 잃기 일쑤였고, 오히려 매복에게 당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빈민들이 풀란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어, 감옥에 가는 위험을 무릅쓰고 풀란을 숨겨주며 경찰이 나타나면 일부러 엉뚱한 길로 안내해 경찰을 마을에서 헤매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풀란 데비에게 자수하도록 압력을 가하기 위해 칼피(Kalpi) 감옥에 5개월 동안 수감되기도 했다.

2년 동안 체포하지 못하자, 인도 정부의 체면은 말이 아니었다. 한편, 매일 도망해야 하는 풀란의 상황도 좋지 않았다. 의약품이 부족한 데다 신장과 부인과 질환이 악화되어 땅바닥을 구를 정도로 심한 고통에 시달렸다. 계속 도피 생활을 하는 것도 뾰족한 방법이 아니었다. 1983년에 풀란은 지역 경찰관 라젠드라 차투르베디(Rajendra Chaturvedi)와 중개인을 통해 협상을 시작했다. 항복할 수는 있지만, 몇 가지 조건을 먼저 들어달라는 것이었다.

첫째, 절대 우타르프라데시 주 경찰에게 항복하지 않는다. 베흐마이 학살 사건이 바로 이 주에서 일어났고, 그곳 경찰은 대부분 타쿠르인으로 풀란에게 원한이 가득했다. 그들에게 넘어가면 무조건 죽음이었기에, 풀란은 마디아프라데시(Madhya Pradesh) 주 경찰에 항복하고 재판도 이곳 법정에서 받기를 요구했다.

둘째, 약 8,000명의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공개적으로 항복해야 하며, 미디어 앞에서 대낮에 이루어져 전 세계에 알려져야 정부가 뒤에서 몰래 죽이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했다.

셋째, 수갑을 채우지 않고, 일당의 누구든 사형 선고는 안 된다. 평생 감옥에 있어도 죽여서는 안 된다고 했다.

넷째, 가족을 마디아프라데시 주로 이주시키고, 정부에서 염소와 소를 키울 수 있는 땅과 집을 제공하며, 남동생에게는 일자리를 마련해 가족이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다섯째, 부하들의 아이들은 무상 교육을 받아야 하며, 정부는 어느 정도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 항복하는 부하들에게도 수갑을 채우지 말고, 무기와 탄약 출처를 캐묻지 않으며, 제대로 된 식사를 제공해야 한다고 했다. 이후 출소 시에는 총기 소지 허가증을 발급하고 주택과 토지 일부를 분배하는 등의 조건을 내걸었다.

