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가톨릭 추기경(樞機卿)이 공식적인 행사를 하다가 출산을 하면 어떻게 될까? 아마 너무나 쇼킹해서 난리가 날 것이다. 남자가 출산을 할 수도 없고, 여자가 추기경이 될 수도 없기 때문에 이건 마치 동정녀가 아이를 낳은 것보다 더 경악스러운 것이다. 현대 의학이 발전하여 시험관 아기를 수태시켜 남자의 배속에 인공 자궁에서 아기를 길러 10개월 만에 출산할 수 있을지는 의학적으로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1,170여 년 전에 이런 일이 일어났으니 세상이 뒤집어질 일이었다. 주인공은 바로 요안나(Joanna) 8세이다. 역사 기록상 역대 교황은 모두 남자다. 그런데 단 한 사람 예외가 있었으니 바로 이 주인공 요안나 8세이다. 그녀는 남장을 하고 생활하다가 교황에 까지 오른 것이다. 그녀가 어떻게 교황이 되었을까? 요안나는 현재 독일 마인츠 근처의 잉겔하임에서 822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그녀는 작센족(Sachens)에게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한 수도원의 수도사 게르베르트의 딸이라고 한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학구열에 불탔던 그녀는 수도원에서 공부를 했는데, 부모들이 여자는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했음에도 수도원에 자발적으로 들어가서 남장을 하고 공부를 했다. 그러기 위해 이름을 요하네스 잉글리쿠스(Joannes Englicus : 영국인 존)라는 가명을 썼다.
이후 그녀는 유럽 각지의 수도원을 유랑하면서 다양한 학문과 경험을 쌓는다. 저 멀리 동로마제국의 콘스탄티노플에서는 테오필로스 황제의 아내 테오도라 황후를 만났고, 아테네에서는 당대의 명의이며 철학자인 이삭 이스라엘리(Isaac Israeli)에게서 의학을 배웠다. 그곳에서 열심히 학문에 정진하여 초기 기독교 학자 및 그리스 철학자들의 책을 두루 섭렵한 결과 지식수준이 하늘을 찌르듯이 높아 학자 및 성직자로 명성이 파다하게 퍼진다. 그래서 아테네의 철학자, 고위 성직자 및 고위관료들도 그녀를 찾아와 토론과 담소를 즐겼다. 특히 깊은 종교적 토론을 하게 되면 그녀의 박식하고 정교한 언변에 누구도 대응하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마치 법무장관 한동훈에게 질문하다가 도리어 당하는 민주당 의원들 같은 꼴이었단다. 물론 그 누구도 그가 여자인 줄 몰랐다고 한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요안나는 독일로 금의환향(錦衣還鄕)을 해서 카를 2세를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그녀는 옛날 어린 시절 공부를 시작한 고향의 수도원으로 찾아간다. 거기에서 그녀는 미남 수도사 프르멘치오를 만나 그만 금단(禁斷)의 사랑에 빠지고 만다. 요안나는 그를 남자로 사랑하게 되었지만, 프르멘치오는 그녀가 여자인 줄 모르고 남자로 여기고 동성애를 시작한 것이다. 이 둘은 불타오르는 사랑을 감출 길 없어 야반도주를 감행하여 로마로 들어가게 된다.
