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거문고의 명인 이원영
G선 상에 청춘을 날려버린 악사
조선시대의 기술자들과 예능인들은 언제나 중인(中人)이라는 신분으로 문무관 아래서 굽실거려야 했다. 그러나 의원(醫員)·서사(書寫)·화사(畫師)들은 그나마 나름 약간의 대접을 받았다. 그런데 예술가들 중 가객(歌客)·금사(琴師)·악공(樂工)들은 이들 중인보다 훨씬 아랫자리에 놓여 형편없는 대접을 받기도 하고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다. 비록 그들이 조정에 들어와 낮은 벼슬을 했을지라도 그 말로는 대개 비참했다. 그러다 보니 이들의 삶에 대한 기록이나 명성을 살았을 당시 잠깐 반짝하다가 사라지고, 겨우 구전(口傳)으로만 전승되어 오니, 그 당시의 활약이나 명성에 대한 정확한 근거가 희박했다. 19세기 중엽의 이원영(李元永)이라는 거문고의 명인은 그나마 사대부로 광주유수(廣州留守)를 지낸 운양(雲養) 김윤식(金允植)의 기록에 의해 그의 생애가 일부 남게 되었다. 그는 <금사이원영전(琴師李元永傳)>을 써서 그의 문집인 <운양집(雲養集)>에 남겼다.
이윈영의 본명은 원풍(元豐), 자(字)는 군보(君甫)라 했다. 그의 고향은 어딘지 확실하지 않으나 1800년쯤에 서울 근방에서 태어나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산 듯하다. 그의 가계는 대대로 음악가의 집안이었는데 별로 뛰어난 명인은 없었다 한다. 그는 10살 이후 만악(縵樂, 느리고 가락이 적은 음악 형식)의 연주법과 거문고 타기를 배위 이름을 떨쳤으나 성품이 놀기를 좋아하고 호탕하여 집에 붙어 있지를 않았다. 열일곱 살 적에 액정서(掖庭署)에서 일을 보게 되었다. 이를테면, 왕실의 재정과 노비 등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던 관청이다. 그런데 그는 이때 현복(袨服)을 입고, 여러 친구들과 어울려 기방(妓房) 출입이 잦았다. 그때 노래 잘하는 유명한 기생이 있어서 친구들이 가깝게 접촉하기를 바랐지만 늘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그는 어느 날 이 친구들을 이끌고 많은 돈을 내서 그 기생과 어울려 놀았다. 이로 해서 그는 장안의 기생들 사이에서 '이별감(李別監)으로 통했다. 별감은 액정서의 중간 책임자의 직함이다. 그가 거문고에 심취해 있으면서 명창의 기생을 남달리 이해한 탓이 아니겠는가? 그 후부터 거문고 명인으로서의 그의 이름은 장안에 널리 퍼진 듯하다. 그는 훤칠한 용모에 훌륭한 음악적 역량까지 갖춘 인물이라서 인기가 많았다. 그리하여 금객(琴客)의 이름으로 그는 여기저기 불려 다녔고, 때로는 거문고 줄에 자기의 심금을 읊기도 했지만, 때로는 양반들의 술자리에 끼어 앉아 노리갯감이 되기도 했다. 그리하여 그의 뛰어난 거문고 솜씨는 금객(琴客)에서 금사(琴師)로 한층 높여주는 호칭을 받게 된 것이다.
