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시대 진(晉)의 19대 임금인 헌공(獻公)은 성(姓)은 희(姬), 씨(氏)는 진(晉)이고 이름은 궤제(詭諸)이다. 아버지 무공(武公)이 16대 소자후(小子侯)와 17대 진후(晉侯)를 살해하고 등극하자, 그 뒤를 이은 것이다. 그는 세자 시절에 당시 춘추오패였던 제환공(齊桓公)의 딸인 제강(齊姜)과 약혼이 되어 있었으나, 아버지인 진무공이 며느리가 될 여인을 빼앗아 취해 버렸다. 그리고 가희(賈姬)를 취하여 세자비로 삼았으나 오래도록 자식이 없다가 진헌공이 즉위하기 전에 죽었다. 진무공은 늙어서 제강을 제대로 요리를 못하고 늘 독수공방 하도록 내팽개쳐 놓은 상태가 되었다. 그러자 진헌공은 아버지 몰래 자기와 혼인하기로 약조했던 아름다운 제강과 불륜을 저지르게 된 것이다. 그리고 불륜의 씨앗으로 낳은 아이가 신생(申生)이다. 그 아들을 몰래 신씨(申氏)에게 주어 길렀으므로 이름을 신생(申生)이라고 했다. 딸도 태어났는데, 이름이 백희(伯姬)로 춘추오패의 한 사람인 진목공(秦穆公)에게 시집갔다. 진헌공은 가희가 죽자 제강을 정부인(正夫人)으로 삼았으나 제강은 일찍 요절했다. 헌공은 제강 이외에 적족(翟族)의 여인인 호희(狐姬)와 여동생을 맞아들여, 각각 중이(重耳 : 훗날 문공)와 이오(夷吾 : 훗날 혜공)를 두었다. 아버지 진무공(晉武公)이 죽자 BC676년에 즉위했는데, 이때 둘째 아들 중이가 벌써 21살이었으나, 진헌공이 제강과의 사이에 낳은 아들이 정부인의 소생인 관계로 이들보다 어렸으나 세자로 봉하게 된 것이다.
진헌공은 즉위 15년에 여융(驪戎)을 정벌하기로 마음먹고, 당시의 관례에 따라 출정하기 전에 천문과 역법에 능한 관리에게 점을 치게 하여 출정의 길흉을 따져보았다. 점을 치는 사소(史蘇)가 시초(蓍草) 점을 친 후 말하길, 승전은 하겠지만 어딘지 불길하다는 점괘가 나왔다고 하였다. 승전을 한다니 다른 것은 볼 것 없다고 생각한 그는 전쟁을 하게 되었고 결국은 여융(驪戎)을 정벌하게 되었다. 여융의 군주가 즉시 강화를 청해 오면서 자기의 두 딸을 헌공에게 바쳤다. 장녀를 여희(驪姬)라 하고 차녀는 소희(小姬)라 불렀다. 여희는 용모가 태어날 때부터 식규(息嬀)와 견줄 만했고, 요염하기는 달기(妲己)와 같았는데, 지략이 천 가지요 교활한 거짓말을 백 가지로 했다. 개선하여 돌아와서 승전 축연회에서 진헌공은 사소에게 친히 술 한 잔도 하사하지 않았다. 사소는 그 자리를 빠져나와 이극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하(夏) 나라의 걸왕(桀王)이 유시(有施)를 정복하자, 유시 사람들은 미녀 말희(妺嬉)를 걸왕에게 바쳤습니다. 그런데 결국 하나라는 말희로 인해 멸망했지요. 은왕(殷王) 주(紂)가 유소(有蘇)를 정복하자 유소 사람들은 미녀 달기(달己)를 그에게 선물했습니다. 결국 은나라도 달기로 인해 멸망하고 말았지요. 오늘 헌공께서 여융을 정복하고 여희와 소희를 얻었지만 결코 여융이 좋아서 보낸 선물이 아닙니다. 게다가 동생 소희도 함께 데려왔으니 여희가 어찌 기분 좋을 리가 있습니까? 회군하여 돌아오면서 보니까 여희에 대한 헌공의 사랑은 말희에 대한 걸왕의 사랑이나 달기에 대한 주왕의 총애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못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어찌 진나라가 하나라와 은나라의 전철을 밟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여희를 처음 본 순간 진헌공은 이국적인 매력을 물씬 풍기는 미모에 마음을 홀라당 빼앗겼다. 그녀가 풍기는 매력은 마력처럼 다른 여자에게서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것이었고, 여희와의 밤무대는 헌공의 마음을 더욱더 녹여서 그녀의 수렁으로 빠뜨리게 하는 것이었다. 어느 날 여희가 우울해 있자 헌공이 물었더니 여희가 말하길, “소첩은 어려서부터 꽃과 푸른 풀이 가득한 자연 속에서 뛰어놀며 자라 궁궐 안에 들어온 이후로는 한 번도 그런 경험을 하지 못해 우울합니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헌공은 즉시 숲과 정자가 있는 원림(園林)을 만들어 주었고 둘은 그곳을 자주 이용하게 되었다. 여희가 그 원림을 만들어달라고 했던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헌공의 신변에서 큰 신임을 얻고 있었던 우시(優施), 양오(梁五)와 동관오(東關五)가 있었는데, 여희는 헌공의 마음만으로는 부족하여 그들의 마음도 얻어 자신의 편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었다. 진헌공이 사냥을 나가서 궁을 비우면, 여희가 우시를 원림으로 불러오게 하여 밀회를 즐겼다. 그 이후로도 틈만 나면 양오와 동관오에게 뇌물을 주는 등 헌공과 그의 심복들을 유혹하여 자신의 뜻을 한껏 펼 수 있게 되었다.