로마에서 848년에 그녀는 성 마르티노(Martino) 신학교의 신학교수로 임명된다. 그 학교는 저 유명한 성 아우구스티누스도 한 때 이교도로 살다가 신학으로 개종하여 후학들을 가르친 적이 있다는 그야말로 최고의 명문 학교이다. 그 당시 요안나의 강의는 요즘의 대입학원의 일타강사도 울고 갈 정도였다. 그녀의 강의를 들으려면 몇 달 전에 수강증을 끊어야 가능하고, 저 지방에서 강의를 들으려고 학교 주변의 집값이 요즘 강남 도곡동의 집값보다 비쌌다고 했다. 특히 한 달에 한번 정도 진행하는 공개 특강은 로마 시내를 들었다가 놓았다가 할 정도로 인기였단다. 강의 시간 몇 시간 전부터 학교 주변 도로는 마차로 뒤 엉겨서 교통이 마비되어 로마 교통 관리들이 특별근무를 해도 정리가 안 되어서 밀라노와 피렌체 경찰까지 파견을 받을 정도였다니 할 말이 없다. 심지어는 교황까지도 강의를 들으러 올 정도로 명 강의였다고 한다. 로마 시내가 떠들썩한 유명세로 당시 교황 레오 4세도 강의를 들으려고 연락을 했는데, 그녀가 조교를 시켜서 자리가 없다고 퇴짜를 놓았단다. 교황이라고 특별히 봐줄 수 없고 강의를 들으려면 먼저 와서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한단다. 어쩔 수 없이 레오 4세도 비서실장을 보내서 새벽부터 줄을 서서 간신히 뒷자리를 확보하여 그녀의 강의를 들었다. 교황도 그녀의 박학다식에 그만 입이 쩍 벌어지도록 감복하여 요안나를 교황청의 특별 사설비서 겸 국제관계 보좌관로 임명하게 된다. 그야말로 일타강사에서 청와대 비서실장 겸 국가안보실장 자리를 꿰찬 것이다. 교황이 일을 맡겨 보니 똑소리 나게 처리하고, 그에게는 필요 불가결한 존재가 되어 교황의 후계자 정도로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
일이 잘 풀리려고 그랬는지, 빨리 망하려고 그랬는지는 몰라도 얼마 후 교황이 노환으로 세상을 뜨게 되고, 레오 4세도 그녀를 좋아했고, 로마시내의 그녀의 제자들이 열화같이 그녀의 교황 추대를 요즘 ‘개딸’들 보다 더 극성으로 추천하니 새 교황으로 요안나가 옹립된 것이다. 당시 9세기에는 요즘 같은 추기경회의를 열고 콘클라베(Conclave) 선거로 교황을 선출하는 제도가 없었다. 초기에는 성직자와 신자들의 선거로 교황이 선출되었고, 차츰 교외 밖의 세력들이 교황의 선출에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 것이다. 즉 로마 황제나 귀족, 주변 왕국의 제왕들의 힘이 강력해지면서 종교적 특혜를 노리고 자국이나 자기 집안의 이익 확대를 위해 교황 선출에 간여를 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독일 하인리히 3세는 한 해에 3명의 교황을 해임하고 독일인으로 교체하기도 하였다. 이런 폐단을 막기 위하여 1059년 교황 니콜라오 2세가 교황 선거를 추기경 주교들에게만 국한시키는 교황선거법을 만들었고, 1179년 라테라노 공의회에서 2/3의 다수결 선출 방식이 교황 알렉산데르 3세의 교황령에 의해 성문화 되었다. 67%의 다수결 선거제도는 취지와는 다르게 한 사람이 67%를 얻는 경우가 잘 없어서 교황을 선출하는데, 시간이 많이 소요되어 교황의 공석이 장기화되기도 했다. 그래서 나온 제도가 바로 콘클라베(Conclave)이다. 이 말의 원래의 뜻은 ‘열쇠로 잠그다’는 것으로, 비르테보에서 진행된 선거에서 유래되었다. 당시 선거가 1268년에 시작되어 1271년에도 결론이 나오지 않자, 비테르보 시당국과 시민들이 조속한 결론을 위해 추기경들을 한 곳에 감금하고 빵과 물만 공급하였다. 그래서 선출된 교황이 그레고리우스 10세인데, 이 방법이 최고로 훌륭하다고 인정하고 제도화한 것이다. 오늘날에는 바티칸의 시스티나 성당에 모여 빵과 포도주, 물만 공급받는다. 여러 차례 무기명투표를 거치고, 3일째에도 나오지 않으면 두 명의 결선 투표로 진행하기도 한다. 투표가 끝나면 투표지를 태우는 연기로 선출이 끝났음을 알게 되어 있다. 모든 제도는 완벽하지 않다. 외부 입김이 전혀 없는 제도로 운영되다가 보니 가톨릭 내부의 비리가 청소되지 않고 부패하고 타락한 인물이 교황으로 선출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교황인지 패륜아인지 분간할 수 없는 인물도 나온다.
