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아들 못 낳아 소박 당한 이란의 소라야 왕비
★금삿갓의 은밀한 여성사★(260301)
★금삿갓의 은밀한 여성사★(260124)
드디어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에 대공습을 퍼부으면서 전쟁이 시작됐다. 그는 의회의 승인을 받지 않은 관세 전쟁이 대법원에 무효 판결이 나자, 이번 이란과의 전쟁도 ‘전쟁(War)’이 아닌 ‘전투(Combat)’라고 표현했다. 전투는 의회의 승인을 받지 않아도 된다. 성격이나 규모로 보아 분명한 전쟁임에도 교묘하게 둘러대는 것이다. 필자 금삿갓이 감히 천조국(天朝國, 千兆國) 대통령의 정책 결정을 왈가왈부(曰可曰否)하려는 건 아니다. 이란 사태의 와중에 미국에 망명 중인 팔라비 왕조의 황태자 레자 팔라비가 언론의 주목을 받기에 문득 샤(Shah, 왕)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Mohammad Reza Pahlavi)의 두 번째 왕비로서 비운의 삶을 살았던 소라야 왕비를 생각해 본 것이다. 그녀의 이름은 소라야 에스판디아리-박티아리(Sorayâ Esfandiâri-Baxtyâri)로 1932년 6월 22일에 태어났다. 아버지 카릴 이스판다리-박티아리(Khalil Esfandiary-Bakhtiary)는 이란의 귀족으로 독일 대사를 역임하면서 러시아 태생의 독일인 아내 에바 카를(Eva Karl)과 사이에 1남1녀를 두었고, 소라야가 맏딸이다. 소라야는 베를린과 이스파한에서 자랐고 런던과 스위스에서 서구식 교육을 받았다. 소라야는 스위스에서 명문 여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진학을 위해 영국으로 가서 영어를 공부하고 있었다. 이때 그녀는 친척과 같이 사진을 찍은 것이 있었다. 그런데 이 사진 한 장으로 그녀의 운명이 바뀐 것이다. 당시 이란의 왕 레자 팔라비는 이집트의 파우지아(Fawzia) 공주와 결혼했다가 딸 하나를 낳고 이혼한 상황이었다. 1949년 어느 날 그녀 친척이 어떤 계기로 왕에게 그녀의 사진을 보여 주었고, 왕이 그녀의 사진을 보고 반하여 그녀를 궁궐로 초대했다. 그리고 어머니인 왕대비 타지 올 몰루크(Tadj ol-Molouk)와 함께 저녁 식사를 대접했다. 왕과 왕대비는 그녀가 마음에 들었는지 결혼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그들은 곧 약혼을 발표하고 팔라비는 그녀에게 22.37캐럿(4.474g) 다이아몬드 약혼반지를 주었다. 그리고 결혼식 날짜는 1950년 12월 27일로 잡았다. 그녀는 아직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하기도 전이고, 남편과는 13살 정도의 차이가 나는 것이다.
