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創業) 보다 수성(守成)이 어렵다는 말이 있다. 당연히 창업도 어렵고, 성공한 창업을 계속 지키기도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너무 쉽게 창업을 하면 너무 쉽게 망할 수 있다. 기업도 이럴 진데 나라나 천하를 경영하는 것은 더 말해 무얼 하랴. 중국 역사에 창업을 누워서 식은 죽 먹기처럼 해치운 사나이가 있었으니 그 누구인가? 바로 선진(西晉)의 세조(世祖) 사마염(司馬炎)이다. 그는 완전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서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진(晉) 나라에서 당시 허수아비 상태인 위(魏) 나라 황제 조환(曹奐)을 겁박하여 황위(皇位)를 물려받은 것이다. 국호를 진(晉)으로 했으나, 이 나라가 망한 후에 사마씨의 유족인 사마예(司馬睿)가 건업(建鄴)에 건설한 동진(東晉)과 구별하기 위하여, 흔히 사마염이 건설한 진(晉)을 서진(西晉)이라 부른다. 이 친구의 족보는 이렇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의 오장원(五丈原) 전투에서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쫓아 보냈다는 말이 있는데, 이 중달(仲達)이 바로 사마의(司馬懿)이고, 중달은 그의 자(字)이다. 그는 위나라의 군사전략가로 조조(曹操), 조비(曹丕), 조예(曹叡), 조방(曹芳) 등 4대에 걸쳐 보필하며 공을 세워 무양후(舞陽候)에 봉해졌다. 사마염은 바로 그의 손자이다. 사마의가 조예가 죽고, 조씨(曺氏)와 갈등이 깊어지자 정변을 일으켜 위나라의 권력을 틀어쥐고 조씨(曹氏)들은 허수아비 황제에 지나지 않았다. 그의 아들 사마사(司馬師)와 사마소(司馬昭)는 권력을 승계하여, 형 사마사가 황제 조방을 폐위시켰다. 그 후 형이 죽자 사마소가 모든 권력을 잡고 황제 조모(曹髦)를 폐위시키고, 조환을 황제로 옹립한 후에, 스스로 진왕(晉王)으로 봉하여 왕 노릇을 한 것이다. 이런 금수저 족보 덕에 사마염의 진나라 창업이 누워서 떡 먹기였다. 그러니 수성을 못하고 쉽게 망하는 단초를 그가 제공한 것이다. 그 단초가 되는 중요한 등장인물이 바로 이 글의 주인공인 고아 출신 황후인 양염(楊艶)이다. 양염의 이야기를 하기 전에 사마염의 패악(悖惡) 질을 한번 들여다보자. 이 친구는 요즘 재벌 2세나 졸부들, 잘 나가는 연예인들의 마약 복용, 유흥가 섭렵, 갑질하기 등등 패악질을 1,700년 전에 멋들어지게 해냈다. 당시 호구조사 기록에 따르면 서진의 인구가 1,600만 명 정도로 추정되는데, 그중에서 예쁜 처녀를 무려 만 명이나 잡아와서 후궁으로 삼았다. 삼천 궁녀도 많은데, 만 명이니까 매일 밤 잠자리를 같이할 여자를 선택하는 것도 보통일이 아니다. 사진으로 찍어도 며칠을 찍어야 할 텐데, 화공(畫工)이 만 명의 얼굴을 그리는 데는 시간이 너무 걸린다. 그래서 후궁을 고르는 수고를 환관에게 맡기기도 어렵고 해서 아예 동물에게 맡겼다. 황제가 탄 수례를 끄는 양들의 발길이 멈추는 곳의 후궁과 뜨거운 밤을 보내는 것이다. 그래서 황제의 승은을 입기를 고대하는 후궁들은 자기 방 앞에 양이 좋아하는 풀들을 비치하가나 소금물을 준비하는 등 미인들이 양들에게 아부를 떨어야 할 지경이었단다. 사치하는 버릇은 즉위 초반에 누군가 받치는 꿩의 깃털로 만든 화려한 옷인 치두구(雉頭裘)를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태워버려서 없어진 줄 알았는데 그 병이 도져서 나중에는 치두구를 여섯 벌이나 갖고 있을 정도였다. 그가 지방관을 임명할 때 후보 중에 사치벽이 심한 당빈과 술을 좋아하는 양종이라는 사람이었는데, 사마염은 “사치가 심하면 좋지만 술병은 평생 못 고친다.”라며 당빈을 임명했단다.