진헌공 12년에 여희에게서 아들이 태어났데, 그의 이름을 해제(奚齊)라 하였다. 여희는 아들이 태어나자 자신의 뜻을 더욱더 펼 수 있게 모든 것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당시 헌공에게는 다섯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태자는 제강의 소생인 신생(申生)이었고, 또 적족(翟族)의 여인인 호희(狐姬)와 여동생의 아들인 중이(重耳)와 이오(夷吾)가 있었고, 자기의 동생 소희의 소생인 탁자(卓子)도 있었다. 그래서 어느 날 여희는 자신과 자기 아들에 대한 앞날을 걱정하게 되었다. 진헌공의 나이 이미 예순이 넘었다. 매일 주지육림에 빠져있는데, 언제 죽을지 몰랐다. 길어야 10년도 더 못 살 것이다. 그러면 그때는 어떻게 될까 하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래서 그에 대한 튼튼한 대비책이 필요했다. 이때부터 여희는 무섭고 교묘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자기가 가진 특유의 기술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남편 진헌공의 잠자리를 공략하는 거다. 온갖 방중술의 비법을 시전 하고, 교태와 정성으로 밤이면 밤마다 진헌공의 혼을 쏙 빼놓고, 전신을 흐느적거리게 만들었다. 진헌공은 청춘을 다시 찾아서 새로 태어나는 기분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연예인들이 유흥업소에서 마약을 복용하고 성매매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진헌공은 밤마다 여희의 방을 찾아 자신의 몸을 녹이는 것이 즐거움이 되었다. 늙은 진헌공에게 최음제를 먹여서 밤마다 녹이는 여희의 이러한 노력은 성공을 거두었다. 마침내 진헌공의 입에서 그녀를 정실(正室)로 삼겠다는 말이 떨어진 것이다.
다음날 조회에서 진헌공은 신하들에게 여희를 정실로 삼아 내궁을 다스리도록 하겠노라고 선포했다. 신하들은 깜짝 놀랐다. 하지만 신하들이 놀란 것은 정실부인을 들이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이 여희라는 이름 때문이었다. 충신들은 여희가 오랑캐의 여인이라는 이유로 극력 반대했다. 신하들의 반대가 극심 하자 진헌공은 나름대로 꾀를 내어 점을 쳐서 그 결과에 따르겠다고 절충안을 제시했다. 그래서 태복(太卜) 곽언(郭偃)을 시켜 점을 치게 하였다. 그 점사(占辭)에 이르기를, “마음대로 하면 변이 나서, 그대의 아름다움을 빼앗으니, 하나는 향기, 하나는 악취를 풍겨서, 10년이 지나도 그 냄새가 없어지지 않으리라(專之渝, 攘公之羭. 一薰一蕕, 十年尚有臭!)” 했다. 진헌공은 언짢은 표정을 지으면서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곽언이 말하기를, “투(渝)는 변한다는 뜻입니다. 오로지 생각대로 하면 마음도 변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마음대로 하면 변이 난다.’고 했습니다. 또한 양(攘)이란 빼앗는다는 뜻이고, 유(羭)는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마음이 변하면 아름답고 추한 것이 바뀌기 때문에 ‘그대의 아름다움을 빼앗는다.’고 한 것입니다. 향기가 나는 풀을 훈(薰)이라 하고, 악취가 나는 풀을 유(蕕)라 합니다. 향기가 악취를 이길 수 없고, 더러운 기운이 오랫동안 없어지지 아니하므로 ‘10년이 지나도 그 냄새가 없어지지 않으리라.‘고 한 것입니다.” 했다. 