소라야의 아버지가 비록 페르시아 입헌혁명의 지도자였고, 귀족 출신이지만 그가 러시아계 독일 여성과 결혼하여 소라야가 혼혈이고, 독일식 가톨릭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에 이란 국내에서는 여론이 좋지는 못했다. 이슬람 성직자들도 샤가 무슬림으로 자라지 않은 ‘유럽 혼혈 소녀’와 결혼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 당시만 하더라도 이란은 지금과 같은 강력한 이슬람문화가 지배하지 않았다. 사실 훗날 소라야도 이렇게 회고했다. “저는 무지했습니다. 조국의 지리, 전설, 역사, 특히 이슬람교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레자 팔라비는 여론이나 성직자의 권고를 무시하고 그녀와의 결혼을 밀어붙였고, 그야말로 그녀는 얼떨결에 떠밀려서 젊은 나이에 왕비가 되게 되었다. 정해진 결혼식 날짜가 다가왔는데, 신부에게 이상이 생겼다. 그들의 결혼 생활에 나쁜 징조가 될 것인지 몰라도 소라야가 심한 장티푸스에 걸려 앓게 되어 결혼식을 올릴 수 없었다. 결혼식은 다시 1951년 2월 12일로 연기되었는데, 이는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지 2년 만의 일이었다. 소문에 따르면, 샤는 장티푸스와 싸우는 동안 매일 그녀에게 보석을 하나씩 가져다가 그녀의 베개 위에 놓아주었다고 한다. 이런 그의 모습으로 보아 그녀를 매우 소중하게 여긴 것 같지만 결과는 어떨까? 연기된 결혼식 날에도 소라야의 건강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지만, 결국 결혼식은 예정대로 진행하기로 결정되었다. 결혼식은 테헤란의 골레스탄(Golestan) 대리석 궁전에서 호화스럽게 열렸다. 신부는 진주와 6,000개의 다이아몬드, 20,000개의 마라부황새의 깃털로 장식된 37야드 길이의 은색 금속성 직물소재로 만든 크리스천 디올 드레스를 입었다. 예식에서는 재킷과 베일을 매치했는데, 드레스의 무게가 무려 66파운드 즉 30kg에 달했다고 한다. 실제로 드레스가 너무 무거워서 장티푸스에서 완치되지도 않아 병약한 신부가 입고 예식 행사를 원활하게 치르지 못할 수도 있었는가 보다. 그래서 신부의 시녀 중 한 명이 드레스 자락을 가위로 잘라 무게를 20Kg으로 줄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또한 2월 중순이었고 궁전에 난방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신부는 추위를 막기 위해 드레스 속에 보온 내의와 양말도 착용해야 했다. 예식이 끝난 후, 재킷과 베일은 에메랄드와 다이아몬드 세트로 교체되었고, 왕관 보석도 추가되어 당시로는 초호화판 결혼 드레스로 기네스 북 감이었다. 외국에서 보내온 결혼 선물 중에는 소련의 서기장 조셉 스탈린(Joseph Stalin)이 보낸 밍크코트와 검은 다이아몬드가 박힌 책상 세트, 미국 대통령 트루먼(Truman)이 보낸 시드니 워(Sidney Waugh)가 디자인한 전설의 유리그릇인 슈토벤 보울(Steuben Bowl), 그리고 영국 조지 6세(George VI)와 엘리자베스(Elizabeth) 여왕이 보낸 은제 조지 왕조 시대 촛대가 있었다. 약 2,000명의 손님 중에는 인도 무슬림 총재 아가 칸(Aga Khan) 3세도 있었다. 예식은 네덜란드에서 비행기로 보내진 1.5톤의 난초, 튤립, 카네이션으로 장식되었다. 유흥 오락으로는 로마에서 온 기마 서커스가 공연되었다.
결혼식은 성대하고 화려했지만 그녀의 결혼 생활은 화려하지도 순탄하지도 못했다. 결혼 후 소라야는 이란에서 가족 자선 단체를 이끌었다. 소라야의 시집 생활은 순탄치 않았는데, 남편 샤 레자의 어머니와 누이들은 모두 그녀를 그의 첫 번째 아내인 이집트의 파우지아 공주와 마찬가지로 그의 사랑을 두고 경쟁하는 상대로 여겼다. 끊임없이 그녀를 무시하고 사소한 모욕을 가했다. 유럽식으로 자란 소라야는 고집이 세고, 자기주장이 아주 강하여 부부 싸움을 하면 굽히지 않았다. 한 번은 공개 파티에서 남편을 비난하며 값비싼 화병을 벽에 던져 깨뜨려서 주변을 놀라게 했다. 특히 부부 싸움을 하면 남편을 침실에서 내쫓았고, 몇 주일 간 섹스하기를 거부했다. 그래서 팔라비 왕은 그녀가 성적(性的)으로 문제가 있을지 걱정을 했다. 소라야는 남편 샤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개인 비서였던 스위스 출신 에르네스트 페론(Ernest Perron)을 몹시 싫어했다. 