그의 이름은 당시 왕인 순조(純祖)가 연로하여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하던 아들 효명세자(孝明世子, 훗날 익종으로 추존)의 귀에까지 들렸다. 효명세자는 그를 정무를 보던 창경궁(昌慶宮) 중희당(重熙堂)에 불러들였다. 이원영은 거문고를 끼고 들어가 매일 왕자 옆에서 거문고를 타며 그의 마음을 즐겁게 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이 내킬 리가 없었다. 몸도 마음도 제대로 놀릴 수가 없었을 테고 형식과 예절을 싫어한 그가 궁중생활에 익숙해질 리도 없었다. 그는 병을 핑계로 어렵사리 왕자의 결을 떠나왔다. 궁궐 밖을 나오자, 그는 날아갈 듯 몸이 가벼웠을 것이다. 그는 예전처럼 멋대로 노닐며 살았다. 그러나 세상은 그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높은 벼슬아치들과 이름난 선비들이 이런 자리 저런 자리에 그를 불렀다. 그는 때로는 흥이 나서 거문고를 타기도 했을 것이요, 때로는 마지못해 거문고 줄을 퉁겼을 것이며, 또 때로는 기방 용돈을 위해서도 거문고를 들고 다녔을 것이다. 어찌 됐거나 그의 명성은 더욱 장안 바닥을 울렸다. 높은 벼슬아치들은 그의 재주를 아껴 내수사(內需司) 별제(別提)의 경복장(景福將)이라는 벼슬을 내리도록 주선했다. 그리고 후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집정하여서는 이른바 예술가들을 무척 가까이 두고 아꼈는데 그를 자헌대부(資憲大夫, 정 2품)라는 상당히 높은 품계로 올려 주었다. 시골의 유생들이 생원·진사 따위의 아무 실권 없는 타이틀을 받기 위해 몇 백 냥, 몇 천 냥 주고 나서 시골바닥에서 군림하던 현실에서 자헌대부라는 품계가 얼마나 영광스러웠을까? 그러나 양반·벼슬아치의 노리갯감에 지나지 않는 이런 자리가 별로 마음에 내키지 않았고, 더욱이 허울 좋은 감투가 곧장 싫증이 났을 것이다. 그가 중년에 접어들었을 무렵, 창의문(彰義門) 바깥에 집터를 잡아 집을 짓고 '일계산방(一溪山房)'이라는 현판을 내걸었다.
이때 그에게서 거문고를 배우려는 청년들이 이 집으로 몰려들었다. 그에게서 거문고 줄잡는 법과 퉁기는 법을 조금이라도 익히면 곧장 좋은 곡조를 엮어낼 수가 있었던 탓으로 다투어 모여들었다. 그는 이들이 가져다주는 쌀과 돈으로 얼마동안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가정생활은 말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평생 가정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으니 그의 가족은 더 이상 서울에서 살 수가 없어서 수원의 송산촌(松山村)으로 이사를 했다. 그는 이제 연로한 데다가 눈이 어두워 물건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고, 저자 출입도 못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수원의 집으로 옮겨가 살게 되었는데, 그의 아들과 손자들은 때로는 나무를 하고, 때로는 농사를 지어 극진히 그를 봉양했다. 세상 사람들도 그를 잊고 있었다. 그가 가정에 돌아와 살게 된 것은 탕자(蕩子)의 귀가(歸家) 일 법도 했지만 그의 늙은 아내는 사뭇 달랐다. 그는 젊고 한창 거문고 재주를 부릴 적엔 명기(名妓)들과 어울려 많은 돈을 탕진하였고, 또 한껏 사랑을 속삭였다. 그러나 그가 늙고 병들어 눈마저 어둡자 아무도 돌보지 않고 떠나버렸다. 그의 아내는 병든 몸으로 돌아온 사내를 따뜻이 맞이하여 가난한 살림 속에서도 정성스레 공대했다. 그는 깊은 회한(悔恨)을 했고, 아내 보기가 부끄러웠다. 그의 아내는 이런 사내의 뜻을 헤아리고 "장부가 한번 세상을 질탕하게 놀다가 이런 궁벽(窮僻) 진 시골에서 지루한 나날을 보내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가?"라고 말하며 극진히 공대했다 한다. 그도 지난날의 행동을 뉘우치고 늘은 아내를 극진히 위해 주었다. 그의 방안에는 아무런 장식품도 없었고, 오직 벽에 거문고 하나만 덩그렇게 걸려 있었다. 그는 매양 가을이 깊거나 밤이 고요하거나 잎새에 바람이 솔솔 불적에 뜰에 앉아 늙은 아내를 옆에 앉히고 거문고를 뜯으며 노래를 불렀다. 이는 남에게 듣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들려주는 심금(心琴)이었다. 그의 아내도 이를 듣고 거문고 솜씨를 평할 정도라 했다. 이를 '지음(知音)'이라고 한다. 옛 중국에 거문고의 명인 백아(伯牙)의 친구 종자기(鍾子期)는 거문고 소리만 듣고도 백아의 기분을 알 수 있었단다. 이원영은 더욱 흥이 솟아나 "늙은 뒤에야 부부의 즐거움을 알았노라."라고 말했다. 이 또한 사마상여(司馬相如)가 탁문군(卓文君)을 가볍게 버려서 백두가(白頭歌)의 원망을 자초한 것보다 낫다.