그는 곽언의 점도 이제는 옛날만큼 신통하지 못하다면서 핑계를 대면서 사소(史蘇)를 불러 시초(蓍草) 점을 쳤다. 이윽고 효를 얻어냈는데, “엿보는 것은 여자의 정(貞)에 좋다”라고 나왔다. 무슨 뜻인가 하고 물으니, 사소가 말하기를, “예법에는 두 적자(嫡子)가 있을 수 없으므로 제후는 두 번 정실부인을 두지 않습니다. 점사에서 말하는 엿본다는 것은 계실(繼室) 부인을 말합니다. 어찌 바르다고 하겠습니까? 바르지 못한데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주역>으로 말하더라도 또한 길함을 볼 수 없습니다.” 했다. 이미 여희에게 정실부인으로 삼기로 약조를 했기에 진헌공은 거북점과 시초점은 모두 귀신들의 수작이라 믿을 수 없다고 다 물리쳤다. 그러고는 정식으로 영을 내려 여희를 정부인으로 삼고 소희를 둘째 부인으로 봉한다는 교지를 내렸다. 이 소식을 들은 여희는 뛸 듯이 기뻐했다. 물론 그날 밤, 그녀는 더욱더 정성을 다하여 진헌공을 뼈까지 녹여주었다.
하지만 여희는 자신이 정실부인으로 된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그녀의 목표는 더 높은 곳에 있었다. 세자 신생을 몰아내고 자기 아들 해제를 세자로 삼을 수만 있다면 진헌공이 죽더라도 자기와 아들의 안전을 보장받고, 과거의 원수를 갚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세자 신생은 평판도 좋았고 능력도 뛰어났다. 호돌이나 이극(里克), 두원관(杜原款) 같은 명신들이 그를 보필하고 있다. 반면, 해제는 이제 겨우 두 살로 나이가 너무 어렸다. 학문을 배울 나이도 아니어서 스승이나 보좌관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도저히 신생과는 견줄 수 없는 것이다. 여희는 시시 때대로 이런 난관으로 인하여 우울증에 빠지기도 했다. 이러할 때 구세주처럼 나타난 세 사람이 있었다. 바로 대신 양오(梁五)와 동관오(東關五), 그리고 배우인 우시(優施)였다. 양오(梁五)와 동관오(東關五)는 궁 바깥일을 진헌공에게 일러바치서 총애를 받아 권세를 부렸다. 진나라 사람들은 그들을 이오(二五)라 불렀다. 또 시(施)라는 배우가 있었는데, 어린 나이에 모습이 아름답고 영리하며 꾀가 많을 뿐만 아니라 구변이 대단했다. 진헌공이 특별히 총애하여 궁궐에 출입할 수 있게 하여 아무 데나 드나들었다. 그의 원래 이름은 시(施)인데, 직업이 배우라서 사람들은 그를 우시(優施)라고 부른다. 나이는 열아홉 살로 얼굴이 여자 뺨치게 예쁘고 아름답게 생겼다. 우시가 궁중 출입 하기 시작한 것은 3년 전부터였다. 배우인 숙부를 따라 궁중을 출입하다가 진헌공의 눈에 띄었다. 우시는 어렸지만 영리하고 재치가 있었다. 말솜씨 또한 대단해서 이내 진헌공의 귀여움을 한 몸에 받기 시작했다. 그는 어느덧 수시로 내궁까지 출입할 만큼 궁중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자연 여희의 방에도 들락거렸다. 우시는 전형적으로 여자들이 꿈꾸는 송준기 같은 미소년이었다. 여희는 그런 우시를 볼 때마다 우리 아들 해제도 저렇게 미소년으로 성장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희는 우시를 아들처럼 생각하고 그가 자기 방에 올 때마다 가슴에 안아주곤 했다. 그러나 우시는 여희가 생각한 것처럼 아이가 아니었다. 어느 봄날 우시가 어젯밤에 진헌공을 정성껏 모시느라 밤잠을 설쳐서 나른하게 침상에 누워 있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우시가 여희의 방에 들렀다. 여희는 일어나기도 귀찮고 해서 침상에 누운 채로 우시더러 침상에 올라오라고 했다. 그리고 그를 포근하게 품속으로 품은 채 사르르 잠에 취했다.