소라야는 페론을 “여자를 혐오하는 동성애자, 모든 여자를 혐오하는 사람”이자, “궁궐뿐 아니라 우리 집 안팎에 독을 퍼뜨리는 사람”이라고 불렀다. 그녀는 페론이 “교활하고 배신적이며 마키아벨리적인” 사람으로 “증오심을 불러일으키고, 소문을 퍼뜨리고, 모든 음모를 즐기는” 사람이라고 썼다. 소라야는 몹시 불쾌해하며 모하마드 레자가 자신을 “철학자, 시인, 예언자”라고 주장하는 “악마 같은 스위스인”에게 매료되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매일 아침 프랑스어로 국정을 논의했는데, 페론은 샤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조언자였기 때문이다. 소라야는 곧 다른 문제 즉 그들 부부관계의 은밀한 것들도 논의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소라야는 페론이 자신을 찾아와 샤와의 성생활에 대해 음란한 발언과 저속한 질문을 쏟아내자 격분하여 그를 대리석 궁전에서 쫓아냈다. 좌익 국민전선으로 선출된 모하마드 모사데그(Mohammad Mosaddegh) 총리와의 대립 기간 동안 샤 모하마드 레자는 종종 우울해했고, 소라야의 말에 따르면 침울하고 괴로워하고 있어서 그의 주요 취미 중 하나였던 친구들과의 포커 게임조차 그만둘 정도였다. 소라야는 오직 섹스만이 모하마드 레자의 우울함을 떨쳐낼 수 있다고 말하며, 그의 기분을 북돋아 주기 위해 종종 샤를 자신의 침대로 초대했다. 소라야는 여러 차례 모하마드 레자에게 “용기를 최대한 내라”라고 조언했다. 모사데그는 석유 국유화 정책으로 영국의 앵글로-페르시안 석유회사를 폐쇄시켰다.
공산주의 노선의 모사데그와 갈등으로 1953년 8월, 소라야는 샤가 로마로 피신했을 때 그를 따라갔고, 이탈리아 주재 이란 대사가 왕실 부부가 파파라치에게 끊임없이 시달리는 동안 머물 곳을 마련해 주지 않았다고 불평했다. 1952년 미국의 공화당 아이젠하워가 당선되면서, 이란의 왕정을 보호하고, CIA의 개입으로 모사데그의 축출 계획이 진행된다. 1953년 8월 19일, 소라야는 침울했던 모하마드 레자가 미국으로 이주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모사데그가 축출되었다는 전보를 받고 기뻐하며 소리쳤다고 했다. 모하마드 레자와 소라야가 가장 좋아했던 활동 중 하나는 가면무도회였는데, 소라야는 샤가 항상 사자 의상(왕족의 상징)을 입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그녀는 마담 드 퐁파두르로 변장하려 했지만 왕비에게는 부적절하다는 이유로 거부당했고, 결국 잔 다르크로 변장해야 했다. 소라야는 남편이 유럽적인 성격적 특징을 보일 때는 항상 칭찬했지만, 동양적인 행동을 보일 때는 비판했다. Soraya는 남편의 첫 번째 결혼과 자기 이전에 수많은 정부(情婦)를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이 여성들에게 매우 수줍어했고, 그는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썼다. 그의 눈을 표현력이 풍부하고, 짙은 갈색보다 거의 검은색에 가까운 빛나는, 때로는 강렬하고 때로는 슬프거나 부드러운 그의 눈은 매력을 발산하고 그의 영혼을 반영한고 칭찬했다. 소라야는 유럽에서 자랐기 때문에 이란은 그녀에게 낯선 나라였는데, 이란계 미국인 역사가 아바스 밀라니(Abbas Milani)는 이것이 그녀가 일반 이란인들에 대해 가졌던 태도, 즉 인종차별에 가까운 태도를 설명해 준다고 주장했다. 유럽은 그녀에게 항상 모든 면에서 탁월함의 모델이었다. 소라야는 여왕으로서 병원, 고아원, 자선 단체, 하늘이 뚫린 천막집인 주브(Djoub), 빨래하는 여인, 부랑자, 개들이 먼저 사용했던 더러운 물이 흐르는 개울이 있는 곳, 가난과 비참함, 구루병에 걸린 아이들, 쇠약해진 여성들, 굶주린 노인들, 골목길의 더러움, 진정한 가난이 만연한 곳을 방문해야 했다고 회고했다. 이란의 더러움에 대한 강조와는 대조적으로, 소라야는 파리가 자신을 눈부시게 했다며 공개적으로 감탄하며 글을 썼다. 소라야는 파리에서의 시간을 매일 마음이 햇살로 가득 찼고, 삶은 가벼웠다고 썼다. 영화관에 가고, 브래시 테라스에서 레모네이드 한 잔을 마실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멋진 일이었고, 이란에서는 금지된 즐거움이었다고 묘사했다. 소라야는 회색 교복, 연기를 내뿜고 교실을 오염시키는 난로, 수업, 숙제, 탈진할 정도로 힘든 일로 가득 찬 이란의 학교와는 달리 유럽에서 학교에 다니는 기쁨에 대해도 썼다.