아무튼 우리의 여자 주인공 요안나는 교황이 됐다. 그리고 취임하여 그 명석한 두뇌와 해박한 지식으로 교황청을 무척 잘 이끌었을 것이다. 재임 기간 동안 특별한 어려움 없이 훌륭한 치세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요안나도 한창 피 끓는 젊은 나이가 아닌가. 일찍이 독일 수도원에서 멋진 나이스 가이 송준기 같은 미남 수도사와 가슴 뛰는 플라토닉 러브도 해봤는데, 저녁이면 널찍한 교황의 침대가 싸늘하고 영 허전한 것이다. 특리 꽃피고 새우는 봄날, 로마의 따스한 태양 아래 저 멀리 평원에서 아지랑이가 모락모락 피어오를 때에는 요안나의 가슴에도 무언가 자꾸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밤이면 아랫도리가 싱숭생숭한 것이다. 겨울밤도 또한 자꾸 뭔가가 그리워지고 괜스레 길어지는 걸 느낀다. 여자나이 서른이 되면 알 것은 다 아는 것이다. 그때 교황청의 시종인 파오르라는 핸섬하고 말쑥하게 생긴 미남 성직자가 있었다. 이제 갓 신학교를 나와서 교황청에 들어왔는데, 신학교 시절 요안나의 특강을 도시락 싸서 들었으니 완전 요안나의 광팬을 떠나 거의 BTS의 아미나 ‘개딸’ 수준이다. 힘도 좋고 피부도 옥처럼 고운 사내라서 요안나도 은근히 군침을 삼키는 상대였다. 어느 날 요안나의 침대 정리를 하다가 우여곡절 끝에 두 사람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서 봇물이 터져버린 것이다. 한번 일 보기가 어렵지 한번만 일을 본 사내는 없을 것이다. 그들도 이런 공식에 충실하다 보니, 조심한다고 했지만 요안나가 덜커덕 임신을 했다. 임신 초반에는 별 다른 표시가 없었도, 점차 배가 불러와도 교황의 법복이란 것이 워낙 품이 넓어서 임신 9개월의 몸도 별 표시 없이 감출 수가 있었다. 똑똑하고 명석한 요안나가 태아를 어떻게 잘 처리하지 못하고 산달이 가까워졌다. 드디어 성모승천일에 성 클레멘테 성당에 미사를 집전하러 가다가 일이 터지고 만다. 요안나는 임산부의 몸으로 노새를 타고 가면서 길가에 늘어서서 환영하는 신도들에게 인사를 건네던 요안나는 갑자기 복통으로 몸을 뒤틀며 노새에서 떨어지고, 구조를 위해 달려든 사람들은 교황의 법의 자락 아래에서 양수가 터지면서 나온 신생아를 발견하고야 만다. 이 같은 엄청난 충격은 군중들에게 곧바로 집단 히스테리를 일으켜, 여자 교황 요안나는 갓 태어난 아기와 함께 돌에 맞아 죽었다. 이 사건 이후 추기경들은 교황의 남성성을 확인하는 의식을 갖기로 결정하게 된다. 그리하여 새로 선출된 교황은 고환이 밑으로 쳐질 수 있도록 구멍을 뚫어놓은 의자에 앉아야 했습니다. 그 의자 이름을 La Sedia Stercoradia라고 한다. 선출된 교황이 이 의자에 앉으면 하위 성직자 중 한 사람이 의자 밑으로 손을 넣어 그의 고환을 확인하고는 “하베트 듀오스 테스티쿨로스 에트 베네 펜덴테스(고환 두 개를 갖고 있고, 제대로 달려 있다)”하고 외친다. 그러면 모든 성직자들이 주여, 찬미받으소서라고 화답하고 교황 선출을 기쁨으로 진행했다.
여자 교황 요안나, 정식 명칭은 앙글리아 요안나 폰티펙스 막시무스의 이야기는 13세기 장 드 메이의 연대기에서 처음 나타난 뒤로 유럽 전역에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1601년 교황 클레멘스 8세는 여자 교황의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고 선언하여, 이탈리아 시에나 대성당의 유명한 여자 교황의 흉상은 파괴됐다. 이를 대단히 불명예스럽게 여긴 제231대 교황 클레멘스 8세는 1601년 요안나에 관한 모든 기록도 완전히 말살토록 지시했다고 한다. 그 후 16 ~17세기 프로테스탄트의 논쟁재료가 됐었던 여교황 요안나 사건은 1647년 캘빈파의 D. 브로델에 의해 공식적으로 사실이 아닌 걸로 판명되었다. 그러나 교황연대기를 얘기할 때면 그 진위를 놓고 아직도 논란이 뒤따르고 있다. 공식적인 교황연대표에 의하면 교황 성 레오 4세는 제103대 교황으로서 847년부터 855년까지 재위에 있었고, 그다음 교황인 제104대 교황은 베네딕토 3세로 되어 있으며, 855년에서 858년까지 재위에 있었던 것으로 되어있다. 기록상으로는 요안나 여교황이 끼어들 빈틈이 존재하지 않는다. 훗날 누군가가 교황의 연대기를 정밀하게 짜깁기를 해서 맞추어 놓았는지는 모르겠다.
