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花萼樓(화악루) : 당(唐) 나라의 유명한 황실 누각인데, 꽃받침처럼 생겨서 붙은 이름이다. 원래 이름은 화악상휘루(花萼相辉楼)인데 줄여서 화악루라 한다. 당 현종(玄宗) 때 건축했다. 중국의 사대명루(四大名樓) 즉, 강서성의 등왕각(滕王閣), 후베이성의 황학루(黃鶴樓), 후난성의 악양루(岳陽樓), 산시성의 관작루(鸛雀樓)를 합하여 '천하 5대 명루'라고 한다. 위치는 제국의 수도인 장안황궁에 위치하고 있으며, 장안성 내의 대형 오락 활동의 문화 예술 중심지이자, 성당의 천자인 현종이 만민동락, 교류동락으로 '천하제일등루'라는 명성을 누리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후당이 유명한 건물은 모두 파괴되었고, 그 후 '천하제일의 건물'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 역시 옛날을 생각하는 노래다. 옛적에 수나라 전성 시 버드나무를 화악루에 처음 심었을 적에 누상의 미인이 그 허리와 사지의 가는 것으로 버들가지의 가는 것과 서로 다투어 비교하였는데, 지금은 장안의 거리에 버드나무가 노쇠하여 버려지고, 잎이 이슬에 젖어 완연히 우는 것 같으니, 누구를 위하여 한탄하는가? 옛사람의 한하는 것은 보이지 않고, 초목을 오히려 사람들이 사랑하게 된 것이다. 위 두 구절은 그 당시 버드나무를 심었던 때를 말하였고, 아래 두 구절은 버드나무가 버려져 잎의 이슬이 원망하여 운다는 말을 하였다.
* 劉禹錫(유우석, 772~842) : 당나라 중기 낙양인(洛陽人)으로 자(字)가 몽득(夢得)이다. 덕종(德宗) 정원(貞元) 초(785)에 진사로 정계에 진출한 후, 795년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에 급제하여 회남절도사 두우(杜佑, 735~812)의 막료가 되었으며, 감찰어사(監察御史)가 된 후에는 왕숙문(王叔文, 758~806) · 유종원 등과 함께 환관과 권문세족들의 잘못된 권력을 쇄신하는 정치개혁을 시도하였다. 왕숙문은 덕종 때 왕비(王 )와 더불어 태자의 독서를 맡은 동궁시독(東宮侍讀)을 지냈다가, 태자가 순종(順宗)에 즉위하자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었다. 순종의 신임을 받은 왕숙문은 위집의(韋執誼)를 재상으로 추천하였으며, 또한 유우석과 유종원 등을 조정의 대신으로 기용해 개혁정치를 펼쳤다. 왕숙문이 어머님의 병환으로 물러난 지 146일 만에 환관 구문진(俱文珍)이 순종을 퇴위시키고 헌종(憲宗)을 옹립하면서 왕숙문은 투주사호참군(渝州司戶參軍)으로 쫓겨난 뒤 다음 해 피살되었다. 그 결과 유우석과 유종원도 헌종 영정(永貞) 원년(805)에 지방으로 쫓겨났다. 유종원은 영주(永州, 호남 영릉)로, 유우석은 낭주(朗州, 호남 상덕)로 좌천되었다. 유우석이 좌천되었을 때, 지방 관원은 그가 못마땅하여 숙소를 세 번이나 옮겼는데, 세 번째 옮긴 숙소는 딸랑 침대 하나만 놓여 있었다고 한다. 그럴 때 그는 이렇게 <누실명(陋室銘)>을 읊었다. “산이 높지 않아도, 신선이 살면 이름난 산이요. 물은 깊지 않아도, 용이 살면 영험한 물이지. 이곳은 누추한 방이나, 오직 나의 덕으로도 향기가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