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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 阿嬌怨(아교원) / 아교의 원망

금삿갓의 漢詩工夫(241003)

by 금삿갓

阿嬌怨(아교원) / 아교의 원망

- 柳禹錫(유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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望見葳蕤擧翠華

망견위유거취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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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하게 거동하는 황제의 수레를 바라보며


試開金屋掃庭花

시개금옥소정화

●○○●●○◎

짐짓 궁문을 열고 뜰의 꽃잎을 쓸고 있네.


須臾宮女傳來信

수유궁녀전래신

○○○●○○●

잠시 후에 궁녀가 전해온 소식은


言幸平陽公主家

언행평양공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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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공주 집으로 거동하신다는 말이네.

* 阿嬌(아교) : 한(漢) 무제(武帝)의 비(妃)인 진(陳) 황후의 아명(兒名)

* 葳蕤(위유) : 위(葳 : 초목이 무성한 모양 위, 화려한 모양 위, 둥굴레 위), 蕤(드리워질 유, 꽃장식 유, 꽃술 유). 식물이름으로는 옥죽(玉竹)이다. 화려하고 성대하게 장식된 깃발을 말한다.

* 翠華(취화) : 황제의 행차 때에 의장(儀仗) 깃발로 물총새 깃털(翠羽)을 꼭대기에 꽂아서 사용했다. 곧 황제의 행차 수레를 말한다.

* 試(시) : 시험 삼아 해보다. 짐짓해보다.

* 金屋(금옥) : 금으로 지은 집. 한(漢) 무제(武帝)가 왕자시절에 모후(母后)가 누구에게 장가들 거냐고 물었을 때, “아교(阿嬌)와 결혼해 금으로 만든 금옥(金屋)에 아교(阿嬌)를 숨겨두고 싶다(金屋藏嬌)”고 대답했다 함.

* 須臾(수유) : 잠시, 잠깐.

* 幸(행) : 거동 행(幸), 임금의 행차

* 平陽公主(평양공주) : 원래 왕궁의 공주의 범칭(汎稱)이었으나, 당(唐) 나라 고조(高祖) 이연(李淵)의 딸을 평양공주로 불렀음.

阿嬌(아교)가 望帝之幸故(망제지행고)로. 遠望見葳蕤而知翠華擧處(원망견위유이지취화거처)하고, 遂疑其來幸也(수의기래행야)라. 翠華(취화)는 旗名(기명)이니, 以翠羽爲葆曰葳蕤(이취우위보왈위유)니, 南都賦(남도부)에 望翠華兮葳蕤(망취화혜위유)라. 望見葳蕤將近(망견위유장근)하고, 試去開殿(시거개전)하고, 掃花(소화)하야. 以迎帝駕(이영제가)하니, 恐其卽來(공기즉래)오. 又恐其不來故(우공기불래고)로 用試字(용시자)하니, 言試開屋(언시개옥)하고, 試掃一掃(시소일소)하야. 看是如何動靜(간시여하동정)이라.

아교가 황제의 행차를 바랐기 때문에 멀리서 성대한 위용을 바라보고 황제의 거동을 알고는 마침내 그에게 오시는가 의심한 것이다. 취화는 깃발의 명칭으로 비취의 깃털로 더부룩하게 만든 것을 위유라고 말하니 <남도부>에 ‘취화를 바라봄이여 위유로다’라고 하였다. 위유가 장차 가까워지는 것을 바라보고는 시험 삼아 궁전을 열고, 꽃을 쓸어 황제의 수례를 맞으려 하였으니, 그가 오는 것도 걱정이 되고, 또 그가 오지 않는 것도 걱정이 되므로 시(試) 자를 쓴 것이다. 시험 삼아 문을 열고, 시험 삼아 소제를 하여 동정의 여하를 살펴봤다는 말이다.

須臾(수유)는 不多時也(부다시야)라. 殿纔開花初掃(전재개화초소)라. 傳來信(전래신)은 宮中打探者(궁중타탐자)가 遞傳信息而來(체전신식이래)라. 言(언)은 言之可慨(언지가개)니, 有不忍言而又不敢不言之意(유불인언이우불감불언지의)라. 武帝之寵衛子夫也(무제지총자부야)에. 子夫(자부)는 由平陽公主所進則是平陽公主(유평양공주소진즉시평양공주)는 阿嬌(아교)에 所最嫉者(소최질자)라. 今帝不來幸(금제불래행)은 尙可言也상가언야)어니와 偏幸平陽公主家(편행평양공주가)는 不可言矣(불가언의)라. 篇中(편중)에 不言怨而字字(불신원이자자)가 怨入骨髓(원입골수)라.

‘수유’는 많은 시간이 아니다. 전각을 겨우 열고 꽃을 처음 쓸 적에 ‘전래신(傳來信)’은 궁중의 망보는 자가 소식을 전해온 것이다. ‘언(言)’은 탄식할 만한 말이니, 차마 말하지도 못하고 또 감히 말하지 않을 수도 없는 점이 있다는 뜻이다. 무제가 위자부를 총애함에 자부는 평양공주가 있는 곳으로 말미암아 나아가니 평양공주는 아교가 가장 질투하는 자이다. 지금 황제가 행차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말할 수 있지만, 평양공주 집을 편애하는 것은 말할 수 없다. 원망의 말은 안 했지만 글자마다 원망의 뜻이 골수에까지 들어있다.

* 打探(타탐) : 1. 알아보다. 2. 물어보다.

* 劉禹錫(유우석, 772~842) : 당나라 중기 낙양인(洛陽人)으로 자(字)가 몽득(夢得)이다. 덕종(德宗) 정원(貞元) 초(785)에 진사로 정계에 진출한 후, 795년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에 급제하여 회남절도사 두우(杜佑, 735~812)의 막료가 되었으며, 감찰어사(監察御史)가 된 후에는 왕숙문(王叔文, 758~806) · 유종원 등과 함께 환관과 권문세족들의 잘못된 권력을 쇄신하는 정치개혁을 시도하였다. 왕숙문은 덕종 때 왕비(王 )와 더불어 태자의 독서를 맡은 동궁시독(東宮侍讀)을 지냈다가, 태자가 순종(順宗)에 즉위하자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었다. 순종의 신임을 받은 왕숙문은 위집의(韋執誼)를 재상으로 추천하였으며, 또한 유우석과 유종원 등을 조정의 대신으로 기용해 개혁정치를 펼쳤다. 왕숙문이 어머님의 병환으로 물러난 지 146일 만에 환관 구문진(俱文珍)이 순종을 퇴위시키고 헌종(憲宗)을 옹립하면서 왕숙문은 투주사호참군(渝州司戶參軍)으로 쫓겨난 뒤 다음 해 피살되었다. 그 결과 유우석과 유종원도 헌종 영정(永貞) 원년(805)에 지방으로 쫓겨났다. 유종원은 영주(永州, 호남 영릉)로, 유우석은 낭주(朗州, 호남 상덕)로 좌천되었다. 유우석이 좌천되었을 때, 지방 관원은 그가 못마땅하여 숙소를 세 번이나 옮겼는데, 세 번째 옮긴 숙소는 딸랑 침대 하나만 놓여 있었다고 한다. 그럴 때 그는 이렇게 <누실명(陋室銘)>을 읊었다. “산이 높지 않아도, 신선이 살면 이름난 산이요. 물은 깊지 않아도, 용이 살면 영험한 물이지. 이곳은 누추한 방이나, 오직 나의 덕으로도 향기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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