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무열왕(武烈王)은 삼국을 통일하고, 그 공적으로 태종(太宗)이라는 묘호(廟號)를 받아서 당(唐) 나라 고종(高宗)이 자기 할아버지 묘호와 같다고 고치라고 한 적도 있다. 그런데 일본의 제25대 천황은 왕호(王號)가 무열(武烈)로 같지만 매우 문제성 인물이다. 무열(武烈)을 일본어로 부레쓰로 읽는데, 거꾸로 읽으며 쓰레부로 쓰레받기 비슷하다. 부레쓰 천황은 489년 아버지 닌켄(仁賢) 천황과 어머니 유랴쿠(雄略) 천황의 황녀인 가스가노오이라쓰메(春日大郎子)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삼종(三從) 남매간이었다. 이름은 <일본서기>에서는 오하쓰세노와카사자키노미코토(小泊瀬稚鷦鷯尊) 또는 오하쓰세노와카사자키노스메라미코토(小泊瀬稚鷦鷯天皇)라고 했다. 그는 여섯째 아들이었기에 원래는 왕위와는 인연이 없었다. 당시 왕실은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피 터지게 싸웠고, 부레쓰의 여러 형들은 서로를 죽인 끝에 결국 모두 사망하여 그가 어부지리를 얻었다. 9살이 되던 498년에 부왕이 사망하자, 부레쓰는 닌켄 천황 계열의 유일한 남성 후계자라서 권신(權臣)들과 어머니 황후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즉위하기 전에 형들의 피 터지는 왕권 다툼을 보았고, 즉위한 후에는 어린 그에게 실권이 돌아오지 않음을 그는 뼈저리게 느꼈다. 그가 태자 시절이던 어느 날 쓰바이치(海柘榴市)의 우타가키(歌垣)에서 권신의 아들인 헤구리노 시비(平群鮪)가 태자를 상대로 노래 경쟁에서 이기자, 분노한 태자는 헤구리노 마토리에게 원한을 품게 되었다.
조정은 그의 생모와 여러 권신들이 장악했다. <일본서기>에도 "어린 천황이 즉위하자 정사는 어머니로부터 나오고, 권신 헤구리노 마토리(平群真鳥)가 보좌하여 천황에게는 실권이 없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어머도 단순한 어머니가 아니었다. 그녀는 야망에 차서 아들을 이용해 조정을 장악하려 했다. 부레쓰도 어릴 때부터 형들이 서로 죽이는 모습을 지켜보며, 어떤 이는 독살당하고 어떤 이는 참수당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권력이 없으면 목숨도 없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고, 이러한 공포와 갈망은 권력욕을 부채질하였고, 점차 그의 성격을 왜곡시켰다. 부레쓰는 어린 몸에 맞지 않는 용포(龍袍)를 입고 높은 용상에 앉아 있었지만 위엄을 부릴 수가 없었다. 그는 그저 남이 조종하는 꼭두각시 인형에 불과했지만, 절대 평생 이렇게 지배당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한 번은 권신(權臣) 헤구리노 마토리가 그의 면전에서 정무를 논쟁하며 그를 전혀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심지어 함부로 "어린애가 끼어들지 마라."라고 호통 쳤다. 부레쓰는 고개를 숙인 채 손톱을 손바닥에 깊숙이 파묻으며 분노와 두려움을 느꼈다. 그는 반드시 권력을 되찾아 다시는 남에게 괴롭힘 당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그는 어머니의 말을 듣는 척하며 어머니를 기쁘게 하려고 노력했지만, 뒤에서는 권력이 움직이는 요령을 관찰했다. 그는 어머니가 자신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힘임을 알았다. 