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연나라의 용지다. 갈고는 현종이 특히 좋아하여 내시에게 말하였다. “빨리 화노에게 명하여 갈고를 가져오도록 하여 나를 위하여 더러움을 해소하도록 하라.”혹은 스스로 갈고를 연주한 것이라 한다. 용지에서 잔치를 하여 많은 음악소리가 그치고, 다만 갈고 소리만 있을 뿐이었다. 한밤에 연회를 끝내고 돌아오니, 궁중의 물시계가 아직도 멀었는데, 설왕은 매우 취하여 여전히 정신없고, 수왕은 술에서 이미 깨어났다. 위 2구는 잔치의 즐거움을 말했고 아래 2구는 연회를 끝내고 돌아온 것을 말했다.
* 花奴(화노) : 당 현종 때 여남왕(汝南王) 이진(李璡 : ?~750)의 아명(兒名)이다. 당녕왕(唐甯王)의 맏아들. 활쏘기를 잘하였고, 하지장(賀知章)과 시주(詩酒)로 교유함. 술을 좋아하여 ‘주중팔선인(酒中八仙人)’ 중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진다. 갈고(羯鼓)를 잘 쳤는데, 이른 봄 버드나무, 은행나무에 꽃망울이 막 맺히려고 하는데, 당나라 현종이 잔치를 벌여 이진을 불러 갈고를 연주하게 했는데 한 곡을 마치자 꽃이 이미 활짝 피었다는 고사가 있음
* 李商隱(이상은) : 813년 ~ 858년(추정), 자는 의산(義山)이고, 호는 옥계생(玉溪生), 번남생(樊南生)이다. 허난(河南) 싱양(滎陽) 출신이다. 조부 이보(李俌)는 후베이(湖北)성 징저우(邢州)의 녹사참군(彔事參軍)을 지냈으며, 부친 이사(李嗣)는 중시어사(中侍御史)를 맡았다. 이상은이 태어날 때 부친은 가현령(嘉縣令)으로 임명되었으나 이때부터 가세가 몰락했다. 이상은은 10세에 아버지 이사를 병으로 잃었고, 그와 어머니, 동생들은 허난의 고향으로 돌아왔고, 빈곤하게 생활하며 친척들의 도움에 의존해 살아갔다. 이상은은 장자로서 집안을 지탱하는 책임을 졌다. 25세에 令狐楚(영호초)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進士(진사)가 되고 校書郎(교서랑), 東天節度書記(동천절도서기), 檢校工部郎中(검교공부낭중) 등 높지 않은 벼슬을 역임했다. 영호초의 반대파인 王茂元(왕무원)의 사위가 되어 두 정파 사이를 내왕하여 절조를 비난받기도 했다. 그의 시는 서정적인 작품이 많고 修辭(수사)를 중히 여기어 정밀하고 화려하다고 하며, 典故(전고)를 많이 인용했다. 시를 지을 때는 참고 서적이 자리를 꽉 차지해 물개가 물고기를 늘어놓은 것 같았다고 한다. 당 나라 말기와 五代(오대)를 통하여 그의 시는 크게 유행했다. 溫庭均(온정균)과 함께 ‘溫李’로 불렸으며, 이들의 시파(詩派)를 西崑體詩派(서곤체시파)라 했다. 그는 일생을 불우하게 지냈지만, 杜甫(두보)의 전통을 이은 만당의 대표적 시인으로 높이 평가받으며 저서에 ‘義山詩集(의산시집 6권)’과 ‘西崑唱酬集(서곤창수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