1954년 10월, 모하마드 레자는 소라야에게 그녀가 나라를 이을 후계자를 낳아주지 못한 것에 대해 걱정하며, 미국에 가서 불임 전문의의 도움을 받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다. 1954년 12월 5일 출국하여 1955년까지 황실 부부는 장기간 미국을 방문했다. 뉴욕에서 소라야는 의사들을 만났는데, 의사들은 그녀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은 지난 2년간의 충격, 혼란, 그리고 고통 때문이라고 확신시켜 주었고, 이는 그녀를 안심시켰다. 그러나 보스턴에서 의사들은 그녀가 불임이며 아이를 가질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의 여행 기간이 길어진 것은 불임 진단을 받고 매우 상심한 소라야를 위로하기 위한 샤의 노력 때문이었다. 의사들이 소라야에게 밝힌 내용을 알지 못한 뉴스위크는 “왕 중의 왕인 황제, 신의 부왕, 전능자의 그림자, 우주의 중심이라 불리는 분조차도 휴가를 누릴 자격이 있다. 황제 부부는 이번 겨울을 미국으로 개인 방문을 하며 보냈다. 뉴욕 병원에서 건강 검진을 받고, 샌프란시스코에서 관광을 하고, 할리우드에서 맘보를 추고, 선 밸리에서 스키를 타고, 마이애미 비치에서 수상 스키를 탔다.”라고 비꼬듯이 썼다. 소라야는 할리우드에 매료되어 로스앤젤레스에 머무는 동안 미국 영화배우들을 만나는 것을 즐겼다.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동안 소라야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스타인 그레이스 켈리(Grace Kelly), 로렌 바콜(Lauren Bacall), 밥 호프(Bob Hope), 에스더 윌리엄스(Esther Williams), 험프리 보가트(Humphrey Bogart) 등을 만났다. 소라야 왕비가 비키니를 입고 마이애미에서 수상스키를 타는 사진은 이란에서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소라야는 무슬림에게 적절하지 않은 복장으로 여겨지는 수영복을 입었다는 이유로 부도덕하다는 비난을 받았고, 이슬람 율법학자 집단인 울라마(Ulema, Ulama)의 비판을 잠재우기 위해 해당 사진이 유포가 금지되었다.