그런데 잠결에 여희는 아랫배 쪽에서 진헌공에게는 느껴보지 못한 뜨겁고 육중하며 뻣뻣한 감촉을 느꼈다. 여희는 자신도 모르게 몸이 달아오르고 정신이 몽롱하며 가쁜 숨을 토했다. 그녀는 잠결인 체하면서 손을 아래로 내려 뻣뻣한 물건을 정체를 확인해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 물건이 여희의 손길에 화답이라도 하듯이 힘차게 끄덕거리며 인사를 하는 게 아닌가. 이 상황에서 여희는 더 이상 진헌공의 정부인이 아니고 싶었다. 매일 밤마다 진헌공의 노리개가 되었지만 정작 본인의 욕망을 불처럼 해소하지 못했다. 언제나 어정쩡한 상태로 끝마칠 수밖에 없었다. 정실부인 자리와 아들을 위해 타오르는 욕망을 억제하면서 진헌공의 약조를 받아내는데 헌신했다. 이제 1차적 목표가 달성되자 자기도 모르게 욕망의 봇물이 터져 나오려고 하는 것이다. 그녀도 한참 젊은 여인으로서 밤마다 홍콩 가기를 갈망하는 한 명의 목마른 여자에 지나지 않았다. 우시도 분출하는 젊은 청년으로서 여희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때부터 우시 역시 익살을 부려대는 배우도 아니고, 여희에게 어리광을 부리는 소년도 아니었다. 그는 야수보다도 더 거칠게 여희의 옷을 찢어버리고, 백옥 같은 그녀의 몸 위를 타고 천리마처럼 달렸다. 그날 여희는 여자로 태어난 이래 처음으로 자신이 천상의 여자인 것 같은 행복감을 만끽했다. 밀회와 사통은 원래 한 번이 어렵지 그 맛을 보고 나면 그 뒤로는 자동으로 이루어진다. 여희와 우시도 마찬가지로 더욱 자주 한 몸이 되어 침상 위를 뒹굴었다. 두 사람은 이제 낮의 부부가 되었다. 금단의 열매는 달디달아서 영원히 같이 먹고 싶은 것이 인간의 욕망이다.
그래서 자연스레 자신들의 장래에 관한 얘기를 나누었다. 여희로부터 가슴속의 생각을 듣게 된 우시는 배다른 세 공자와 진헌공 사이를 이간시켜서 세자의 자리를 빼앗아 여희의 아들 해제를 세자로 세워 다음 보위를 이으면 된다는 계략을 이야기한다. 우시가 덧붙인다. “해제 공자가 다음 군위(君位)에 오르면 군부인께서는 이 나라의 지존으로 아무 거칠 것이 없게 됩니다. 저 또한 재상이 되면 어찌 군부인 만나는 것에 제약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아들의 영달과 본인의 영화에 대한 명쾌한 계획을 듣자 여희는 귀가 번쩍 뜨였다. 평소 늘 자신이 꿈꾸던 일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 길이 막막했다. “세자 신생이 있는데, 우리 해제가 다음 군위를 이어받을 수 있을까?” “마음만 먹으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저의 계책대로 하시면 됩니다.” 이때부터 여희와 우시는 성애의 쾌락을 즐기는 사이를 뛰어넘어 대담하게도 진나라를 통째로 집어삼킬 음모의 드림팀이 되었다. 먼저 그들은 조정 대부 중에서 자신들을 도울 동조자를 구했다. 당연히 여희가 뇌물을 주면서 길들여 놓은 양오(梁五)와 동관오(東關五)라는 자이다. 그들은 빈 수레가 요란하듯이 능력은 없으면서 나서기를 좋아하는 자들이었다. 아첨과 시중의 가짜뉴스를 가지고 진헌공의 비위를 맞추는 데도 탁월한 재능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궁정 사람들은 두 사람 이름의 끝 자(字)가 ‘오(五)’라서 이오(二五)라고 부르는 것이다. 모든 계책은 우시의 머리에서 나오고, 그것의 실행은 여희가 밤마다 진헌공을 녹이던가, 이오에게 뇌물을 주어서 실행토록 하는 것이다. 첫 번째의 계략은 세 공자를 변방으로 보내서 궁중 안에는 여희의 소생인 해제와 소희의 소생 탁자만 남겨 진헌공의 총애를 독차지하게 한다. 그리고 신생을 세자에서 폐하고, 대신 해제를 세자로 책봉을 도모고, 기회를 노려 변방의 세 공자를 제거하는 것이다. 우시는 매일 벌건 대낮에 여희의 침상에서 여희의 옥문을 여의봉으로 꽉 채운 채 그들만의 장래에 대한 모든 계책을 상의하는 것이다. 여희는 이제 우시의 여의봉 처음 받아들였을 때보다 미래의 꿈에 젖어 더 환희에 몸을 떨었다.