여교황에 대한 영화도 제작되었다. 1972년 영국에서 마이클 앤더슨 감독이 존 브라일리 작가의 극본을 가지고 130분 물 <교황이 될 그녀(She who would be Pope)>를 제작했다. 조안나 역에는 Liv Ullmann, 조안나의 애인인 아드리안 역에는 Maximilian Schell이 연기했다. <교황이 될 그녀>는 정치적으로 폭력적인 시대에 태어난 9세기 설교자의 딸 요안나(리브 울만)의 놀라운 업적을 따라간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요안나는 수녀원으로 피난처를 찾고 수녀원장과 친구가 된다. 또한 그곳에서 그녀는 방문 예술가인 아드리안(막시밀리안 셸)과 처음으로 사랑을 하지만 황제의 아들 루이(프랑코 네로 역)로 인해 실패한다. 수녀원이 Saxons의 공격을 받고, 요안나는 탈출하기 위해 Friar John으로 변장해야 하면서 그녀의 삶은 혼란스러워진다. 황제의 아들 루이와 그의 형제 사이의 피비린내 나는 계승 전쟁으로 인해 제국이 격변하고 있었다. 요안나와 아드리안은 그리스로 가서 수도원으로 피난처를 찾아 여전히 남자로 변장한 채 하느님께 헌신한다. 요안나의 신앙심에 대한 소문이 로마에 전해지고, 그곳에서 교황 레오(트레버 하워드 역)는 믿을 만한 측근이자 비서가 필요하다. 요안나는 곧 바티칸에서 추기경이 되었고, 결국 교황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그러나 이 소식은 자신만의 왕위계승 계획을 갖고 있는 루이를 불쾌하게 만든다. 그는 바티칸을 습격하고, 거기서 몇 년 전 수녀원을 방문했을 때 요안나를 알아본다. 그들의 사랑은 다시 불붙지만 이 재회와 그녀가 벗어날 수 없는 요안나의 비밀은 결국 그녀를 몰락하게 만든다.
다른 한 편의 영화는 독일의 쇤케 보르트만(Sönke Wortmann) 감독이 2009년에 제작한 <교황 조안(Pope Joan : Die Papstin)이다. 요한나 워칼렉이 요안나역을 맡았다. 영화의 내용은 약간 다르다. 샤를마뉴가 죽은 직후, 요안나(Johanna)라는 소녀가 잉겔하임 암 라인(Ingelheim am Rhein)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마을 신부의 딸이다. 요안나는 아버지 몰래 성경을 집중적으로 공부하는 명료한 소녀로 성장한다. 큰 오빠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그들의 아버지는 둘째 아들 요하네스를 도레스타드에 있는 대성당 학교에 보내고 싶어 하지만, 대성당 교사가 잉겔하임에 그들을 방문했을 때 요한나가 성경에 훨씬 해박했다. 아버지의 뜻과는 반대로 요안나는 학교에서 가르침을 받고, 거기서 Homer의 Odyssey와 같은 문학 작품을 탐독한다. 아버지는 그녀에게 교육 기회를 주지 않지만 그녀는 주변의 도움으로 교육을 받게 된다. 특히 Gerold 백작(David Wenham역)은 요안나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서 지원한다. 나중에 Gerold는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얼마 지나지 않아 Gerold는 전쟁에 참여해야 하며, 그의 아내 Richilde는 그 틈을 이용하여 요안나의 결혼을 준비시켜서 남편 Gerold의 애정에 대한 그녀의 라이벌을 제거하려고 한다. 그러나 결혼식 도중 바이킹들이 도시에 침입해 유혈 학살을 자행하고, 요안나는 간신히 살아남는다. 요안나는 남성으로 변장을 하고 마을을 떠나 "요하네스 앵글리쿠스"라는 이름으로 베네딕토회의 풀다 수도원에 들어간다. 수도원에 열병이 퍼지고 요안나가 병에 걸리자, 열이 나기 훨씬 전에 그녀가 여자임을 알아차린 나이 든 승려 덕분에 요안나는 가까스로 신체검사를 피할 수 있게 된다. 그녀는 수도원을 떠나 몇 년 전에 그녀가 도왔던 여성의 아들 Arn(Marian Meder)에 의해 여성으로서 보호를 받는다. Arn은 그녀를 그의 딸 Arnalda의 교사로 만든다. 요안나는 남자로 변장하기로 결심하고 의학 지식을 활용하여 메디쿠스가 되기 위해 로마로 순례를 떠난다. 로마에서 그녀는 약초 요법으로 교황 세르지오 2세의 통풍을 치료함으로써 큰 명성을 얻었다. 교황 Sergius는 그녀를 자신의 주치의로 삼고 결국 Nomenclator로 삼는다. Lothair의 군대가 바티칸을 공격하게 되는데, 이때 군대와 함께 온 제롤드 백작은 요안나를 알아보고, 그녀에 대한 욕망을 드러낸다. 그녀는 남성과 여성의 정체성 사이에서 심한 갈등을 겪는다. 교황권과 황제권 사이의 암투가 벌어지는 와중에 사람들은 환호로 요안나가 교황으로 선출된다. 그녀의 교황 재임 기간 동안 그녀는 여성과 어린이를 돕고, Gerold 백작을 교황 군대의 수장으로 임명한다. 그러나 그녀는 임신을 하고 그녀의 통치는 심각한 위험에 빠진다. 그녀는 부활절이 끝날 때까지 출산을 미루려 노력하지만, 제롤드 백작은 부활절 행렬 도중 경쟁자 아나스타시우스가 이끄는 공모자들에 의해 살해되고, 그날 요안나는 쓰러져 출산 중 사망한다.
