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임금님도 못 잡은 집값

금동수의 세상 읽기(210113)

by 금삿갓

시장(市場)과 민심(民心)을 못 읽는 정부와 여당이 집권 후 23차례 이상 부동산 정책을 내놨으나 하나같이 제 기능을 못했다. 시중(市中)에서는 부동산 정책이 아니라 세금증세(稅金增稅) 정책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 와중에 여당의 진성준 의원이 대표 발의한 1 가구 1 주택 원칙의 주택기본법안이 또한 세인(世人)의 입방아에 올랐다. 정책의 목적도 불분명하고 목표도 아리송한 뜬금없는 법을 발의했다. 이는 헌법상 사유재산권과 자본주의의 시장경제 원리를 해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국가가 정책으로 부동산 가격(價格)이나 거래(去來)를 규제하겠다는 발상은 공산주의 국가와 전제군주(專制君主) 국가에서나 시도할 정책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그나마도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이 났다. 공산주의는 종주국(宗主國)이 이미 붕괴했고 군주국가인 조선시대를 상고(詳考)해 보아도 알 수 있다.

전 세계적으로 자가(自家) 소유율(所有率)이 90% 이상 가장 높은 국가는 대부분 사회주의 정책을 편 루마니아, 싱가포르, 쿠바, 슬로바키아, 크로아티아, 중국 등이다. 이중 루마니아는 거의 96%, 쿠바도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그 수준이다. 말하자면 거의 1가구 1주택 소유이다. 이들 나라에 주택의 문제가 모두 해결되었을까? 전혀 아니다. 국민들은 이사(移徙)를 가고 싶어도 원하는 때, 원하는 곳으로 갈 수가 없었다. 루마니아나 쿠바는 1대1 맞교환 거래만이 이사 방법이라서 대부분 그냥 체념하고 산다. 싱가포르는 사회주의 정책으로 땅을 국유화하고 집은 주택개발청(Housing & Development Board)에서 공급했다가 다시 환매(還買)하는 정책이다. 특히 카다피(Muammar Al Gaddafi)가 집권(執權)하던 리비아는 주택의 소유 개념이 없고 빈집을 발견하면 아무나 들어가서 살면 자기 집이 되는 정책이었다. 주택의 완전 공개념(公槪念)이다. 성공했을까? 국민이 행복했을까? 전혀 아니다. 식구 전체가 여행이나 외출을 할 수 없었다. 모두 비우는 순간 남의 집이 되므로 한 명은 항시 집을 지켜야 하는 개(犬)의 신세로 불행했다. 부자들만 하인을 고용하여 집을 지키는 정책으로 변질되었다. 공개념이 되면 주인의식(主人意識)이 없기 때문에 집은 급격히 노후화(老朽化)되고 수리는 누구도 하지 않으므로 결국 망하게 된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太祖)는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遷都) 하기 위하여 대소 신료(臣僚)들은 물론 서인(庶人)들에게도 삶의 터전인 땅을 주었다. 태조 4년(1395년) 1월 14일 실록(實錄)에, 1품에게는 35부(負)를 주고 한 품계(品階)에 5부(負)씩을 감(減)하여 지급했는데, 6품 이하는 모두 10부로 같고, 서인은 2부를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양 도성의 초창기에는 토지 공개념(公槪念)이었다. 그 당시 땅의 면적 단위는 결부법(結負法)을 따랐다. 최소 단위가 손안에 잡히는 볏단의 크기인 파(把)이고, 10파가 1속(束), 10속이 1부(負), 100부가 1결(結)이다. 현대 말로 하면 1파는 한 움큼, 1속은 한 묶음, 1부는 한 짐, 1결은 한 우리 정도의 소출(所出)이 나는 땅의 면적으로 보면 되겠다.