원래 여희에게 빠진 헌공은 여희의 아들 해제가 태어나자 과거에 사랑했던 제강의 아들인 세자 신생을 폐하고 해제를 세자로 세우려 하였다. 자신의 출신 성분과 궁내의 역학 관계를 안 여희는 속으로는 좋지만 다른 계략을 꾸밀 준비가 되지 않아서 은근히 겸양을 하여 진헌공의 신임을 얻는 게 우선이었다. 그래서 신생은 이미 세자이고, 능력도 있고 신망도 있으며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폐하게 되면 나라를 위해 옳지 않다고 사양했다. 그러자 헌공은 여희를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헌공에게는 이극과 순식이라는 충복이 있었는데, 여희는 그중 다루기 쉬운 순식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고자 그를 해제의 스승으로 모시고 싶다고 하자 세자 책봉 대신 그렇게 해 주었다. 여희의 장기적인 계획에 진헌공은 점점 조연의 역할을 충실히 하게 되는 것이다. 여희의 지령을 받은 양오가 진헌공에게 조용히 진언하기를, “곡옥(曲沃)은 처음 봉해진 땅으로 선군들의 종묘가 있는 곳입니다. 또한 포(蒲)와 굴(屈) 땅은 오랑캐의 땅과 가까워서 변경의 요지입니다. 이 세 고을은 다스릴 충직한 사람이 없으면 안 됩니다. 종실 고을에 다스리는 사람이 없으면 백성들이 군주의 위엄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변경에 다스리는 사람이 없으면 오랑캐가 엿보게 될 것입니다. 만약 세자로 하여금 곡옥을 다스리게 하고, 중이 공자와 이오공자로 하여금 포와 굴을 나누어 다스리게 하고, 주군께서 중앙에서 통솔하면 나라가 반석처럼 안전할 것입니다. 세자도 그곳에서 통치의 경험을 쌓을 수 있으니 더욱 좋을 겁니다.” 하니, 진헌공이 말하기를, “세자가 바깥으로 나가도 되는가?” 했다. 그러자 동관오가 말하기를, “태자는 군주 다음의 지위입니다. 곡옥도 나라에 둘째 가는 지방입니다. 그러니 태자가 아니고 누가 다스리겠습니까?” 했다. 진헌공이 말하기를, “곡옥은 그렇다고 하지만 포와 굴은 황야인데, 어떻게 지킬 수 있겠는가?”하니, 동관오가 또 말하기를, “성이 없으면 황야라 하겠지만 성을 쌓으면 모두 성읍이 됩니다.” 했다. 두 사람이 또 함께 칭송하기를, “하루아침에 두 고을이 늘어나니 안으로는 둘러막아 영지를 만들고 밖으로는 강토를 개척하니 진(晉)나라는 이로부터 더욱 커질 것입니다.” 했다.
