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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與歌者何戡(여가자하감) / 가인 하감과 함께

금삿갓의 漢詩工夫(241002)

by 금삿갓

與歌者何戡(여가자하감) / 가인 하감과 함께

- 柳禹錫(유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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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餘年別帝京

이십여년별제경

●●○○●●◎

스무 남은 해 동안 서울을 떠났다가


重聞天樂不勝情

중문천악불승정

○○○●●○◎

궁중음악 거듭 들으니 정회가 북받치네.


舊人惟有何戡在

구인유유하감재

●○○●○○●

옛사람 중에 오직 하감이 남아 있어


更與殷勤唱渭城

갱여은근창위성

●●○○●●◎

다시 함께 은근히 위성곡을 불러본다.

* 歌者(가자) : 노래 부르는 사람, 즉 소리꾼, 가수(歌手)를 뜻한다.

* 何戡(하감) : 당(唐) 나라 때의 궁정(宮廷) 악공(樂工)을 가리킨다.

* 帝京(제경) : 황제가 있는 제국(帝國)의 수도(首都)로 장안(長安)을 가리킨다.

* 重聞(중문) : 거듭해서 들음, 다시 들음의 뜻이다.

* 天樂(천악) : 천자의 음악, 하늘의 음악, 곧 궁중의 음악을 뜻한다.

* 不勝(불승) : 감당하여 견뎌내지 못하는 의미.

* 舊人(구인) : 오래전 사람, 낯익은 사람을 뜻한다. 친구.

* 殷勤(은근) : 은근(慇懃)과 같은 뜻으로 쓰였다.

* 渭城(위성) : 위성곡. 친구가 사신(使臣)으로 안서지방(安西地方)으로 떠나는 것이 아쉬워서 교통요지인 위성(渭城)에서 하룻밤 객사에서 묵고 나서 이별하는 광경을 읊은 왕유王維의 <송원이사안서(送元二使安西)>라는 시(詩)를 가리킨다. 이 시는 당나라 사람들이 이별할 때 창법으로 노래했다는 고금(古今)을 통해 이별을 노래한 가장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는다. 그래서 이 시를 위성곡(渭城曲) 또는 양관곡(陽關曲)이라 하며, 이별할 때 세 번 노래한다고 하여 위성삼첩(渭城三疊) 또는 양관삼첩(陽關三疊)이라고도 불린다.

此(차)는 歌者(가자)를 作詩以與之(작시이여지)라. 言我一別帝京(언아일별제경)이 于今二十餘年矣(우금이십여년의)러니. 今日(금일)에 聞天上之舊歌(문천상지구가)하니, 不勝感傷之情而到今思之(불승감상지정이도금사지)컨대, 舊人(구인)이 惟有何戡(유유하감)하야. 與之唱渭城(여지창위성)하니, 更切慇懃也(갱절은근야)라. 上二句(상2구)는 寓之以自歎之詞也(우지이자탄지사야)요. 下二句(하2구)는 言惟有舊人之何戡也(언유유구인지하감야)라.

이는 가수와 노래를 부르며 함께 작시한 것이다. 말인즉 내가 서울에서 한번 이별하고, 이제 20여 년이 되어 오늘 궁중의 옛 노래를 들으니 슬픈 감정을 이기지 못하였다. 이제 생각해 보니 옛사람은 오직 하감만 남이 있어, 그와 더불어 위성을 노래하니 더욱 간절하고, 은근하였다는 말이다. 위 두 구절은 객지생활을 스스로 탄식한 말이고, 아래 두 구절은 오직 옛사람은 하감만이 남아있음을 말했다.

<유우석이 왕숙문(王叔文) 등과 정치개혁을 기도하다 낭주(朗州:湖南省) 사마(司馬)로 좌천되는 등 20여 년간 서울 장안(長安)을 떠나 있다가 돌아와 대궐 안에서만 활동하는 궁정 악공인 하감을 다시 만난 기쁨을 읊었다. 궁중 음악을 오랫동안 듣지 못하다가 이제 다시 들으니 옛 생각을 잊지 못하겠는데, 자신에게 정성스레 그 유명한 왕유(王維)의 <위성곡(渭城曲:送元二使安西)>을 들려주니, 더욱 감개무량하다는 것이다. 서울로 돌아온 기쁨과 하감을 만난 정겨움 그리고 연주를 다시 듣는 즐거움 등이 얽혀 있는 시이다.>

* 劉禹錫(유우석, 772~842) : 당나라 중기 낙양인(洛陽人)으로 자(字)가 몽득(夢得)이다. 덕종(德宗) 정원(貞元) 초(785)에 진사로 정계에 진출한 후, 795년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에 급제하여 회남절도사 두우(杜佑, 735~812)의 막료가 되었으며, 감찰어사(監察御史)가 된 후에는 왕숙문(王叔文, 758~806) · 유종원 등과 함께 환관과 권문세족들의 잘못된 권력을 쇄신하는 정치개혁을 시도하였다. 왕숙문은 덕종 때 왕비(王 )와 더불어 태자의 독서를 맡은 동궁시독(東宮侍讀)을 지냈다가, 태자가 순종(順宗)에 즉위하자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었다. 순종의 신임을 받은 왕숙문은 위집의(韋執誼)를 재상으로 추천하였으며, 또한 유우석과 유종원 등을 조정의 대신으로 기용해 개혁정치를 펼쳤다. 왕숙문이 어머님의 병환으로 물러난 지 146일 만에 환관 구문진(俱文珍)이 순종을 퇴위시키고 헌종(憲宗)을 옹립하면서 왕숙문은 투주사호참군(渝州司戶參軍)으로 쫓겨난 뒤 다음 해 피살되었다. 그 결과 유우석과 유종원도 헌종 영정(永貞) 원년(805)에 지방으로 쫓겨났다. 유종원은 영주(永州, 호남 영릉)로, 유우석은 낭주(朗州, 호남 상덕)로 좌천되었다. 유우석이 좌천되었을 때, 지방 관원은 그가 못마땅하여 숙소를 세 번이나 옮겼는데, 세 번째 옮긴 숙소는 딸랑 침대 하나만 놓여 있었다고 한다. 그럴 때 그는 이렇게 <누실명(陋室銘)>을 읊었다. “산이 높지 않아도, 신선이 살면 이름난 산이요. 물은 깊지 않아도, 용이 살면 영험한 물이지. 이곳은 누추한 방이나, 오직 나의 덕으로도 향기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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