쫓기는 풀란은 궁지에 몰렸지만, 그녀가 내건 조건 하나하나는 정부의 급소를 찌르는 것이었다. 소식이 델리까지 전해지자 관리들은 발칵 뒤집혀 당장이라도 토벌대를 보내고 싶어 했다. 하지만 마디아프라데시 주의 수상 아르준 싱(Arjun Singh)은 정계의 원숙한 여우였다. 만약 이 전설적인 ‘도적 여왕’을 전쟁 없이 회유할 수 있다면, 저 카스트 유권자들의 표는 고스란히 자신의 몫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처럼 각기 다른 속내를 가진 정부 지도부는 결국 풀란의 조건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1983년 2월 12일, 20세의 풀란은 마디아프라데시 주 빈드 마을에 도착해 공개적으로 주 수상에게 항복했다. 그녀는 7m 높이의 플랫폼에 서서 여신상 앞에 천천히 무릎을 꿇고, 손에 쥔 소총을 머리 위로 높이 들어 올렸다. 그녀와 만 싱을 포함한 7명의 남성 산적이 항복했다. 같은 해, 풀란은 그왈리오르(Gwalior) 중앙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그녀의 출신 주인 우타르프라데시 주 정부는 분노로 이를 갈았다. 죽은 22명 모두가 자신들의 주에 사는 고 카스트였기 때문이다. 우타르프라데시 주의 지배층들은 풀란을 산채로 잡아 교수형에 처하고 싶어 했지만, 마디아프라데시 주는 안전 문제를 이유로 단호히 인도를 거부했다. 결국 풀란은 두 주 사이에 낀 채 무려 10년 동안 살인, 납치, 강도 등 55개 혐의에 대한 재판이 열렸지만 무죄로 석방되었다. 베흐마이 마을에서 생존한 두 남성의 증언이 뒷받침되었는데, 그들은 총살 현장에서 풀란 데비를 보지 못했고 람 아브타르(Ram Avtar)라는 남자가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고 진술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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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수감 생활 동안,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 풀란은 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가장 쉬운 알파벳부터 시작해 신문을 읽고, 세상 밖에서 일어나는 일과 법이 무엇인지, 정치가 무엇인지 알아갔다. 그녀는 서서히 한 가지 진리를 깨달았다. “총은 사람을 죽일 수는 있어도, 사람을 구할 수는 없구나. 진정으로 신분을 뒤집고, 진정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권리를 찾아주고, 높은 자리에 군림하는 지배층을 끌어내리려면, 또 다른 무기, 바로 표(票)에 의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 1994년이 되었고, 풀란은 감옥에서 11년째 복역 중이었다. 그동안 인도 정계에는 저 카스트 의식의 거센 바람이 불어닥쳤다. 그녀의 고향 우타르프라데시 주에서 물라얌 싱 야다브(Mulayam Singh Yadav)라는 강력한 인물이 집권했다. 그는 사마즈와디(Samajwadi) 당의 수장으로, 풀란과 같은 저 카스트 빈민을 대변하는 인물이었다. 물라얌이 우타르프라데시 주 수상에 취임하자 가장 먼저 한 일은 ‘공공의 이익’이라는 명목으로 풀란 데비에 대한 모든 혐의를 취하하는 것이었다. 물라얌의 이런 결정에는 사심이 담겨 있었다. 풀란은 저 카스트 대중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기에, 그들을 자신의 지지 기반으로 삼으려면 풀란을 석방하는 데 반대하는 목소리를 무릅써야 했다. 우타르프라데시 주도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기로 하자, 마디아프라데시 주는 자연스럽게 풀란을 석방했다. 1994년 2월, 31세의 풀란은 새하얀 사리(Sari)를 입고 이마에 붉은 빈디(Bindi)를 찍고 교도소를 나왔다. 수천, 수만 명의 지지자들이 밖에서 기다리며 그녀의 이름을 연호하며 거리를 가득 메웠다. 많은 고 카스트 남성들조차, 풀란이 수감 중 자궁을 적출해 평생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었음에도 그녀와 결혼하고 싶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물론 그들이 풀란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녀의 정치적 영향력을 이용해 출세하려는 속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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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란은 출소한 후에 사마즈와디당에 입당하여 정치 행로를 걷다가 1996년에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그녀의 선거구 미르자푸르(Mirzapur)는 가난하기로 소문난 지역이었고, 주민 대부분은 저 카스트였다. 선거 운동 기간 동안 다른 후보자들은 양복을 차려입고 외교와 기반시설을 논했지만, 풀란은 그런 것들에는 문외한이었다. 그녀는 서민들에게 호소했다. “나는 마을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병원, 학교, 전기, 깨끗한 물을 가져다주고 싶습니다. 조혼(早婚)을 막고 여성의 삶을 개선하고 싶습니다.” 1996년, 풀란은 30만 표 이상을 얻어 압도적인 득표율 85%로 의원에 당선되었다. 이것은 실로 기적적인 결과였다. 이름조차 제대로 쓰지 못하는 문맹(文盲)에 22명의 집단살인 전과가 있는 전직 산적이, 어떻게 의기양양하게 로크 사바(Lok Sabha) 즉 하원의원으로서 뉴델리 국회의사당으로 집입할 수 있었을까. 더욱이 고귀한 브라만 의원들과 나란히 앉아, 과거 여러 번 자신을 철저히 배제했던 그 체제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풀란은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공개적으로 말했다. “나의 주요 목표는 가난한 사람들도 권력자들이 누리는 혜택, 즉 식수, 전기, 학교, 병원 등을 누릴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정부가 여성에게 일자리를 따로 마련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여성들은 교육을 받아야 하고, 조혼을 강요받아서는 안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평등입니다. 