각국의 왕등 중에도 성군이 있고, 암군(暗君) 또는 혼군(昏君)이 있듯이 교황 중에도 이런 경우가 다반사이다. 암군의 1번 타자 교황음 알렉산데르(Alexander) 6세(1431-1503)인데 스페인 발렌시아의 보르자 가문 출신으로 11년간 재임했다. 역사상 가장 타락한 교황으로 본명은 로드리고인데, 교황 칼리스토 3세의 조카여서 20대에 벌써 추기경이 되었다. 어려서부터 방탕하여 12세에 친구를 살해하고, 사생아가 9명이 넘었다. 25살에 발렌시아 대주교가 되자 동네의 과부와 두 딸을 농락하고, 과부가 죽자 큰 딸은 수녀원에 보내고 어린 딸을 데리고 살았다. 나중에 로마로 전근해서 18세의 소녀 로사를 내연녀로 만들어 베니스에 숨겨 놓고 20년간 밀애를 하면서 자식을 4명 낳았다. 교황 이노센트 8세(1484~1492)가 죽자, 그는 돈을 뿌려서 표를 모았으나 한 표가 부족했다. 그때 베니스의 한 성직자에게 돈을 주고 표를 구걸하니 그의 딸 루크레치아 보르지아와 하룻밤을 보내게 해 주면 표를 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딸을 성 노리개로 빌려주고 교황에 선출된 것이다. 교황이 된 후 로사와의 사이에 난 아들을 발렌시아 대주교로 임명하고, 둘째를 추기경으로 임명했다. 살인범들에게 돈을 받고 면책해 주고, 성직과 성물(聖物)을 비싼 값에 팔아서 선거 때 들어간 돈의 몇 배로 회수했다. 그는 정력이 절륜해서 15세의 소녀를 납치하여 하룻밤에 11번의 관계를 맺자 그 소녀가 결국 죽게 되었다. 그는 그 소녀의 장례식에 가서 명복을 빌었단다. 예쁜 소녀 귤리아 오빠 알렉산드로가 위조죄로 잡혀오자, 여동생을 바치는 조건으로 죄를 사해 주고 도리어 나중에 추기경으로 임했다. 이 친구가 나중에 교황 바오로 3세가 된다. 아무튼 알렉산데르 6세의 끝 모를 음란(淫亂), 퇴폐(頹廢)는 필설(筆舌)로 모자랄 지경이다. 특히 1501년 10월 30일에 거행한 난교파티는 일명 알밤연회라고도 한다. 당시 교황 의전장관이던 요한 부르카주교가 적은 기록을 대충 이렇다. <10월 30일 바티칸 궁전에서 연회가 열렸는데, 로마에서 가장 음란한 창부 50명을 선발해 연회에 초대했다. 그녀들은 나체 상태로 손에 양초를 들고 알밤 줍기 놀이를 벌였다. 교황, 체자레(교황아들), 루크레지아(교황딸)도 같이 참석하여 이 모습을 보고 박장대소하다. 포도주에 취해 음탕한 분위기가 무르익자 참석한 남녀들이 뒤엉켜 난교(亂交)가 벌어졌다. 그러다가 누가 더 많은 여인들과 성교를 하는지 섹스 콘테스트도 벌였다. 가장 많은 창녀와 상대한 남성에게 시상도 했다. 흥분한 교황딸 루크레지아가 옷을 벗고 동참했다. 교황 아들 체자레도 나체가 돼 참석하여 여동생 루크레지아와 살을 섞었다.> 완전 콩가루 집안인 것이다. 교황의 아들 딸이 아비 보는 앞에서 근친상간을 한 것이다. 교황을 포함한 아들 딸 등 모든 식구들의 음행이 너무나 유명해서 알레산더 뒤마, 빅톨 위고 등은 이 가정을 소재로 소설, 희곡을 쓰기도 했다. 1955년에 크리스티앙 자끄 감독의 <보르지아가의 독약>이라는 이태리 영화가 제작되어 체자레와 루크레치아의 삶을 조명하기도 했다. 아들 체자레는 야망과 욕망이 아비보다 더 커서 아바 찬스를 이용해서 이태리를 통째로 집어삼키려는 야망을 키우기도 했다. 자기 남동생과 매제도 살해하는 등 자기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잔인하고 냉혹해서, 마키아벨리(Machiavelli)는 그를 모델로 <군주론>을 지었다. 알렉산데르 6세는 개인 사생활은 난잡하기 이를 데 없지만 정치적 외교적 수완은 뛰어나서 국제적 분쟁의 조정과 이태리 내에서 자기 가문의 영향력을 넓히는 데는 큰 업적을 세웠다.