오늘의 주인공 양염(楊艶)은 자(字)가 경지(瓊之)이고, 위나라의 통사랑(通仕郎)인 양병(楊炳)의 딸이다. 양병의 자(字)는 문종(文宗)이고, 홍농군 회음현 사람이다. 집안은 괜찮은 편이었는데, 부모가 일찍 사망하여 외숙부인 조준(趙俊) 집에서 자랐다. 양염의 외숙모는 선량하여 양염에게 젖을 충분히 먹이기 위해 아직 젖을 끊지 않은 자기가 낳은 아들을 다른 사람의 젖을 먹이도록 하고, 전심을 다해 양염을 돌봤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예쁘고 총명하여 각종 고전을 숙독했으며, 서예에 정통하고 바느질 등 여자의 일에도 숙련하였다. 관상을 잘 보는 사람이 일찍이 그녀의 상을 보고 마땅히 지극히 존귀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혼담이 밀려들어 왔는데, 진(晉) 왕 사마소가 이 말을 듣고 그녀를 아들 사마염과 결혼시켜서 일약 고아 출신이 세자비가 된 것이다. 시아버지 사마소가 죽고 남편인 사마염이 다음 진나라 왕이 되자 그녀는 왕비가 되었으며, 이후 사마염이 위나라의 황제 조환의 선위를 받아 진나라를 새우고 무제로 즉위하자 그녀는 황후가 되었다. 세자비에서 왕비로, 다시 황후로 초고속으로 신분 상승이 일어나자 어릴 때 관상쟁의의 적중된 것이다.
신혼 초에 그녀는 사마염에게 아주 총애를 받아서 아들 사마궤(司馬軌), 사마충(司馬衷), 사마간(司馬柬), 평양공주(平陽公主), 신풍공주(新豐公主), 양평공주(陽平公主)를 낳았다. 맏아들 사마궤(司馬軌)는 세 살을 넘기지 못하고 요절했다. 둘째 아들 사마충(司馬衷)은 건강한데, 아홉 살이 되도록 글을 깨우치지 못해 황실에 걱정이 태산이다. 그녀는 자기를 길러 준 외삼촌의 은혜를 갚기 위하여 조준(趙俊)을 고관에 임명되도록 하고, 조준의 형 조우(趙虞)의 딸 조찬(趙粲)으로 하여금 후궁에 들어와 부인(夫人)이 되게 해 주었다. 남편이 사마염의 바람기가 하늘을 찌르고, 불러들인 후궁과 비빈들의 숫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아지자 질투로 가슴앓이도 이젠 지쳐서 가슴의 병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중에서 제일 걱정되는 것이 자기 소생의 어리벙한 아들이지만 자기가 생존해 있을 때 태자로 옹립해 두어야 후사가 보장된다는 생각이다. 눈을 시퍼렇게 뜨고 각자 자기의 소생으로 태자를 삼겠다는 후궁들의 암투에서 총명하지 못한 아들 사마충이 제거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황후인 양염은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안달이다. 더욱이 여러 총희들이 낳은 영민한 왕자들이 눈을 번뜩이면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는 상황에서 충의 태자 책봉은 황후로서 무엇보다 급한 일이다. 그녀 나이도 삼십 줄을 바라보니 이젠 풋풋하고 나긋나긋한 맛은 없어지고, 억센 아주머니로 변해 갔다. 아주머니의 힘과 치맛바람의 전략을 세운 것이다.