또한 집을 짓는 택지인 급조가지(給造家地)의 등급에 대해서는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 규정하여 따르도록 하였다. 대군(大君)과 공주는 30부, 왕자군과 옹주는 25부, 1·2품은 15부, 3·4품은 10부, 5·6품은 8부, 7품 이하는 4부, 서인은 2부였다. 세종 13년(1431년) 1월 12일 실록에는 계급별 가옥의 크기를 선포하였다. 대군은 60칸, 왕의 친형제와 친아들, 공주는 50칸, 2품 이상 40칸, 3품 이하 30칸, 서인 10칸으로 규정하였다. 여기서 칸이라 함은 기둥과 기둥의 사이를 말한다. 이 규정도 잘 지켜지지 않자 세종은 9년 후에 집의 세부적인 규격까지 정했다. 즉 누각(樓閣)의 규모, 익랑(翼廊), 기둥, 도리들의 치수까지 세밀하게 정한 것이다. 이렇게 해도 더 좋은 집, 더 큰 집, 더 좋은 지역의 집을 원하는 사람들의 욕망을 막지 못해 제도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부동산 업계에서는 “조선 중종(中宗) 이후 부동산 가격은 계속 상승했다”와 “한번 4대문 밖을 벗어나면 다시는 못 돌아온다.”라는 농담이 있단다. 이는 조선 건국 초기에 비해 중종 시기에 인구가 거의 두 배로 증가해서 한양 도성(都城)의 집값은 날마다 폭등하였고, 도성을 벗어나면 집값 때문에 4대문 안으로 다시 복귀하기가 힘들다는 표현일 거다. 실제로 다산(茶山) 정약용도 두 아들을 타이르는 가계(家誡)를 통해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나는 지금 이름이 죄인의 명부(名簿)에 적혀 있으므로 너희들에게 우선은 시골집에서 숨어 지내도록 하였다만, 뒷날의 계획은 오직 서울의 십 리 안에서 거처하는 것이다. 만약 가세가 쇠락하여 도성으로 깊이 들어가 살 수 없다면 모름지기 잠시 근교에 머무르며 과수를 심고 채소를 가꾸어 생계를 유지하다가, 재산이 좀 넉넉해지기를 기다려 도성의 중앙으로 들어가더라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吾今名在罪籍。使汝曹姑遯田廬。至於日後之計。唯王城十里之內。可以爰處。若家力衰落。不能深入。須暫止近郊。蒔果種菜。以圖生活。待資賄稍贍。便入市朝之中。未爲晚也。)”

중종실록에 보면 30년(1535), 37년(1542) 두 차례에 걸쳐서 집값의 급등에 대한 걱정을 토로한 기록이 있다. 조선의 조정(朝廷)에서도 부동산에 대한 제도적 장치 이외에 부동산 가격을 잡기 위한 각종 정책을 왕들마다 내놓았다. 태종(太宗)은 1415년 4월 9일에 집터에 대한 세금 즉 가기세(家基稅)를 신설하였는데 요즘으로 치면 재산세에 해당한다. 집값이 계속 오르자 왕족이나 고관대작(高官大爵)들이 서인들의 여염집을 빼앗는 사례가 많았다. 성종 12년(1481) 1월 27일에 죽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정효상(鄭孝常)이 소격서(昭格署) 앞에 집이 두 채나 있고 재상들이 비슷한 짓을 하니까 서민이 어렵다고 질책(叱責)한 바 있다. 그래서 현종 4년(1663) 5월 22일, 11년(1670) 7월 23일의 두 차례, 숙종 8년(1682) 11월 15일, 경종 4년(1724) 5월 27일, 영조 3년(1727) 3월 20일 등 수차례에 걸쳐서 여염집을 탈입(奪入)·차입(借入)·세입(貰入)의 방법으로 빼앗는 것을 법으로 금했으나 잘 지켜지지 않았다. 현종 11년(1670) 7월 26일에 정언(正言) 홍만종(洪萬鍾)이 이 법에 걸려 파면되기도 했다. 영조 30년(1754) 6월 27일에는 여염집을 빼앗아 들어가는 금령(禁令)을 어긴 자 20여 명을 정배(定配)하고, 한성판윤(漢城判尹) 어유룡(魚有龍)의 관직을 파면하기도 했다.

현 정부 고위관료의 2주택 소유 문제가 그 당시에도 있었다. 힘 있는 자들이 겸병(兼倂)이나 탈점(奪占)으로 부당하게 토지를 획득하고 여염집을 매입이나 탈입(奪入) 등으로 2주택 이상 취득하는 사례가 잦자 특단의 정책도 내놨다. 영조 30년(1754) 7월 16일에 도성 안의 집의 매매를 금하고 여염집을 사들인 자는 1년 안에 되팔게 했다. 이를 어기면 관리는 2년간 금고(禁錮) 즉 벼슬을 못하고, 과거를 준비하는 유생(儒生)은 6년간 과거 응시자격을 박탈하는 법을 시행했다. 지금의 1가구 1주택법보다 더 강력한 법이지만 주거이전과 부의 창출 욕구를 막을 수는 없었다. 좋은 집과 재산증식의 욕구는 왕의 친족들도 마찬가지였다. 현 정부의 청와대 비서진이나 여당의 고위직과 흡사했다. 그래서 급기야 영조 37년(1761) 5월 2일에는 호조판서(戶曹判書)에 명하여 왕족의 집값은 900냥으로 공시가격을 정하기도 했다. 마치 요즘의 분양가상한제(分讓價上限制)를 실시한 것이다.