1955년 2월 12일, 그들 부부는 유명한 여객선 퀸 메리호를 타고 미국을 떠나 영국으로 향했다. 런던에서 모하마드 레자와 소라야는 버킹엄 궁에서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에든버러 공작, 필립 왕자, 윈스턴 처칠 총리, 앤서니 이든 외무장관과 만찬을 가졌다. 여행의 마지막 일정으로 그들은 독일 쾰른을 방문하여 소라야의 부모님 댁에 머물렀다. 샤의 첫 번째 결혼에서 얻은 딸이자 벨기에에서 유학 중이던 샤나즈(Shahnaz) 공주도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쾰른에 왔는데, 이에 질투심에 사로잡힌 소라야는 남편에게 자신에게만 사랑을 보여달라고 요구하며 “당황스러운 짜증”을 부렸고, 결국 샤는 그녀에게 입을 다물라고 했다. 1955년 3월 12일, 샤와 왕비는 테헤란으로 돌아왔는데, 비가 내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천 명의 사람들이 그들을 환영하기 위해 나와 있었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샤는 자신의 총리인 파즐롤라 자헤디(Fazlollah Zahedi) 장군을 싫어했는데, 통풍으로 고통받던 자헤디가 테헤란 공항에서 자신을 환영하기 위해 비를 맞으며 서 있는 것이 눈에 띄게 불편해 보였다는 사실에 매우 기뻐했다. 1955년 후반에 샤는 바하이(Bahai) 신앙 소수자에 대한 박해를 재개하여 그들의 사원을 파괴했다. 이에 영국 외교관 데니스 라이트(Denis Wright)는 샤의 장관 아사돌라 알람(Asadollah Alam)에게 항의했다. 어쨌든 율법을 어긴 비키니 차림의 소라야 사진이 공개된 후 모하마드 레자는 울라마들을 달래기 위해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했다. 결혼식은 길조(吉兆)로 여겨지는 폭설 속에서 거행되었지만, 황실 부부의 결혼 생활은 소라야의 명백한 불임으로 인해 1958년 초에 파탄에 이르렀다. 샤의 유일한 자녀인 딸 샤나즈 공주는 그가 경멸하고, 1955년에 해임했던 전 총리 파즐롤라 자헤디 장군의 아들과 결혼했다. 샤는 소라야에게 “자헤디는 팔라비 왕조를 이어갈 수 없다.”며 팔라비 왕조가 계속되려면 아들을 낳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스위스와 프랑스에서 치료받고, 그리고 미국 세인트루이스에서 산부인과와 성의학자윌리엄 마스터스(William Masters)의 치료도 받았다. 그러나 허사였다. 샤는 후계자를 낳기 위해 두 번째 아내를 맞이할 것을 제안했지만, 그녀는 이를 거부했다. 소라야는 왕비로서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샤에게 1909년 헌법을 개정하여 그의 이복형제 중 한 명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무하마드 레자는 이를 위해서는 먼저 "현자회의 승인"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헌법을 읽어본 적이 없는 소라야는 "현자회의"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몰랐는데, 이는 샤가 어려운 결정을 미루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무하마드 레자는 이미 헌법을 두 번이나 개정했으므로, 개정안 승인을 위해 "현자회의"를 요구하는 조항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시어머니는 소라야를 미워했고, 팔라비 왕조를 이어갈 아들을 낳는 것이 그녀의 의무라며 이혼을 압박했다. 모하마드 레자는 소라야에게 이란을 떠나 있도록 설득하면서 헌법을 바꾸기 위해 "현자 회의"를 소집하겠다고 약속했다. 실제 샤 팔라비의 동생 알리 왕자가 1954년 가을에 비행기 사고로 죽자 헌법 개정은 물 건너간 것이다. 이러한 약속에도 불구하고 소라야는 남편이 자신에게 등을 돌렸다는 것을 감지했다. 그녀는 1958년 2월에 이란을 떠나 결국 독일 쾰른에 있는 부모님 집으로 갔는데, 샤는 3월 초에 그녀를 이란으로 돌아오도록 설득하기 위해 아내의 삼촌인 사르다르 아사드(Sardar Assad)를 그곳으로 보냈다. 소라야는 샤가 두 번째 아내를 맞이하는 동안 자신은 왕비로 남으라는 제안을 거절했고, 회고록에서 모하마드 레자를 "근본적으로 동양인"이라고 칭하며 "사랑을 위해 왕위를 희생한" 윈저(Windsor) 공작과 부정적으로 대조하면서 "동양인"만이 왕위를 위해 사랑을 희생한다고 썼다. 3월 5일, 모하마드 레자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두 번째 아내를 맞이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혼하겠다고 말했다. 3월 10일, 고문 위원회는 샤를 만나 파탄 직전의 결혼 생활과 후계자 부재 문제를 논의했다. 나흘 후, 황실 부부가 이혼할 것이라는 발표가 나왔다. 이란 정부가 발표한 보도 자료에 따르면 소라야는 이혼에 동의했다고 했지만, 소라야는 나중에 3월 5일에 남편으로부터 마지막으로 연락을 받았으며 사전에 통보받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25세의 왕비는 "내 행복을 희생한 것"이라고 말했다.