어느 봄날이 그녀가 황궁에 입궐 한 기념일이다. 며칠 전부터 황후는 황제 맞을 준비에 바빴으나, 황제는 맨날 어느 계집의 방에서 지내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옛날 황제가 세자로 있을 때 비(妃)로 들어와 이 날 첫날밤을 보내며 살을 섞은 날이다. 당시 힘이 장사인 세자를 밤새껏 상대하느라 녹초가 되어 며칠을 몸져누워 앓은 기억이 차라리 아름다운 추억이다. 그런데 세월은 10여 년이 훌쩍 흘러가고, 이제 황제는 딴 여인들 치마폭에 빠져있다. ‘오늘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태자 책봉 약조를 꼭 받아 내야 하는데...’ 황후는 사마염이 특히 좋아하는 사슴탕과 자라 찜, 그리고 제비집 볶음을 해놓고 황제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그녀는 미모만 빼어난 것이 아니다. 가무(歌舞)에 시(詩)까지 탁월해 여류명사를 뺨칠 정도이다. 그러나 지금은 구중궁궐에서 한 사내만 바라보는 처지이다. 더욱이 약간 모자라는 자식의 장래에 태산 같은 걱정을 하고 있는 가련한 여인이고 어머니이다. 양염은 세자인 사마염을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을 재현했다. 이십 대 후반의 여인이 십 대 후반의 야들야들하고 풋풋한 처녀의 신분으로 돌아가 잠자리 기술을 총동원하여 태자 책봉을 매듭지으려는 속셈이다. 요즘으로 치면 코스프레 스타일로 사마염의 마음을 돌려보려는 것이다. 통기를 넣은 후 저녁도 굶은 채 황제를 기다렸으나 해시(亥時)를 지나 자시(子時)가 거의 다 되어 술이 거나한 황제가 왔다. 양염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으나 어쩔 수 없이 참으면서 황제의 이부자리 노리갯감이 되어 줄 마음이다.
양염이 코맹맹이 소리를 한다. “폐하 오늘이 무슨 날인줄이나 아세요?” 술에 취해 알딸딸한 기분으로 쾌락을 추구하던 황제는 들은 척도 않고 욕망의 방아질을 멈추고 여자의 옥문에서 몸을 뺀다. “폐하 오늘이 무슨 날인가 소첩이 여쭈었잖아요?” 황후의 약간 짜증스러운 말투다. 그러나 그녀의 손은 아쉬운 듯 사내의 여의봉을 쥐고 조몰락거리고 있다. 황제를 어떻게든 다시 극락의 운우지정을 느끼도록 해줘야 요구 조건을 말할 수 있다. 아무래도 낮부터 대전(大殿)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았다. “폐하 대전에서 무슨 언짢은 일이라도 있었사옵니까?” 고사리 같은 여자의 손이 황제의 사타구니를 거쳐 엉덩이 마사지하듯 간질이다가 다시 가슴으로 올라갔다. 황제의 가슴엔 털이 유난히 무성하다. 여자의 향내 나는 뜨거운 입김이 사내 가슴털에 가는 바람을 일으키며 황제의 코에 닿자 장미향이 진하게 난다. 여자 몸에서 풍겨 나오는 사향내와 리드미컬한 그녀의 마사지에 번데기 같던 여의봉이 어느새 절구공이로 변하여 고개를 빡빡하게 쳐들고 여인의 달콤한 연못으로 미끄러지듯 깊이 잠수한다. “역시 여자는 황후가 최고요!” 알쏭달쏭한 말에 황후는 사내의 만족을 채워주고 본인도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옆으로 누웠다. “아무래도 충의 태자 책봉 문제는 시간을 두고 생각해 봐야겠소. 대신들의 반대가 워낙 거세서!” “흥! 지들이 뭐 길래 황실 문제에 가타부타합니까? 