존 줄리어스 노리치가 쓴 <교황 연대기>에 따르면 방탕한 교황 요한 12세는 당시 로마에서 영향력이 가장 큰 알베리쿠스 2세의 아들로 아빠 찬스로 18세에 교황이 되었다. 그는 로마의 기혼녀들과 공개적으로 간통을 저지르며 살았고, 세인트 존 라테라노 성당을 매춘의 훈련장과 창녀촌으로 만들었다. 그는 신성 모독, 성직 매매, 위증, 살인, 간통, 근친상간의 죄목으로 고소당하기도 했다. 그는 결국 자신이 강간한 기혼 여성의 남편에게 맞아 후유증과 로마 밖에서 음란한 성적 만남을 하다가 중풍으로 4 일만에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또 교황 요한 8세는 교황청을 사창굴로 만든 장본인이다. 지칠 줄 모르는 성욕으로 언제나 미모의 젊은 여자들을 바꿔가며 상대했고, 교회에 속한 땅과 재산을 좋아하는 여자들에게 주어 탕진했다. 또 그는 무장한 갱단을 동원하여 선한 시민들을 위협하고 도박의 행운을 위해 더러운 귀신들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하였다. 레오 8세는 간음 중에 중풍으로 죽었고, 겨우 20세도 안 된(일설에는 10~11세) 나이에 교황이 된 베네딕트 9세는 나중에 권력을 휘두르며 성적으로 방탕한 생활을 일삼았다. 남색(男色)도 즐겼으며 교황궁인 라테라노 궁전에서 주지육림을 벌였다. 대립교황 발다사레 코사(요한 23세)는 피사 공의회에서 자신의 악명 높은 근친상간, 간통, 부정, 살인, 무신론을 고백했다. 교황 보니파시오 9세가 젊은 날 추기경으로 승진되어 볼로냐 지방으로 옮기게 되었을 때, 그곳에서 수천 명의 처녀와 미망인들과 많은 수녀들이 그의 짐승 같은 정욕의 희생물이 되었다.
사실 교황이란 초기 예수에 의해 베드로가 초대 교황으로 된 이래 2,000년이 넘도록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길게 존재해 온 군주제이다. 교황은 초기 로마시대에는 대부분 순교했기 때문에 성인(聖人 : Saint)의 칭호를 받았다. 다시 말해서 제1대 성 베드로부터 제33대 성 실베스테르(314-335) 까지는 순교자이기 때문에 무조건 성인이고, 그 후부터 제54대 펠릭스 4세(526-530) 까지는 모두 성인으로 시성 되었는데 다만 50대 아나스타시오 2세만이 시성 되지 않았다. 그 이후에는 개인의 신앙생활, 행실, 신앙 고백 등에 따라 교황청이 공식적으로 시복이나 시성 절차를 거쳐 성인(聖人)과 복자(福者)의 칭호를 부여한다. 그래서 현재 266대 프란치스코 교황까지 성인 칭호를 받은 사람이 32명, 복자 칭호를 받은 사람이 6명이다. 성인 칭호를 받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로만 가톨릭교의 성직자는 독신으로 순결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단호하게 선언하였다. 그러나 가톨릭교계가 항상 결혼에 엄격했었던 것은 아니었다. 금혼 규칙이 여러 번 파기되기도 하였다. 사실 가톨릭 교회 초대 교황이라고 추대하는 예수의 제자 성 베드로도 결혼한 사람이었다. 4세기까지는 가톨릭 성직자들의 결혼이 금지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교황으로 임명되기 전에 이미 공식적으로 결혼을 했던 몇몇 교황도 있었는데, 그런 인물 중 클레멘트 4세(제위 1265-1268)에게는 2명의 딸도 있었다. 중세의 암흑기에는 많은 성직자들이 결혼했는데, 11세기와 12세기에는 단속이 강화되어 결혼한 성직자는 집에서 나와야 했고 그들의 아내와 아이들은 교회로부터 멸시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본성을 틀어막는 결혼 금지령이 제대로 효력을 발휘하진 못했는데, 사생아를 뜻하는 중세 독일어 Pfaffienkind가 다른 뜻으로 성직자의 아들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다.