<처칠과 팔라비부부>1958년 3월 21일은 이슬람의 설날인 노루즈(Nowruz)인데, 이 날 샤(Shah)는 라디오와 텔레비전으로 방송된 연설에서 이란 국민에게 이혼을 발표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서둘러 재혼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결혼은 1958년 4월 6일에 공식적으로 끝났다. 뉴욕 타임스(The New York Times)의 보도에 따르면, 소라야 왕비를 설득하여 남편이 두 번째 아내를 맞이하도록 하기 위해 이혼에 앞서 광범위한 협상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왕비는 결혼의 신성함을 언급하며 "남편의 사랑을 다른 여자와 나누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라고 결정했다. 소라야는 독일 부모님 댁에서 이란 국민에게 발표한 성명에서 "무함마드 레자 샤 팔라비 황제 폐하께서 황위 계승자는 대대로 직계 남성 후손이어야 한다고 정하셨기에, 저는 깊은 유감을 표하며 국가의 미래와 국민의 복지를 위해, 황제 폐하의 뜻에 따라 저의 행복을 희생하고 황제 폐하와의 별거에 동의합니다."라고 밝혔다. 소라야는 이혼에 대한 보상으로 샤로부터 300만 달러 상당의 파리 펜트하우스 아파트와 매달 7,000달러의 위자료를 지급받았으며(이는 1979년 이슬람 혁명으로 모하마드 레자가 축출될 때까지 계속 지급되었다), 1958년형 롤스로이스 팬텀 IV, 메르세데스-벤츠 300 SL, 불가리 루비, 반 클리프 앤 아펠 브로치, 22.37캐럿 다이아몬드가 박힌 해리 윈스턴 플래티넘 반지와 같은 다양한 사치품을 받았다. 이 반지는 그녀가 사망한 후 유산 경매에서 838,350달러에 팔렸다. 이혼 후, 전 왕비에 대한 자신의 감정에 대해 묻는 기자에게 "나보다 더 오랫동안 횃불을 들고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고 말했던 샤는 폐위된 이탈리아 왕 움베르토(Umberto) 2세의 딸인 사보이의 마리아 가브리엘라(Maria Gabriella of Savoy) 공주와 결혼하는 데 관심을 보였다. "무슬림 군주와 가톨릭 공주"의 결혼을 둘러싼 소문에 대하여 바티칸 신문인 L'Osservatore Romano는 사설에서 이 결혼을 "심각한 위험"으로 간주했다. 1년 후 그는 파라 디바(Farah Diba)와 재혼하여 두 아들을 포함해 네 자녀를 두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소라야에게 그렇게 집요하게 요구했던 그의 후계자는 '불필요한 존재'로 판명되었다. 1978년과 1979년의 정치적 봉기 이후 호메이니(Khomeini)가 그의 정권을 계승했고, 그는 망명길에 올라 그로부터 1년 후인 1980년 7월에 사망했기 때문이다.