소첩은 대신들의 뜻보다 폐하의 의중을 알고 싶은 거예요!” “글쎄 말이요. 짐도 황후 마음을 알지만, 충이가 아홉 살이나 됐는데도 글을 깨우치지 못했으니 대신들도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것이지요. 나중에 임금이 되어도 자칫 환관들에게 농락당할 수도 있다는 거요. 짐도 그것이 걱정이 돼서 세게 밀어붙일 수가 없단 말이요!” 사실 이 대목이 가장 양염의 걱정거리이다. 글도 아직 깨우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말까지 어눌해 진나라를 통치할 황제감으론 동생인 간(柬)이 제격이다. 그러나 그녀의 생각은 장남으로 왕통이 이어져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인 것이다. “폐하 오늘이 무슨 날인지 말씀 아니하셨조?” 이번엔 황후의 왼손이 오뉴월 골프장 그린 잔디처럼 부드러운 가슴의 털을 쓰다듬으면서 왼쪽 다리로 사내의 사타구니 여의봉을 지그시 누르고 있다. 황제는 황후가 두 번씩이나 무슨 날이냐고 묻는 것에 신경이 쓰였는지 한참을 생각하다 중얼거린다. “오늘이 5월 15일인데… 아! 황후가 처음 입궁한 날이구나?”라며 감회가 새로운 듯 황후를 다시 힘껏 쓸어안았다. “폐하께서 용케도 소첩이 폐하의 여자가 된 날을 잊지 않고 기억해 주셔서 고맙네요. 그런데 그날을 기념해서 소첩에게 선물 하나 주시지 않으시겠어요? 소첩은 폐하께 올릴 선물을 준비했는데요.” “선물이라는 것이 뭣이요?” 선물이 궁금한 듯 품었던 여인을 품에서 떼어내며 촛불에 드러난 요염한 모습의 표정을 읽었다. “어허, 지금 모습은 황후가 입궁할 때 그 모습이 아니요?” “이제야 알아보셨군요. 소첩은 오늘을 잊지 않으려고 며칠 전부터 준비를 했는데, 폐하는 술에 취해 옛 모습을 알아보시지 못하셨죠?” “미안하오. 내 다음 어전회의에선 충의 태자 책봉 문제를 꼭 매듭지으리다.” 황제는 더 졸리기 싫은지 황후에게 후딱 키스를 한 뒤에 두말없이 황후궁에서 빠져나갔다. 약간 미진했지만 황후도 어쩔 수 없어서 속으로 중얼거린다. “좋다. 그렇게 되도록 나도 눈물을 머금고 너에게 절세미인을 안겨 주리라!”라며 속으로 다짐했다.
그래서 자기를 키워준 외삼촌 조준(趙俊)의 조카이자 양염의 외사촌 동생인 조찬(趙粲)을 궁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몰래 황제의 수청을 들도록 조치를 한 것이다. 여느 때처럼 취한 황제가 황후의 처소로 드니, 황후는 보이지 않고 예쁜 젊은 여인이 다소곳이 있는지라 이게 웬 떡인가 하고 주어서 먹은 것이다. “폐하 몸이 어떠하시옵니까?” 황제가 젊은 여인의 배 위에서 내려와 막 옷을 주섬주섬 입는데, 병풍 뒤에서 양 황후가 눈을 곱게 흘기며 코맹맹이 소리로 말했다. 황제는 들킨 게 계면쩍기도 하고, 마누라의 간교한 농간에 놀아난 것 같아 영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어서 “어허, 황후의 작전에 걸렸구먼?”라고 침상에 다시 벌렁 눕는다. “폐하! 소첩의 외사촌 조찬(趙璨)을 이제 어찌하시렵니까?” “어찌하다니 황후가 짐을 위해 이렇듯 예쁜 미인을 배려해 주었으니 최상의 예우를 해주어야지” 조찬은 이튿날 부인(夫人) 칭호를 받았다. 이제 겨우 십팔 세인 조찬에게서는 풋풋한 햇과일처럼 산뜻한 맛을 느끼고, 이십 대 후반의 황후는 농익은 수박 같은 정염이 샘솟았다. 사내란 열 여자가 싫을 수 없는 것이다.