집값이 오르자 너도 나도 집을 사고, 더 크게 짓거나 요즘의 리모델링(Remodeling), 재건축 등이 빈번했다. 사대부(士大夫)나 서인이 집의 구조와 크기, 위치 등에 따른 매매 가격의 파악이 점차 힘들어지자 요즘의 중개사격인 가회(家儈) 즉 집주름을 전문으로 하는 직업도 등장했다. 시전(市廛)의 거래에는 권리금이 붙어서 가격이 상승하고, 요즘의 강남격인 북촌이나 중부 8방(坊) 지역의 집값은 프리미엄이 매우 높았다. 왕족이나 고관이 집을 넓히기 위해 힘으로 여염집을 빼앗지 못하니까 집값보다 더 많은 값을 쳐주었기 때문이다. 세조 10년(1464) 6월 15일에 신숙주(申叔舟)의 의견에 따라 원각사(圓覺寺) 신축 부지용 시전(市廛)의 값을 3배를 권리금(權利金)으로 더 쳐 주었다. 사대부일지라도 지방관(地方官)으로 발령이 나면 집을 팔지 않고 혼자 부임하는 주말부부 또는 기러기 아빠 신세를 자처했다. 팔고 갔다간 다시 돌아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집값이 계속적으로 올라 사대부 자제들도 집값 감당이 안 되자 요즘의 주택담보대출처럼 그 당시에도 차입금을 활용했다.

한양의 집값 앙등(昂騰)에 따른 집 구하기(신축·구매·증축·전세 등)가 어려워지자 백성들은 자발적으로 고지대 즉 달동네로 점차 뻗어나갔다. 이것이 또한 난개발(亂開發)과 경관(景觀) 등의 문제를 발생시켰다. 그러자 연산군 6년(1500) 3월 5일에 성균관 북쪽 고개에 있는 민가가 왕궁과 문묘(文廟)를 내려다본다고 모두 철거하도록 하였다. 그 당시 조정도 신도시 정책을 세워서 주택지를 공급했다. 그래서 나온 대책이 성저십리(城底十里)를 한성부에 편입시켜 백성들을 이주토록 하였다. 한양 도성 밖에서 십리 즉 4km까지의 마포구, 서대문구, 용산구, 성동구, 성북구, 은평구 등이 포함된다. 처음에는 이주를 꺼렸으나 차츰 이 정책이 그나마 실효성이 있는 공급 정책이었다. 우리 정책 당국자가 본받아야 할 대목이다.

집값이나 땅값을 잡는 것이 최고, 최대의 정책 목표라면서 부동산 거래의 목줄만 틀어쥐는 현 정부의 당국자들은 미국의 역사상 가장 수지맞고 길이 빛날 부동산 거래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맨해튼은 1626년 네덜란드 초대 총독 페테르 미누이트(Peter Minuit)가 조개 염주, 담요(도합 24달러 추산)와 교환하여 확보했다. 그 후 1803년에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대통령이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Louisiana) 포함한 미국의 중서부를 관통하는 광대한 지역을 1,500만 달러에 구매하여 미국의 영토를 두 배로 늘렸다. 또 링컨 대통령 당시인 1867년엔 윌리엄 스워드(William H. Seward) 국무장관이 알래스카를 러시아로부터 720만 달러에 구입하여 냉전시대에 소련(蘇聯)을 힘들게 했다. 이 모든 게 부동산의 자유로운 거래로 이루어진 역사이다. 자본주의와 근대 시민법(市民法)의 근본인 수요공급(需要供給)의 법칙과 계약자유(契約自由)의 원칙을 억누르는 어떠한 정책도 성공할 수 없다. 인간의 욕망(欲望)은 마르지 않는 샘과 같기 때문이다. 더구나 정부의 정책만 믿고 있다가 집값만 다락같이 올라 열패감(劣敗感)을 느끼는 서민들의 처지를 어떻게 보상할까? 공자가 말했듯이 무신불립(無信不立) 즉 믿음이 없는 정부는 무너지게 마련인데 국민의 신뢰를 어떻게 찾을까? (금삿갓 芸史 琴東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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