진헌공이 그 말을 믿고 세자 신생을 곡옥으로 보내 종실 고을을 다스리게 하고, 태부 두원관(杜原款)을 딸려 보냈다. 중이는 포읍으로, 이오(夷吾)는 굴읍으로 보내어 변경을 다스리게 했다. 중이의 외숙부인 호모(狐毛)와 호언(狐匽)이 중이를 따라 포읍으로 가고, 대부 여이생(呂飴甥)이 이오를 따라 굴읍으로 갔다. 또 조숙(趙夙)에게 명하여 태자를 위하여 곡옥에 성을 더욱 넓고 높게 쌓게 하여 신성(新城)이라고 불렀다. 대사공 사위(士蒍)를 시켜 포와 굴 두 성을 오가며 성 쌓는 일을 감독하게 하자, 사위(士蒍)는 섶나무를 모아 흙을 개서 토성을 쌓게 하여 대충 일을 마무리했다. 어떤 사람이 사위(士蒍)에게 성이 튼튼하게 쌓지 않아서 후일이 걱정된다고 했다. 그러자 사위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몇 년 후면 이 성들은 원수가 될 터인데 견고해서 무엇 하겠는가?”했다. 사위는 여희가 틀림없이 세자의 자리를 빼앗을 모의를 하는 것을 미리 알았으므로 이렇게 대답했다. 호모와 호언은 헌공의 신임을 얻는 자들이었지만 여희에게는 거추장스러운 인물이었으므로 이 계략은 여희의 눈엣가시인 자들을 모두 없애버리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신생과 두 공자는 모두 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진나라 변경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세월이 흐른 후 진나라 북쪽 변경이 북적의 침입을 받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에 여희는 신생을 죽일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동관오와 양오을 시켜 세자 신생을 북방에 보내 적을 물리치도록 진헌공을 설득했다. 그러나 전체적인 군사를 관리하는 군권은 두 사람이 갖고, 신생에게는 주어진 군사를 데리고 적들과 전투를 지휘할 수 있는 권리만 주도록 했다. 물론 그에게 늙고 병든 병사들을 위주로 편제한 군대와 무기나 전차도 나쁜 것만 보급하도록 했다. 그런데 결과는 예상과 다르게 신생이 힘들이지 않고 적을 물리쳤으며, 승전고를 울리며 돌아왔다. 여희는 적으로 적을 제압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의 기회를 놓친 게 화가 났지만 참고 다른 계략을 생각해 냈다. 미인계를 쓸 방안을 찾은 것이다. 원림에서 진헌공과 산책을 하는 중에 진헌공에게 슬쩍 건의한다. 진헌공의 나이가 적지 않고, 여희는 힘이 없고, 해제는 아직 나이가 어리므로 신생이나 누군가가 궁에서 잘 돌봐 주면 좋겠다고 했다. 진헌공은 당장 신생을 불러들이도록 했다. 이윽고 그가 돌아오자 연회를 열어 축하를 하였다. 어느 날 여희는 문안을 온 신생에게 원림이 아름다우니 어미로서 내일 같이 산책을 하면서 동생인 해제에 대한 부탁할 말이 있다고 약속을 했다. 그날 저녁 여희는 진헌공이 자기 방으로 오자 울면서 이야기를 했다. 세자 신생이 계모인 자기에게 문안을 올린다고 찾아와서 힐끔힐끔 희롱도 하며 눈독을 들였다고 고자질을 한 것이다. 태자가 다시 말하기를, ‘옛날에 우리 조부이신 진무공께서 첩실인 내 모친 제강씨를 내 아버지에게 주었습니다. 지금은 부왕이 연로하시니 반드시 첩실을 주어야 한다면 제가 아니면 누구겠습니까?’ 하고, 첩의 손을 잡으려 하였으나 재빨리 거절하여 면할 수 있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진헌공이 믿으려 하지 않자, 신생이 다음날 원림에서 나를 기다린다고 했으니 내일 원림으로 납시어 지켜보라고 말했다. 다음 날 여희는 머리에 꿀을 잔뜩 바르고 원림으로 가서 신생을 이끌고 일부러 꽃들이 많아 벌들이 윙윙거리는 곳으로 갔다. 머리에 잔뜩 바른 꿀의 달콤한 냄새로 벌들이 떼 지어 여희의 머리 위로 날아오자 신생은 혹시라도 계모가 벌에 쏘일까 봐 벌들을 쫓아내느라 소매 자락을 펄럭이며 여희의 얼굴을 껴안듯이 가리기에 급급했다. 이 모습을 멀리서 쭉 지켜본 헌공은 꿀벌들의 존재는 모르는 채 신생이 여희를 안으려 하는 것으로 알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올랐다. 그래서 자초지종을 따지지 않고 당장 신생을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때 오히려 여희가 울며 말하길, 이런 일로 태자를 죽인다면 자기의 행실이 잘못된 것으로 비난받을 것이므로 용서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러한 그녀의 마음 때문에 진헌공은 여희를 더욱 사랑하게 되었고, 세자 신생과는 확실한 이간질이 성사되게 된 것이다.