매일 양염은 본인의 미색과 건강이 가시기 전에 충을 기어코 태자의 자리에 올려놓고, 양씨와 조씨 집안도 반석 위에 올려놔야겠다는 마음을 다짐하고 다짐했다. 한편 황제의 황음(荒淫)과 엽색행각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황제의 황음을 교묘히 이용해 사복(私腹)을 채우려는 황후는 사마염의 여색을 막기는커녕 부추긴다. 외사촌 동생까지 재물로 바쳤으나 황제는 충을 시원스럽게 태자에 책봉하겠다는 약조를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황후는 조바심이 났다. 황제가 양가의 규수들을 널리 선발하여 후궁으로 채우려고 조서를 내려 백성들의 혼사를 금지하고 수레를 탄 환관을 보내 마부로 하여금 각 주군을 빠르게 돌아보고 선택된 사람들을 황후로 하여금 뽑게 하였다. 그녀는 질투하여서 얼굴이 하얗고 키가 큰 여자만을 뽑고 단아하고 수려한 아가씨는 전부 뽑히지 않았다. 그러면서 계속 황제를 채근했다. 충이 여러 왕자 중에 모자라는 것은 사실이나 제 몸을 아끼지 않는 충신이 보필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설득했다. 하지만 황제는 좀처럼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아서 황후가 마음을 졸였다. 그래도 황후의 공작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오늘은 황제가 등극한 지 9년째 되는 날이다. 황제의 령(令)으로 기념식은 생략하고 황궁의 식구들만 조촐한 식사를 하기로 했다. 대신들이 입궐을 하지 않으니 평소 보다 조용하여 긴한 이야기를 하기에 좋다. 황궁의 식구가 다 모이는 자리이니 황제의 여자들은 모두 모였다. 황후를 비롯한 첩들인 3부인(三夫人)인 귀빈(貴嬪)·부인(夫人)·귀인(貴人), 9빈(九嬪)인 숙비(淑妃)·숙원(淑媛)·숙의(淑儀)·수화(修華)·수용(修容)·수의(修儀)·첩여(婕妤)·용화(傛華)·충화(充華), 기타에 속하는 미인(美人)·재인(才人)·양인(良人)·장사(長使)·팔자(八子)·칠자(七子) 등 다양한 신분의 여자들이다. 이들은 모두 아름다움이 시들기 전에 황제의 승은을 애타게 기다리는 학의 모가지 신세이다. 수십 명의 인간 꽃들이 저마다 개성 있는 아름다운 웃음을 보이며 황제의 기쁨을 높이기에 안간힘을 쓰고 있으나 양염과 조찬은 그중 군계일학이다. 황제는 갖가지 꽃들이 방실 방실 웃으며 총애를 받으려 애를 쓰고 있으나 오늘따라 술도 삼가며 체면을 차리는 듯하더니 해가 추녀에 걸리자 곧바로 조찬의 처소로 직행했다. “폐하 연락도 없이 갑자기 납시다니요?” “짐이 네 처소에 오는 게 싫은 게냐?” “그것이 아니옵고 폐하를 모실 준비가 필요하잖아요!” “허허 준비 같은 거 필요 없다. 어서 너나 이리 오너라!” 술 향이 풍기는 입으로 앵두 같은 조찬의 입을 덮친다. “소첩 숨이 차옵니다.” “허허 가만히 있으라 했지 않았느냐?” 사내 손은 어느새 계집의 가슴팍을 더듬다 말고 사타구니로 내려가고 있다. 사실 조찬은 황후의 귀띔으로 일찍 감치 연회석에서 빠져나와 황제 맞을 준비를 한 상태다. 황제의 손길이 조찬의 몸에 닿을 때마다 연한 장미향이 피어났다. 황제는 적당히 오른 술기운에 조찬의 향이 더해지자 아무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운우지정을 만끽했다. 함께 홍콩을 다녀온 황제는 품 안에 쏙 들어오는 조찬을 두 팔과 두 다리로 죽부인(竹夫人)을 안 듯 품었다.