그는 오직 어머니와 함께 있어야만 권신들로부터 조금씩 권력을 되찾고 꼭두각시 신세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억압 속에서 부레쓰는 점점 더 권력을 갈망하게 되었고, 극단적인 방법을 생각해 냈다. 그것은 어머니와 자신을 한 몸으로 묶고, 동시에 조정 신하들을 위협할 수 있는 방법, 바로 자신의 생모를 왕후로 맞이하는 것이었다. 그는 16세가 되던 504년에 모든 금기(禁忌)를 깨고, 생모를 왕후로 책봉하겠다고 조정에 선언했다. 말이 떨어지자마자 조정 신하들은 순식간에 술렁였다. 한 원로 신하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폐하, 이는 인륜을 저버리는 행위로, 절대 안 됩니다!"라고 외쳤다. 부레쓰는 얼굴색이 어두워지고 눈빛이 차가워지며 그 신하를 끌어내 무거운 매를 때리라고 명령했다. 때리면서 "짐의 일에 너희가 감히 참견할 일이냐?"라고 욕했다. 그는 사람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그는 어머니의 이름을 '가스가노 이라쓰메(春日娘子)'로 바꾸고 강제로 혼례를 올렸다. 어머니도 권력의 누수(漏水)를 방지하기 위해서 동의했을 찌도 모른다. <일본서기>에는 "천황이 어머니 가스가노 오이라쓰메(春日大娘子)를 왕후로 맞이하고 이름을 가스가노 이라쓰메(春日娘子)로 고쳤다. 조야가 크게 놀랐으나 여러 신하들은 분노해도 감히 말하지 못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가 이렇게 한 이유는 어머니와 자신을 하나로 묶고, 어머니의 영향력을 이용해 권신들을 하나둘씩 배제하고 자신의 권력을 되찾기 위해서였다. 어머니도 야망에 차서 왕후라는 신분을 이용해 아들이 반대파를 제압하는 것을 도왔고, 모자는 손을 잡고 조금씩 조정의 일부를 장악해 나갔다.
이 황당무계(荒唐無稽)하고 금기시(禁忌視)된 근친결혼은 그들만의 권력 거래였으며, 부레쓰는 실제적으로 어머니와 부부관계를 맺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가 사망할 때까지 그들 사이에 자녀가 출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겉으로 드러난 인륜을 저버리는 방식으로 그는 마침내 꼭두각시 신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원래 그는 모노노베노 아라카이(物部麁鹿火)의 딸인 가게히메(影媛)와 결혼을 하려 하였으나, 가게히메는 이미 권신(權臣) 헤구리노 마토리의 아들인 헤구리노 시비(平群鮪)와 내밀한 관계였다. 헤구리노 마토리는 왕이 며느리 감에게 욕심을 내자 서둘러 아들과 결혼시켜 버렸다. 부레쓰는 정치에서나 연애에서 모두 권신에게 참패를 당했다. 부레쓰는 이 소식을 듣고 대단히 격노하여 사람을 보내 헤구리노 마토리를 궁으로 불러들여 탁자를 치며 욕했다. "감히 짐의 뜻을 거역하다니, 목숨이 아까운 게 아니요?" 헤구리노 마토리도 지지 않고 반박했다. "폐하의 행동이 황당무계하고 인륜을 저버리니, 신이 감히 명을 따를 수 없습니다." 힘이 약한 부레쓰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헤구리노 마토리가 조정의 권력을 틀어쥐고 계속 좌지우지하자 이에 대한 불만을 가진 신하도 있었다. 그가 바로 오토모노 가나무라(大伴金村)였다. 부레쓰는 이들의 권력관계를 이용하여 오토모노 가나무라(大伴金村)를 시켜 헤구리노 시비를 나라쿠산(乃楽山)에서 주살하게 하고, 같은 해 11월에는 아버지 마토리도 토벌하였다. 그런 후에 부레쓰는 오토모노 가나무라를 오무라지(大連, 행정 수반)로 삼았다.