어느 날 밤에 진헌공과 거사를 진하게 치른 후에 잠을 자다 깬 여희가 일부러 놀란 모습으로 소리를 치며 진헌공을 깨웠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태자의 생모인 제강이 흰옷을 입고 머리를 풀어헤친 채 초췌한 모습으로 꿈에 나타나서 배고프고 무섭다고 울면서 외치며 자기한테 다가왔다고 했다. 이에 진헌공은 무덤이 있는 곡옥에 사람을 보내 제강의 무덤에 담장을 세우게 하고 시위(侍衛)를 보내 밤낮으로 지키도록 하였다. 그래도 여희는 며칠 후에 똑같은 꿈을 꾸었다고 하자 진헌공은 신생에게 제강을 위한 성대한 제사를 지내게 하라고 명하였다. 효자인 신생은 어머니 제사를 정성껏 모시고 제사 음식으로 음복을 하기 위해 여러 가족에게 보냈는데, 당연히 아버지 진헌공에게도 보냈다. 그런데 마침 그때 진헌공이 사냥을 나가고 궁 안에 없었다. 진헌공이 사냥에서 돌아오자 여희가 맞으면서 말하길, 세자 신생이 제사 음식을 보냈는데 드실 거냐고 했다. 사냥터에서 허탕치고 돌아온 마당이라 출출하던 차에 가져오라고 했다. 여희가 음식을 내오라고 한 후에, 전에 세자가 자기에게 눈독을 들인 것으로 혼이 난 관계로 보아 혹시 독이 들어있을지도 모르니 먼저 시험해 보자고 했다. 개에게 음식을 던져 주었더니 개가 피를 토하며 땅바닥에 쓰려졌다. 다른 음식들도 마찬가지로 독이 들어있었다. 이것을 본 여희는 통곡을 하며 저번에 용서를 해서 목숨을 살려 주었더니 도리어 독살을 기도했다고 마구 악을 쓰며 세자의 손에 죽느니 차라리 자진을 하겠다고 떼를 썼다. 간신히 여희를 뜯어말린 진헌공은 이제는 필히 신생을 없애야겠다고 먹었다. 그래서 먼저 신생의 스승인 두원관을 처형했다. 그리고는 즉시 동관오를 대장으로 삼고, 양오를 부장으로 삼아 전차 200대를 주어 곡옥을 토벌하게 했다.
이 사실을 안 충신 호돌이 신생에게 피신하라고 일렀으나, 그는 워낙 효자라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사실을 안 중이와 이오도 자신들이 그다음 차례라고 생각하고 대비를 했다. 여희가 진헌공을 꼬드겨 두 아들이 모반할 의사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 발제(勃鞮)를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포성으로 가서 공자 중이를 잡아 오게 하고, 가화(賈華)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굴성에 가서 공자 이오를 잡아 오라고 했다. 포읍을 지키던 중이는 호모(狐毛), 호언(狐偃)과 함께 국경을 넘어 적(翟)나라로 달아나게 된다. 그리고 굴읍을 지키던 이오도 대부 극예(郤芮)와 여이생(呂飴甥), 외숙인 괵석(虢射)과 함께 양(梁)나라로 피신하고, 나중에 양나라에서 공녀와 혼인해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낳았다. 진헌공은 자기의 여러 아들이나 다른 공자가 대부분 중이와 이오의 패거리라고 의심하여 후일에 틀림없이 해제에게 장애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즉시 공자들을 모두 나라 안에서 쫓아내라고 명령을 내렸다. 진(晉)나라의 공족들은 아무도 감히 나라에 머무를 수가 없었다. 이에 해제를 세자로 세웠다. 이오(二五 ; 동관오와 양오)와 순식을 제외한 모든 벼슬아치는 울분에 차서 주먹을 불끈 쥐고, 아프다거나 늙었다는 핑계를 대고 조정에 나오지 않았다. 진헌공도 늘고 병들아 죽게 되자, 순식을 불러 해제를 당부했다. 진헌공이 죽고 11살의 해제가 보위를 이었다. 순식을 상경으로 이오(동관오, 양오)를 좌우 사마로 올려 보좌하게 하였다. 한편 이극(里克)과 비정보(丕鄭父) 두 사람이 비밀리에 모의하여 심복 중에서 역사(力士) 한 사람을 변장시켜서 해제의 호위 군사들 속에 섞여 들어가게 했다. 그 역사가 상주의 처소에 있는 해제를 거적자리 옆에서 찔러 죽이니, 그때 옆에 있던 우시가 칼을 빼 들고 구하려 하다가 그 역시 함께 살해되었다. 순식간에 상막(喪幕) 안에서 큰 난리가 일어났다. 그때 순식은 빈청에서 곡을 끝내고 퇴궐하려던 참이었는데, 변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 급히 빈청으로 뛰어 들어가서 해제의 시체를 어루만지며 대성통곡하며 말하기를, “내가 선군의 탁고(託孤 ; 고아를 부탁함)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태자를 지키지 못했으니 이것은 나의 죄다.” 하고, 문득 기둥에 머리를 부딪쳐 죽으려고 했다. 그때 여희가 나타나서 단호하게 말했다. 비록 해제가 죽었어도, 우리에겐 아직 탁자(卓子)가 있으니 그를 세워서 도모하라고 했다. 그래서 급히 탁자를 군위에 앉히니 그의 나이 9살이었다. 하지만 진헌공의 장례식 날에 이극, 비정보, 도안이, 추천 등이 모의를 하여 동관오를 먼저 죽이고, 나머지를 제압하니 이오는 자결을 시도하다가 몸이 두 동강이 나서 죽었다. 궁으로 밀어닥치자 순식이 어린 탁자를 안고 저항하다가 모조리 도륙을 당했다. 여희는 목숨을 건지려고 도망을 치다가 결국 소용이 없자 원림의 연목에 몸을 던져 자결했다. 이극은 이를 건져서 다시 목을 베었다. 이렇게 해서 요염한 여인이 미인계로 나라를 차지하려다가 실패하여 불귀의 객이 된 것이다.