“폐하 소첩이 그리도 좋사옵니까?” “좋으니 이렇게 품고 있지 않느냐?” 황제 여의봉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일어나 여인의 배꼽 아래를 압박하고 있었다. 사내는 꽃들이 뭉개지도록 노닐다 내려와서도 성에 안 찼는지 다시 올라 가려 하자 “폐하 잠깐만요! 뒷물 좀 끼얹고 오겠어요.”라며 조찬은 활짝 핀 백합보다 더 새하얗고 장미보다 더 요염한 몸매를 드러낸 채 엉덩이를 흔들며 욕실로 간다. “그년 참 귀엽고 예쁘단 말이야.” 조찬은 등 뒤로 황제의 혼잣말을 들었다. 뒷물을 하고 온 조찬은 연못에서 갓 피어오른 연꽃처럼 귀티마저 흐른다. 가슴과 등엔 아직 물기가 남아 있는데 조찬은 황제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그 모양새가 해 떨어져 어미 품을 찾는 들새 같았다. “나를 어찌 생각하느냐?” “소첩은 폐하만 계시면 안 먹어도 배가 부르고 운우지정을 안 해도 행복하옵니다.” 황제는 손으로 조찬의 엉덩이를 사랑 스러이 주무른다. 조찬은 능숙하게 황제의 여의봉을 늠름하게 키워 자신의 요새에 입실시킨다. “폐하 소첩을 버리시면 아니 되옵니다.” 황제가 달콤한 구중궁궐 깊숙이 들어가 이방 저 방 드나드는데 조찬의 뜬금없는 말이다. “그게 무슨 소리냐?” “그냥 해본 소리입니다. 지금처럼 죽을 때까지 폐하의 사랑을 받고 싶다는 투정이옵니다.” 조찬은 말을 하면서도 능숙하게 황제를 쾌락의 극치로 몰고 갔다. 조찬이 구척 장신의 육중한 체구에 눌려 힘에 부치는지 촛불에 비친 얼굴은 갓 핀 복사꽃 빛깔로 상기되었다. 기분도 좋은지 두 눈은 감은 채 두 콧구멍은 벌름거렸다.
황후의 간청에 못 이겨 황제는 충을 태자로 책봉하기 위해 준비를 한다. 결국 사마염은 사마충의 자질을 시험해 보는 자리를 만들었다. 사마염은 우선 왕자의 스승인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어 그들을 태자와 떨어뜨려 놓는다. 그리고 사마충에게는 주요 국정과제 중 하나를 문제로 내고, 그가 문제를 스스로 풀어서 글로 제출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황후를 비롯한 비선들이 대리 답안지를 작성하게 만들었는데, 그 답안지가 사마충의 수준과 맞지 않게 너무 뛰어난 것을 장홍이 지적했다. “태자께선 학문이 깊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이 답안지는 옛 사례를 인용해 가며 잘 작성했으니 황제께서 이것을 보시면 바로 눈치를 채실 것입니다.”라고 조언했다. 이에 장홍에게 사마충의 수준에 맞는 낮은 수준의 대리 답안지를 만들라고 했다. 황제 사마염은 사마충의 대리답안지를 보고는 만족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튿날 황제 등극 9년이 되어 대대적인 특별사면과 동시에 사마충도 태자 책봉령을 받았다. 황제는 황후와 조찬 부인의 충정을 알고 있었으며, 반대파들을 무마하려고 시간을 끌었던 것이다.