지금 여성의 지위는 신발만도 못합니다. 그들은 평등한 대우를 받아야 합니다. 저는 우리 국가와 국민이 함께 발전해 나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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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녀의 정치 행보가 순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선거 운동 기간 동안 그녀는 베흐마이 대학살 희생자 가족들의 거센 비판을 받았고, 크샤트리아 조직에서는 그녀에 반대하는 전국적인 항의 운동을 벌였다. 법원도 줄기차게 베흐마이 대학살에 대한 소송을 이어 왔지만 결국에 대법원이 구속의 필요성이 없다고 판결했다. 셰카르 카푸르(Shekhar Kapur) 감독이 풀란의 인기에 편승해 <Bandit Queen(산적 여왕)>이라는 영화를 만들었고, 이 영화는 국제적으로 수많은 상을 휩쓸며 풀란의 이야기를 전 세계에 알렸다. 하지만 풀란 본인은 이 영화를 극도로 혐오했다. 감독이 극적인 효과를 위해, 베흐마이에서 그녀가 당한 성폭행 장면을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묘사했기 때문이다. 풀란은 법원 앞에서 기자들에게 오열하며 말했다. “그들은 저에게 두 번째 성폭행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제 고통을 영화로 만들어 돈을 버는 것은, 결국 전 세계 사람들이 제 나체를 들여다보게 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풀란은 영화가 개봉하면 영화관 앞에서 분신하겠다고 위협했다. 이 사건은 제작사가 그녀에게 약 4만 파운드를 배상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풀란은 이 돈의 대부분을 고향의 빈민 학교에 기부했다. 이 무렵 그녀는 우메드 싱(Umed Singh)이라는 남자와 결혼했다. 이 결혼에 대해 당시 많은 사람들은 정치적인 결혼 동맹이라고 평했다. 하지만 어쨌든 풀란은 꿈꿔왔던 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는 듯 보였다. 그녀는 아쇼카(Ashoka) 로드의 고위 관료 관저에 자리 잡았고, 경호원과 전용 차량이 있었다. 그녀는 카스트 제도가 싫어서 불교를 믿고, 채식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과거의 모든 일이 그 국회의원 증명서 한 장으로 말끔히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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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2001년 7월 25일 낮 1시 30분, 풀란은 점심을 먹으러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경호원이 먼저 차에서 내려 문을 열려는 순간, 대문 옆 그늘에서 세 명의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그중 한 명은 풀란 집에서 소작을 하는 셰르 싱 라나(Sher Singh Rana)라는 남자였다. 라나는 자신이 풀란의 열혈 팬이라고 자처하며, 매일 아침 풀란을 찾아와 발에 절하는 인사를 하는 사람이었다. 풀란은 그를 깊이 신뢰했고, 때때로 그에게 운전을 맡기거나 서재에서 서류를 정리하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풀란이 몰랐던 것은, 이 모든 것이 가짜였다는 사실이다. 라나는 타쿠르와 같은 계통의 크샤트리아 카스트로, 고 카스트 무사 계층에 속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어른들에게 그 대학살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고, 풀란에 대한 원한이 뼛속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 풀란은 고 카스트의 피를 묻힌 마녀였고, 법으로 심판하기는커녕 도리어 정부가 그녀에게 관직까지 주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이 직접 가문의 법을 집행하겠다는 것이었다. 결국 이날, 경호원이 문을 열고 그녀가 내리려는 찰나, 라나와 그의 공범들이 총을 겨누어 쏘았다. 세 발의 총알이 모두 풀란의 머리를 관통했고, 6발의 총알이 그녀의 몸에 맞았다. 풀란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경호원도 죽었다. 풀란이 죽자, 사회는 다시 두 동강이 났다. 저 카스트 빈민가에서는 수만 명의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가슴을 치며 통곡했다. 장례식 날에는 무려 5만 명의 인파가 몰려들었고, 현장은 극도로 혼란스러워 경찰은 고압 물대포까지 동원해 질서를 유지해야 했다. 슬픔에 잠긴 군중이 몇 번이고 영구차에 뛰어오르려 하고,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화장터에 뛰어들어 순장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베흐마이 마을에서는 풀란 암살 소식이 전해지자 마을의 과부들이 집 밖으로 뛰쳐나와 북을 치고 춤을 추며 악마가 드디어 벌을 받았다고 축하했다. 빈민들의 우상인 그녀가 죽자, 그녀의 가족과 새로운 남편 우메드 싱, 첫 남편 푸틸랄 가족 등이 그녀의 유산을 차지하기 위해 다툼을 벌였다. 풀란 데비의 명성은 사후 인도 전역에서 계속해서 높아졌고, 그녀는 호주의 네드 켈리(Ned Kelly), 헝가리의 산도르 로자(Sándor Rózsa), 멕시코의 판초 빌라(Pancho Villa)와 같은 무법자들과 함께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다. <Bandit Queen(산적 여왕)> 이외에도 그녀의 삶을 다룬 영화가 여러 편 제작되었다.(금삿갓 芸史 琴東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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