이혼 후에 소라야는 ‘이란의 공주’ 또는 ‘슬픈 눈의 공주’라는 칭호와 풍부한 재정적 지원을 바탕으로, 그녀는 유럽을 누비며 사교계 명사로 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배우 막시밀리안 셸(Maximilian Schell)과 부유한 상속인 군터 작스(Gunter Sachs)와 관계를 맺었고, 뮌헨에서 잠시 살기도 했다. 이후 소라야는 프랑스로 이주했다. 그녀는 영화배우로서 짧은 경력을 쌓았는데, 처음에는 디노 데 로렌티스(Dino De Laurentiis)가 감독하는 러시아 황후에 관한 영화에서 예카테리나 대제를 연기할 것이라고 발표되었지만, 그 프로젝트는 무산되었다. 대신 그녀는 1965년 영화 <세 얼굴(I tre volti)>에 출연했고, 이 영화의 이탈리아 감독인 프랑코 인도비나(Franco Indovina)와 연인 관계가 되었다. 그녀는 1965년 영화 <그녀(She)>에서 본명인 소라야라는 이름의 캐릭터로 출연했다. 인도비나가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한 후, 그녀는 남은 생애를 유럽에서 보내며 우울증에 시달렸고, 이를 1991년 회고록인 <고독의 궁전(Le Palais des solitudes)>에 자세히 기술했다. 소라야는 생애 마지막 몇 년을 파리 몽테뉴 거리 46번지에서 보냈다. 그녀는 라 로슈푸코(La Rochefoucauld) 공작부인이 주최하는 파티에 자주 참석했고, 아파트 맞은편에 있는 플라자 아테네 호텔 바에서 술을 즐기는 것을 좋아했다. 그녀는 당시 파리 사교계의 유명 인사였던 릴리 클레르 사란(Lily Claire Sarran)을 비롯한 여러 유명인들과 어울리곤 했다. 화려한 생활을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소라야는 진정한 행복을 찾지 못했다. 1979년, 소라야는 파나마에서 암으로 죽어가던 모하마드 레자에게 편지를 써서 여전히 그를 사랑하며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만나고 싶다고 했다. 모하마드 레자는 그녀의 편지에 크게 감동하여 답장을 보내 자신도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며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만나고 싶다고 했지만, 세 번째 아내인 파라 황후가 참석할 수 없다고 했다. 파라 황후는 임종을 앞둔 모하마드 레자의 곁을 계속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1980년, 소라야가 카이로에 있는 모하마드 레자를 방문하기로 했지만, 그녀가 가기 전에 그가 사망했다.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는 역사가 아바스 밀라니(Abbas Milani)로 하여금 그들을 진정한 '운명의 연인'이라고 묘사하게 만들었다.
소라야는 2001년 10월 25일 프랑스 파리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알려지지 않은 원인으로 사망했다. 그녀는 69세였다. 그녀의 사망 소식을 접한 그녀의 남동생 비잔(Bijan)은 슬프게 "그녀가 세상을 떠난 후, 나는 더 이상 이야기할 사람이 없다."라고 말했다. 비잔도 일주일 후에 사망했다. 2001년 11월 6일 파리의 미국 대성당에서 열린 그녀의 장례식에는 팔라비 왕의 여동생 아슈라프 팔라비(Ashraf Pahlavi) 공주, 팔라비 왕의 이복동생 골람 레자 팔라비(Gholam Reza Pahlavi) 왕자, 파리의 백작 부부, 나폴리 왕자 부부, 오를레앙의 미셸 왕자, 이라 폰 퓌르스텐베르크 공주가 참석했으며, 이후 그녀는 부모님과 남동생과 함께 뮌헨의 공동묘지인 베스트프리드호프 구역 143번지에 묻혔다. 그녀가 사망한 이후, 1962년에 태어났다고 알려진 그녀의 사생아라고 주장하는 여러 여성이 나타났다. 페르시아어 주간지 Nimrooz 에 따르면 이러한 주장은 확인되지 않았다. 이 신문은 또한 2001년에 증거 없이 소라야 공주와 그녀의 남동생이 살해당했다는 기사를 게재했다. 그녀의 소지품은 2002년 파리에서 경매를 통해 830만 달러 이상에 팔렸다. 소라야 공주는 두 권의 회고록을 썼다. 첫 번째 회고록은 1964년에 출간되었고, 미국에서는 더블데이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사망하기 10년 전, 그녀는 루이 발렌틴(Louis Valentin)과 공동으로 프랑스어로 또 다른 회고록인 <고독의 궁전(Le Palais des solitudes)>을 썼는데, 이 책은 영어로 번역되어 1992에 출간되었다.(금삿갓 芸史 琴東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