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도 옛적을 추억하여 지은 것이다. 기수궁에 들어가니 백옥루는 동서로 기울어 있고 빙 둘러있는 분칠의 담장 안은 텅 비어있다. 첩첩 쌓인 사방의 푸른 산은 안으로 옛 궁전을 둘러싸고 있을 뿐이다. 누대는 무너진 흙다리 같이 황폐해졌고, 당시 놀고 즐기던 무제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다시 오지 않고, 노래하고 춤추던 붉은 소매의 가인들도 또한 어디로 가버렸는지 알 수 없으니, 궁정 뜰엔 들 꽃만 절로 피어 펄펄 나는 호랑나비꽃에 날아들어 다만 절로 봄바람을 맞아 다스릴 뿐이로다. 위 두 구절은 궁전이 기울고 청산이 둘러싸고 있다는 말을 하였고, 아래 두 구절은 황제도 오지 않고 가인도 다 없어지고 다만 꽃과 나비 봄바람이 있을 뿐이라는 말을 하였다.
* 王建(왕건) : 당나라 영천(穎川) 사람. 자는 중초(仲初)다. 집안이 영락하여 어린 나이에 위주(魏州)에서 살았다. 헌종(憲宗) 원화(元和) 때 처음으로 벼슬하여 소응현승(昭應縣丞)이 되었다. 태부시승(太府寺丞)과 태상시승(太常寺丞), 비서승(秘書丞)을 역임했다. 代宗(대종) 大曆年間(대력연간, 766~779)에 渭南尉(위남위), 문종(文宗) 대화(大和) 연간에 섬주사마(陜州司馬)로 나가 왕사마(王司馬)로도 불린다. 만년에 벼슬을 버리고 함양(咸陽)에 은거했다. 일생을 한직(閑職)에서 불우하게 지냈다. 악부시(樂府詩)에 능해 장적(張籍)과 이름을 나란히 해서 ‘장왕악부(張王樂府)’라 불렸다. 하층 민중들의 생활상을 시로 노래했다. 특히 궁사(宮詞) 100 수가 있어 인구에 널리 회자되었다. 문집에 『왕사마집(王司馬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