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공수처와 의금부

금동수의 세상 읽기(210105)

by 금삿갓

정부 여당이 추진하는 검찰개혁(檢察改革)과 공수처 설치, 검경 수사권 조정 등이 코로나로 한껏 침체한 온 나라를 시끌벅적하게 한다. 검찰은 왜 개혁되어야 하며 공수처는 꼭 필요한 기관인가에 대한 대국민 설득이나 설명은 공염불(空念佛)이 된 지 오래다. 의석수로 밀어붙이는 여당과 힘겹게 끌려가는 야당의 모습이 이전투구(泥田鬪狗)를 방불(彷佛)하게 한다.

우리의 선조들도 검찰, 공수처와 유사한 기관을 운용했다. 검찰의 유사 기능은 사헌부(司憲府), 공수처의 유사 기능은 의금부(義禁府)이다. 사헌부는 중국의 어사대부(御史大夫)·어사대(御史臺)에서 유래했다. 통일신라시대에 사정부(司正府), 고려 초기에는 사헌대(司憲臺), 그 후에는 어사대(御史臺)·금오대(金吾臺)·감찰사(監察司) 등으로 여러 번 바뀌다가 1369년 공민왕(恭愍王)부터 사헌부(司憲府)로 하여 조선시대로 이어졌다.

이러한 사헌부는 헌부(憲府)·백부(柏府)·상대(霜臺)·오대(烏臺)·대각(臺閣)이라고도 하며, 형조(刑曹), 한성부(漢城府)와 함께 3대 사법기관이었다. 사헌부는 풍속의 규찰, 관리들의 감찰·탄핵·인사검증 및 동의 등 막강한 업무를 수행하여 오늘날의 검찰과 감사원, 민정수석의 업무까지 일부 수행했지만 오늘날처럼 수사권을 독점(獨占) 하지는 못했다. 형조는 추조(秋曹)라고도 하며, 형조와 사헌부의 관리를 동시에 부를 때 추상(秋霜)이라고 했다. 가을의 된서리인 추상(秋霜) 같았을 것이다.

이긍익(李肯翊)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표현된 사헌부를 보면 그 실상을 알만하다. “어사다운 어사는 임금에게 허물이 있으면 임금의 노여움을 거스르고 임금의 위엄에 항거하며 무서운 형벌도 사양하지 않는다. 또 장상(將相)이나 대신(大臣)이 허물이 있으면 법으로 규탄하고, 종친(宗親) 외척(外戚) 중에 교만하고 사나운 자가 있으면 탄핵하고 공격한다. 소인(小人)이 조정에 있으면 반드시 내보내려고 하고, 탐관(貪官)이 벼슬에 있으면 기어이 쫓으려고 한다. 곧은 자를 천거(薦擧)하고 굽은 자를 버리며, 흐린 것을 배격하고 맑은 것을 찬양한다. 정색하고 조정에 서면 백료(百僚)가 떨고 두려워한다.”

의금부(義禁府)는 고려의 순군만호부(巡軍萬戶府) 제도를 따르다가 태종 때에 의금부(義禁府)로 정착되었다. 의금부는 조옥(詔獄)·금부(禁府)·왕부(王府)·금오(金吾)라고도 했다. 의금부는 <경국대전>에서 봉교추국지사(奉敎推鞫之事) 즉 임금의 지시에 따라 범죄의 성립 여부를 추국(推鞫)하는 기관이었다. 말하자면 왕의 직속 특별사법기관이다. 왕권 보호와 왕조에 대한 비판 차단 등이 목적이고 일반 백성의 범죄가 아닌 종친(宗親) 외척(外戚) 및 관리(官吏)들의 범죄만 취급했다. 또한 다른 사법기관 사건을 이관(移管) 받거나 사건의 재심, 시정(是正) 등 삼심기관(三審機關)의 기능을 했다. 공직자의 범죄만 수사하는 공수처가 대상자의 기준으로 볼 때 의금부와 비슷하다.

우리 선조들은 범죄의 수사(搜査) 및 기소권(起訴權)을 어느 한 기관에 독점적으로 부여하지 않고 여러 기관에 분산(分散)시킨 제도를 운영했다. 이러한 제도는 견제(牽制)와 균형이 적절하게 이루어지면 최고의 효율을 낼 수 있다. 하지만 기관 간의 경쟁이나 엉뚱한 목적으로 활용될 경우 심한 부작용도 발생한다. 태종(太宗)은 왕자의 난으로 정권을 잡았으나 왕권이 튼튼하지 못했다. 그래서 직속 기관인 순군만호부를 순위부(巡衛府), 의용순금사(義勇巡禁司) 등으로 바꾸다가 의금부로 강화 확정하여 자기의 정치적 목적 달성에 잘 활용하였다.