반정 세력들은 중이를 옹립하고자 하였으나, 중이가 사양했다. 그러자 다시 양(梁)나라에 가 있던 이오에게 옹립 의사를 전하자 흔쾌히 좋아했다. 그러나 양측의 책사들은 한결 같이 진(晉)나라 내부에 무슨 꿍꿍이가 있으니 힘 있는 나라의 군사적 도움을 받아서 입국하라고 조언했다. 현명한 중이는 부친의 상중에 남의 나라 도움으로 군주가 되는 것은 싫다고 사양하고, 이오는 좋아라고 강대국인 진(秦)나라의 도움을 받아 군주로 취임한다. 그 과정에서 진(秦)나라에게 5개의 성을 할양하겠다는 약속을 한다. 그리고 진혜공(晉惠公)으로 취임을 하자 약속을 안 지키고, 기근으로 식량이 떨어지자 다시 진(秦)나라에 도움을 청했다. 진(秦)나라의 목공(穆公)은 모두 도와줬다. 그런데 막상 진(秦)나라가 기근에 빠져 진(晉)나라 혜공(惠公)에게 도움을 청하자 모른 척했다. 그래서 두 나라가 전쟁을 해서 진혜공(晉惠公)이 패하여 포로가 되었으나 진목공(秦穆公)은 또 은혜를 베풀어 세자 어(圉)를 인질로 잡고 그를 풀어 준다. 진혜공은 이복형제 중이가 망명지에서 살아 있는 한 자기의 자리가 위태로움을 알고 내시 발제를 보내 암살하려고 했다. 그러나 중이는 국내에 있는 외할아버지 호돌(狐突)이 기별을 해줘서 간신히 제나라로 도망쳐서 목숨을 부지한다. 그 과정에 먹을 것이 없어서 개자추(介子推)가 허벅지 살을 베어서 국을 끓여 바친다. 천신만고 끝에 제(齊)나라에 도착하여 제환공(齊桓公)의 도움으로 새 장가도 들고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살다가 제나라도 제환공이 죽은 후에 내분이 끊이지 않게 된다. 중이 일행은 다시 주유천하(周遊天下)를 하다가 진(秦)나라에 의탁하고, 진목공의 딸과 혼인을 했다. 한편 진혜공의 세자 어(圉)는 인질에서 탈출하여 진(晉)나라로 돌아가서 아버지 진혜공이 죽자 진회공(晉懷公)으로 즉위한다. 그러나 중이가 신망을 얻어서 진목공의 도움으로 진(晉)나라를 접수하여 진문공(晉文公)이 되었다. 중이가 여희의 간계에 빠져 43살에 적(翟)나라로 달아났고, 55살에 다시 제나라로 갔으며, 61살에 진(秦)나라에 가서 도움을 받아 진(晉)나라로 돌아와 군주가 되니, 나이가 이미 62살이었다. 진문공이 이미 즉위하여 고량국으로 도망간 진회공을 발제를 보내 죽였다. 요사스러운 미녀 여희(驪姬)로 인해 진(晉)나라는 20년 이상을 안정하지 못하고 환란에 빠져있었던 것이다.(금삿갓 운사芸史 금동수琴東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