역사적으로 프랑스혁명 이후 1791년 프랑스 헌법은 성직자들의 결혼을 허용했고, 그에 따라 수많은 성직자들이 그 혜택을 입었다. 그 후 나폴레옹과 교황 피우스 7세 사이에 맺은 협약에서는 그들에게 결혼한 평신도로서 교회에 남을 것인지, 아니면 독신으로 성직을 회복할 것인지를 택하는 선택권을 주었다. 2,000명의 성직자가 결혼을 선택했는데, 당시 외무부 장관이었던 톨리란드는 이 같은 특별사면을 거절하고 주교직을 고수했다. 통계에 따르면 해마다 전체 가톨릭교 성직자의 1%인 약 4,000명의 성직자가 성직을 떠나는데, 그들 대부분이 결혼을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 성직자로서 일생에 여자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나이가 있었다. 1938년에 82세로 죽은 그리스의 수도승 마하일로 톨로토스는 일생동안 여자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낳자마자 돌아가셨으며, 어린 그는 그다음 날 에토스 산꼭대기에 있는 수도원으로 보내진 후 세상에서 완전히 격리되어 수도승들과 함께 일생을 살았다. 당시는 9세기부터 내려온 관습에 의하여 여자와 동물의 암컷들마저 살아있는 채로 수도원에 들어가는 것을 금지하였으므로, 그는 아마도 이 세상에서 여자에게 단 한 번의 눈길도 주지 않은 유일한 남자일 것이다.
성직자와 성생활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은 정확한 해답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바티칸에서 열린 세계주교대의원희의에서 호주 출신 론 피롤라와 마비스 피롤라 부부를 초청하여 성생활의 즐거움에 관한 강의를 들었다. 이 부부는 교황과 200명의 고위 성직자들 앞에서 결혼 생활을 안전하게 이끌게 해 준 비결은 성적 성찬이며 이는 성관계 때 충실하게 즐기는 것이 기본이라고 강의를 했다. 영국 작가 나이젤 코손(Nigel Cawthorne)이 지은 <교황들의 성생활(Sex Lives of the Popes)>이란 책에 고대 로마시대부터 나폴레옹시대까지 1,500년간 세속의 때가 묻지 않은 교황은 거의 없다고 설파했다. 성적으로 문란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교황들의 리스트를 보면 아래와 같다.
<합법적으로 결혼한 교황>
제1대 성 베드로 : 아내가 있었고, 딸도 있었음.
제48대 펠릭스 3세 : 교황으로 선출되기 전에 부인 사별했고, 그의 딸은 나중에 제64대 교황 그레고리 1세의 어머니임.
제52대 성 호르미스다스 : 성직을 받기 전에 사별하였고, 그의 아들이 제58대 교황 성 실베리우스임.
제106대 하드리아노 2세 : 아내 스테파니아와 성직을 받기 전에 결혼하여 교황이 된 후에도 딸과 같이 라테라노 궁정에서 거주함.
제140대 요한 17세 : 교황이 되기 전에 결혼하였고, 자녀는 모두 성직자임.
제183대 클레멘스 4세 : 성직을 받기 전에 결혼하였고, 두 딸은 모두 수녀원 들어감.
제190대 호노리우스 4세 : 성직자가 되기 전에 사별, 자식은 미상.
<성직 이전에 사생아 출생>
제210대 비오 2세 : 미혼으로 성직자 이전에 두 여자에게서 사생아 한 명씩 출생하였으나 사망.
제213대 이노센트 8세 : 미혼으로 성직 이전에 사생아 남매, 아들은 메디치가에 장가 들어서 그 후 제217대 교황 레오 10세가 됨.
제219대 클레멘스 7세 : 미혼으로 노예 소녀와 관계.
<성직 후에 사생아 출생>
제216대 율리우스 2세 : 미혼으로 사생아 딸 3명 있고 남색을 즐겼다고 함.
제220대 바오로 3세 : 미혼으로 실비아 루피니와 3남 1녀의 사생아를 둠.
제224대 비오 4세 : 미혼으로 1남 2녀의 사생아를 둠.
제226대 그레고리오 13세 : 미혼으로 마달렌나와 아들. 그를 산탄젤로 성의 총독으로 임명.