황제가 보위에 오른 지 10년째 되는 태시(泰時) 10년(275년) 늦가을에 태자 나이 12살이 되자 간택령이 내렸다. 간택 범위도 경성을 넘어 전국으로 확대해 10∼15세 처녀들이 구름처럼 황궁으로 몰려들었다. 공경(公卿) 이하 벼슬을 가진 집의 모든 미혼의 딸들을 대상으로 간택령을 내렸다. 황제 왼쪽엔 황후가 앉고 오른쪽엔 조찬 부인이 배석했다. 그리고 등 뒤엔 태감이 정좌해 있다. 후보들이 10명씩 줄지어 들어왔다. 등 뒤에 있는 태감이 누구 여식이라며 이름을 말해 주었다. “황후 저 아이 얼굴은 예쁜데 엉덩이가 없고 저기 저 아이는 엉덩인 푸짐하나 얼굴이 모자라네.” 이같이 하루 종일 면접을 봤으나 소득이 없다. “폐하 오늘은 폐하의 여인을 고르는 것이 아니고 태자비를 간택하는 날이옵니다.” 황제는 지금 자신의 여자를 고르는 것으로 착각하고 기분이 좋았던 것이다. 적당한 후보감이 없자 그들은 태감이 예비 심사를 거친 가충(賈充)의 후처 곽괴(郭槐)의 큰 딸 남풍(南風)과 대신 위관(衛瓘)의 딸을 태자비 후보로 정했다. 황제는 위관(衛瓘)의 딸을 마음에 들어 하며 태자비로 책립 하려 했으나, 가충(賈充)이 일찍이 양염에게 진귀한 예물을 많이 보내왔다. 양염은 그 예물을 매우 좋아하여 가충에게 반드시 그의 딸 가남풍(賈南風)을 태자비로 책봉하겠다고 약속했다. 사마염은 아들의 혼사에 지나치게 간섭하고 싶지 않아, 양염의 뜻을 허락했다.
그런데 가남풍은 예교(禮敎)도 잘 모르고 질투를 잘하여, 그녀는 사마충의 회임한 첩을 전부 배를 갈라 죽이려고 했다. 그 소식을 듣고 분노한 사마염은 태자비를 당장 폐위시키려 했는데, 황후 양염은 가남풍이 젊어서 철이 없어서 일시 충동적으로 그와 같은 일을 저질렀으니, 엄하게 단속하여 다시는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게 하겠다고 사정했다. 황후가 이렇게 태자비를 구하기 위해 사정하자, 사마염도 더 이상 가남풍의 잘못을 추궁하지 않았는데, 양염의 비호는 반대로 가남풍을 더욱 위세를 부리며 날뛰게 만들었다. 이런 두 가지의 선택 잘못으로 서진(西晉)이 몰락의 길로 들어서는 단초를 제공한 것이다. 큰아들 충은 어머니의 강권에 못 이겨 가남풍과 결혼했으나 신방도 치르지 않았다. 황제 또한 황후의 간청을 받아들여 주었으니, 더 이상 황후의 눈치를 보지 않고 계집 사냥에만 신경을 썼다. 황제는 명문가의 딸인 좌분(左芬)과 호방(胡芳)을 연이어 후궁으로 삼고 조찬보다 한 급수 위인 귀빈에 봉했다. 그리고 황후에게 보란 듯이 하루에도 몇 명씩 찾아가 승은을 나눠주었다. 황제의 황음과 후궁들의 권력 다툼에서 비록 태자로 책봉되었지만 언제 어느 때 약간 모자란 태자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걱정이 태산이다. 자기의 건강 상황을 느낀 황후 양염은 후사를 튼튼히 할 방도를 찾았다. 그래서 자기의 사촌 동생인 양남윤(楊男胤)을 천거해서 자기의 계비로 맞아 달라고 간청한다. 양남윤은 양준의 딸로서 자(字)는 계란(季蘭)이고 이름을 나중에 양지(楊芷) 개명했다. 아무튼 그 같은 황음을 보고만 있을 황후가 아니다 보니 스스로 가슴의 병이 되어 36살의 젊은 나이에 불귀(不歸)의 객이 되고 말았다.(금삿갓 운사芸史 금동수琴東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