태종은 세종의 외척이 될 민씨(閔氏) 일가의 형제들 즉 자기의 처남 4명을 모조리 죽게 하였다. 위로 민무구(閔無咎)·민무질(閔無疾) 형제는 본인의 양위(讓位) 파동 때에 역모로 몰아 죽이고, 아래로 민무휼(閔無恤)·민무회(閔無悔)는 효빈 김 씨의 출산 시 박해 문제를 씌워 죽였다. 이러한 죄목을 얽어내는데 협조하지 않는 사헌부(司憲府)를 의금부(義禁府)로 하여금 일거에 잡아들여 논죄하기도 했다. 바로 공수처를 이용하여 검찰 수뇌부를 일거에 잡아들인 것이다. 태종 15년 1415년 5월 4일에 사헌부의 수뇌부인 대사헌(大司憲) 이은(李垠), 집의(執義) 이유희(李有喜), 장령(掌令) 강종덕(姜宗德)·정지당(鄭之唐), 지평(持平) 김익렴(金益廉)·금유(琴柔)를 대역죄로 의금부에 하옥시켰다. 말하자면 검찰총장, 차장, 중앙지검장 등 검찰 수뇌부를 모두 하옥시킨 것이다. 필자의 집안 선조인 지평(持平) 금유(琴柔)는 당시 병가(病暇) 중에 영문도 모르고 같이 잡혀간 것이다. 이유는 민무회가 노비 소송 사건과 관련하여 왕실을 비난한 의혹이 있는데도 사헌부가 논죄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왕권 강화를 위해 처남을 칠 명분을 찾는데 협조하지 않은 것은 곧바로 대역죄(大逆罪)이라는 법 논리이다.

의금부를 활용한 사헌부 길들이기는 성군(聖君)이라는 세종(世宗)도 마찬가지였다. 세종실록 세종 10년 1428년 1월 12일 기록이다. 방탕아 양녕대군(讓寧大君)이 선친(先親) 태종의 도성(都城) 추방령을 어기고 입성해서 좌명공신(佐命功臣) 윤자당(尹子當)의 첩 좌군비(左軍婢) 윤이(閏伊)와 사통(私通)하다가 발각되었다. 간통은 대명률(大明律)에 따라 처벌 대상이지만 양녕대군은 처벌하지 않고, 윤이(閏伊)와 그의 어미 기매(其每)만을 의금부에 하옥해 국문(鞫問)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양녕대군이 세종에게 편지를 써서 윤이(閏伊)를 풀어주지 않으면 세종과 영원이 이별하겠다고 통보했다. 말하자면 의절(義絶) 협박이다. 이 사실을 가지고 사헌부와 사간원이 양녕대군을 처벌해야 한다고 상소했다. 현재로 따지면 대통령의 형님을 치죄(治罪)하는 것으로 살아있는 권력에 칼을 대는 것이다.

양녕대군의 처벌 문제에 대한 사헌부와 사간원(司諫院)의 주청(奏請)이 1월 12일부터 2월 7일까지 하루에도 한두 번씩 계속 줄기차기 이어졌다. 심지어 1월 18일에는 대간(臺諫)들이 줄 사표를 내면서 상소했다. 성질이 고약한 병조참의(兵曹參議) 고약해(高若海)는 성난 목소리로 고하기도 했다. 세종도 끈질기고, 신하들도 끈질겼다. 2월 7일에 급기야 화가 난 세종이 대사헌 김맹성(金孟誠), 집의 김종서(金宗瑞)를 좌천시키고, 장령들은 파면시켰다. 사헌부 관리 즉 검찰청 간부들을 전면 물갈이한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2월 30일에는 공수처격인 의금부를 통해서 9년 전 사건을 들추어내 엮어서 김맹성은 파면, 김종서는 속장(贖杖) 80에 처했다. 그래도 새로 임명된 대사헌 최부(崔府)와 대간(臺諫)들은 4월 5일까지 굴하지 않고 양녕대군의 죄 묻기를 청했다. 그야말로 목숨을 내놓고 살아있는 절대 권력에 대들듯이 간언(諫言)을 한 것이다.

연산군(燕山君)은 한 술 더 떴다. 연산군 10년 1504년 3월 12일 대사헌 이자건(李自健), 대사간(大司諫) 박의영(朴義榮)을 포함하여 양사(兩司)의 간부들을 모조리 의금부로 하여금 하옥시켰다. 검찰과 언론사 간부를 모조리 친 것이다. 죄목은 애첩 장녹수(張綠水 : 당시 淑容)가 불법으로 이웃집을 빼앗은 걸 사헌부가 적발하자 임금이 사적계약(私的契約)에 간섭하여 위를 능멸(凌蔑)한다고 했다. 그리고 사헌부의 하급 관리직도 없애서 지금으로 치면 검찰의 수사권을 뺏어서 여당이 발의한 국가수사청(國家搜査廳)을 만드는 꼴이 됐다. 그 이외에도 수차례에 걸쳐 대간(臺諫)들을 의금부로 하여금 옥에 가두어 죄를 묻곤 했다.

지금 정부 여당이 검찰개혁·공수처 설치 등을 시행하면서 외치는 것이 한결같이 ‘검찰이 정치를 하고 선출된 권력을 길들이려 한다.’고 주장한다. 그때도 사헌부와 사간원을 혁파하면서, 연산군은 대제학(大提學) 김감(金勘)에게 명하여 혁파문(革罷文)을 짓게 하였다. “이 버릇을 길러 마지않으면 임금을 손 위에 놓고 정사(政事)가 대각(臺閣)에 돌아가게 되리라.(長此不已, 將至於置君掌上, 政歸臺閣。) 그때나 지금이나 역사는 돌고 도나 보다.(금삿갓 芸史 琴東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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