구한말 개화파로 이름이 높았고 나중에 높은 벼슬을 지낸 김윤식(金允植)이 서른 살의 나이 적인 1865년에 화성(華城)의 건릉(健陵, 정조와 효의왕후 능) 능지기인 건침랑(健寢郞)이라는 하찮은 벼슬을 얻었다. 김윤식은 선비의 몸으로 어릴 적부터 '금객 이원영'에 대한 소문을 익히 듣고 있었다. 김윤식이 직재소(直齋所)에서 한가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적에 수원 고을에 바로 그 이원영이 살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하여 김윤식은 사람을 보내 그를 초대했다. 한식경이 지난 뒤에 키가 훤칠하고 기골이 늠름한 노인이 흰 수염을 드날리며 지팡이로 더듬거리며 문을 들어오고 있었다. 얼른 사람을 시켜 뜰에 오르게 하고 "내가 여기 있소, 내가 여기 있소."라고 외쳤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 또 말했다. "나는 이 영감님께서 다른 세상 사람인 줄 알았더니 영감님께서 참으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까?" 이원영은 김윤식 앞에서 거문고를 잡고 한참 응시하다가 거문고를 뜯으며 노래를 불렀다.
此身何身兮(차신하신혜) / 이 몸이 어떤 몸 인고
昵侍靑宮(닐시청궁) / 동궁(東宮, 세자)을 친히 모셨도다.
此琴何琴兮(차금하금혜) / 이 거문고가 어떤 거문고인가
得娛銅龍(득오동룡) / 동룡(용모양 분수로 궁궐에 있음. 즉 궁을 비유)을 즐겁게 했도다.
年華不留兮(연홪불류혜) / 꽃다운 나이는 머물지 않고
身如飄蓬(신여표봉) / 몸은 떠돌이 쑥대머리 같고
琴兮琴兮(금혜금혜) / 거문고여, 거문고여
誰知汝窮(수지여궁) / 누가 너의 궁색함을 알랴?
그는 노래가 끝나자, 천천히 거문고와 현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늙은 손가락으로 '상음(商音)'을 끌다가 '우음(羽音)'을 타니, 이 노래와 곡을 들은 좌중의 사람들은 하도 그 가락이 애잔하고 구슬퍼 모두 눈물을 흘렸다. 이에 한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던 김윤식은 말했다. "영감님께서는 늙었습니다. 다시 세상에 이름을 떨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영감님을 위해 뒷세상 사람들에게 알리는 전기를 쓰고 싶은데 괜찮습니까?" 이렇게 해서 김윤식은 그에 대해 들은 애기를 간단한 전기로 남긴 것이다. 김윤식은 전기의 끝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세상에서 경박하게 놀기 좋아하며, 값 비싼 천이 있다고 거친 것을 버리고, 어여쁜 여자를 중히 여겨 초췌한 부인을 박대하는 자들을 본다. 이들이 어찌 하루아침에 이 영감님의 처지가 되지 않을 줄 알겠단 말인가? 이 글을 보면 아마 감회가 솟는 바가 있을 것이다.” 이 말은 어느 정도 예술가의 처지를 생각하고, 그를 동정한 말이 될 것이다. 지난 시대 예술가를 천히 여기는 현실에서 그의 예술적 경지를 인정하고 이만한 전기(傳記)와 칭찬의 말이라도 써놓았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일 것이다. 사실, 왕조시대의 훌륭한 예술가들은 이름도 없이 사라졌다. 도공(陶工)은 비록 이름은 없지만 유형의 작품이라도 남겼으니, 뒷세상이 그의 명품을 감상할 기회를 전해 주었다. 그리나 소리꾼이나 금사(琴師)·악공(樂工)들은 그 무형의 예술품으로 하여 거의 뒷세상에 그 예술품이 전해지지 않을뿐더러 이름도 함께 사라졌던 것이다. 비록 일부의 판소리가 후에 다소 전수되어 명창의 이름이 전해지기는 하나 이는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19세기 중기에 살았던 이원영은 이런 전기라도 남의 손에 의해 남겼기에 뒷사람이 그의 행적을 알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