<일본서기>에 실려 있는 그의 폭정과 잔학·변태적 행위를 살펴보자. 어머니와 천륜을 어긴 결혼을 한 후 권력을 잡은 부레쓰는 내면의 뒤틀림을 완전히 드러냈다. 그는 타고난 호기심이 매우 강했고, 이제 그 호기심을 잔혹한 행위에 쏟아부었다. 그가 저지른 짓들은 소름 끼칠 정도였다. 한 번은 궁 밖으로 나가 놀다가 임신한 농부 여인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갑자기 태아의 모습이 궁금해져, 시종들에게 농부 여인의 배를 가르라고 명령했다. 농부 여인은 비명을 지르며 죽었고, 태아도 역시 살아남지 못했다. 부레쓰는 곁에 서서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며 "원래 태아는 이런 모습이구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또 한 번은 어떤 농부가 손으로 고구마를 캐는 것을 보고 재미있다고 느껴, 그 농부의 손톱을 뽑아버리고 맨손으로 고구마를 캐게 했다. 피범벅이 된 농부의 손을 보며 그는 배를 잡고 웃었단다. 그는 또한 '인어 게임'을 고안하여 궁녀와 시종들에게 인어로 분장하게 하고 연못에 뛰어들게 한 후, 자신이 작살을 들고 찔렀다. 연못에서 창을 피해 나와 땅으로 올라온 사람은 나무 위로 올라가게 해서 궁수들이 쏘아 죽였다. 그는 또 여자들의 성욕에 대한 반응이 궁금했나 보다. 수많은 궁녀들을 발가벗겨 널빤지에 눕혀서 다리를 벌려 수말들을 데려다가 수간(獸姦)을 시켰다. 그런 다음 여성의 성기를 검사하여 애액(愛液)이 분비된 여인은 죽이고, 그렇지 않은 여인은 귀족들에게 노예로 주었다. 또 그는 전국의 기근(飢饉)을 걱정도 않고, 밤낮으로 궁에서 먹고 마시기에 빠져 있었다고 한다. 궁 안의 사람들은 매일 공포 속에서 살았고, 감히 누구도 반항하지 못했다. 그의 이러한 폭행은 통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변태적인 호기심을 만족시키고,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며, 수년간 억눌렸던 내면의 분노를 무고한 사람들에게 모두 분출한 것이었다.
대신(大臣) 헤구리 일족을 참살하면 모든 권신들에게 위협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의기양양했지만, 자신의 폭행이 다른 권신들을 완전히 분노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은 여전히 깨닫지 못했다. 또한 그것이 자신을 무너뜨리는 마지막 지푸라기가 될 것이라고는 더욱 생각하지 못했다. 이 권신들은 뒤에서 은밀히 결탁하기 시작했고, 부레쓰를 타도할 음모를 꾸몄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자신들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으면 다음에 죽는 것이 자신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것이 부레쓰가 결국 갑자기 젊은 나이에 사망한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506년 어느 날, 부레쓰는 궁 안에서 연회를 즐기며 궁녀 시종들과 술을 마시며 떠들썩하게 놀다가 깊은 밤이 되어서야 침전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시종이 그가 침전의 침대 위에서 갑자기 죽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때 나이는 겨우 18세였다. 그가 죽었을 때 얼굴색은 검었고 입가에는 피 자국이 있었으며, 몸에는 뚜렷한 상처가 없어 독살처럼 보였지만 사인은 수수께끼로 남았다. <일본서기>는 그의 사인에 대해 기록하지 않고 "천황이 침전에서 붕어(崩御했다). 나이 18세, 아들이 없었다."라고 아주 간단하고 애매모호하게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위와 같은 무도한 행동에 관한 기술은 다른 역사서인 <고사기>에는 보이지 않는데, 이에 대해서는 후대 게이타이(繼體) 천황의 정권 교체를 정당화하기 위해 일부러 부레쓰 천황을 폭군으로 묘사했을 것이라는 설이 있다. 그가 자식 없이 죽었기 때문에 오무라지(大連)인 오토모노 가네마로(大伴金村)와 모노노베노 아라카이(物部麁鹿火), 오오미(大臣)인 고세노 오토히토(巨勢男人) 등이 협력하여, 맨 먼저 주아이 천황(仲哀天皇)의 5세 손으로 단바국(丹波國)에 살고 있던 야마토히코 왕(倭彦王)을 발탁했지만, 그는 데리러 온 병사들을 보고 겁에 질려 산속으로 숨어버렸다. 하는 수 없이 그들은 오진(應神) 천황의 5세 손으로 에치젠(越前)에 있던 오호도 왕을 데려다, 부레쓰 천황과 혈연관계가 없는 그를 야마토(大和) 왕권의 오키미(大君)로 추대했다. 오호도 왕도 처음에는 이를 의심하여 부하인 가와치노 우마가이노오비토 아라코(河內馬飼首荒籠)를 시켜, 오무라지(大連)와 오오미(大臣) 등의 본의를 확인하고 나서야 이를 승낙하였으며, 이듬해 58세의 나이로 가와치(河內)국 구스바노 궁(樟葉宮)에서 즉위, 부레쓰 천황의 누나인 다시라카 황녀(手白香 皇女)를 황후로 삼았다. 일본이 주장하는 천황의 만세일계(萬世一系)는 사실이 아니고 다른 핏줄이다.(금삿갓 芸史 琴東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