제252대 레오 12세 : 미혼으로 스위스 근위대의 아내와 불륜, 독일서 3명의 사생아 출생.
<교황재임 기간 중 성적 방탕>
제119대 세르지오 3세 : 미혼으로 테오도라와 투스쿨룸 백작 테오필락트 1세의 15세 딸인 마로지아가 교황의 사생아라는 주장
제122대 요한 10세 : 미혼으로 Theodora와 그녀의 딸 Marozia와 낭만적인 관계
제130대 요한 12세 : 미혼으로 간통과 근친상간으로 고발됨. Rainier의 과부와 그의 아버지의 첩 스테파나와 음행. 안나와 그의 조카딸과 함께 신성한 궁전을 매음굴로 만듦. 간음하다가 질투심 많은 남편에게 살해.
제214대 알렉산데르 6세 : 상기 내용 참조.
제211대 바오로 2세 : 미혼으로 남색을 하다가 사망.
제212대 식스투스 6세 : 소년과 남색을 즐김. 성직을 매매함.
제217대 레오 10세 : 동성애로 기소됨.
제221대 율리우스 3세 : 동성애
제145대, 제147대, 제150대 베네딕토 9세 : 교황은 3번 역임. 미혼으로 간음과 간강으로 고발당함. 나중에 결혼을 위해 사임.
[나이젤 코손(Nigel Cawthorne)의 <교황들의 성생활(Sex Lives of the Popes)> 내용]
제163대 호노리우스 2세 : 늙어 성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할 때까지 외경스러울 만큼 정력이 강했다. 그는 여자가 옆에만 있으면 성직자이기를 단념하고 미소년처럼 행동했다. 그는 자신의 성기능이 떨어지자 포고령을 내려 정력을 신에게 바치라며 모든 사람들에게 반강제적으로 순결을 강요했다.
제40대 이노센트 1세 : 묘령의 미소녀를 탐미했다.
제44대 식스투스 3세 : 성숙한 수녀들에게 휩싸여 정력을 낭비했다.
제130대 요한 12세 : 베드로성당에 유곽을 차려 운영하면서 많은 정부를 거느렸는데 그중 한 여인이 남편에게 발각돼 살해될 때까지 환락에 빠져있었다.
제211대 바오로 2세 : 심한 고뇌에 시달릴 때 나체의 남자를 보면서 심신을 달랜 동성연애자로서 창남(娼男)과 섹스를 즐기다 상대와 함께 얽힌 채 급사했다.
제254대 그레고리 16세 : 이발사의 아내를 자신의 침실 옆방에 재우며 관계를 가졌는데 그가 얻은 7자녀 중 막내는 이 여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났을 것으로 추측된다.
제143대 베네딕트 8세 : 수녀들과의 사이에 많은 자녀를 두었고 나이 어린 조카딸과도 동침했다.
제213대 이노센트 8세 : 16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부인과의 사이에서 난 8명의 딸을 건드렸다.
제221대 율리우스3세 : 두 아들과 관계를 맺었다. 그는 그 대가로 15세 된 아들을 추기경에 임명하기도 했다.
<남녀관계를 터부시 한 교황>
제193대 보나파시오 8세 :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고 신에 대한 순종의 표시로 당나귀를 탔다. 그는 추기경들에게 그들의 많은 첩들을 수도원에 보내고 순결하게 살도록 명령했다.
제176대 이노센트 3세 : 당시 이단으로 지목되던 순결파 순회설교자들이 철저한 금욕을 요구하는데 노여움을 참을 수 없었다. 그는 벌겋게 달아오른 쇠막대 위에 죽을 때까지 앉혀놓는 형벌을 고안, 윤리문제를 설파하는 이들에게 이 형벌을 가했다.
제64대 그레고리오 1세 : 순결을 특별히 중요하게 여겨 자위행위까지 육체에 반해 행하는 죄악이라고 보았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몽정했을 경우 7일간 단식하며 회개했고, 자위행위를 했을 경우의 단식 형벌은 20일로 규정했다. 또 여성과 성관계를 가진 것으로 밝혀졌을 경우에는 물과 빵만으로 2년 동안 목숨을 연명하게 했고, 처녀를 욕보인 사람은 3년간 단식해야 했다. 특히 당시 만연했던 성직자의 축첩과 관련해서는 거세 위협을 가했다. 그러나 동성연애의 경우 상대적으로 죄 값이 가벼웠고 성직자들도 쿨라기움이라 불리는 일종의 섹스 세금만 내면 자유로이 성생활을 할 수 있는 뒷문이 열려있기도 했다.(금삿갓 운사芸史 금동수琴東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