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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 瑤池(요지)

금삿갓의 漢詩工夫(241004)

by 금삿갓

瑤池(요지)

- 李商隱(이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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瑤池阿母綺牕開

요지아모기창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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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지(瑤池)의 서왕모(西王母) 비단 창문을 여니


黃竹歌聲動地哀

황죽가성동지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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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죽가(黃竹歌) 소리만 천지를 슬프게 울리네.


八駿日行三萬里

팔준일행삼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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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준마(八駿馬)는 하루에 삼만 리를 간다던데


穆王何事不重來

목왕하사부중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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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왕(穆王)은 무슨 일로 다시 오지 않는가.

* 瑤池(요지) : 전설 속의 선경(仙境)으로 서왕모(西王母)가 사는 곳으로 전한다. 중국 곤륜산(崑崙山)에 있고, 주(周)나라 목왕(穆王)이 서왕모(西王母)를 만났다는 곳이다. 곤륜산 정상에는 요지(瑤池)란 연못이 있어 밤에 천상에서 신선들이 용이나 기린, 또는 봉황을 타고 내려온다.

* 阿母(아모) : 서왕모를 지칭한다. 서왕모(西王母)는 중국 신화에 나오는 여신이며, 곤륜산에 산다고 한다. 성은 양(楊), 이름은 회(回)였다고 한다. 《목천자전(穆天子傳)》에 주(周) 목왕이 서쪽으로 가서 곤륜산에 이르러 서왕모를 만나 사랑했다고 한다.

* 黃竹歌(황죽가) : 목왕이 불렀다고 전해지는 노래의 명칭이다. ‘황죽’은 목왕이 천하를 순행할 때 머문 지역으로, 《목천자전(穆天子傳)》에 “날씨가 몹시 춥고 북풍이 불고 눈이 내려 얼어 죽는 사람이 있자, 천자가 시삼장(詩三章)을 지어 백성들을 가여워하였다.[일중대한(日中大寒) 북풍우설(北風雨雪) 유동인(有凍人) 천자작시삼장이애민(天子作詩三章以哀民)]”라고 하였다. 노래가 ‘아조황죽(我徂黃竹)’으로 시작하여 ‘황죽가’라고 칭한다.

* 八駿(팔준) : 전설에 목왕이 탔다고 전하는 여덟 필의 준마로서, 하루에 삼만리를 달린다고 한다.

* 穆王(목왕) : ‘穆王(목왕)’은 서주(西周)의 왕으로 성은 희(姬)이고 이름은 만(滿)이며 소왕(昭王)의 아들이다. 신화와 전설 속의 인물로 《穆天子傳(목천자전)》에 천하를 순행한 전설이 전한다. 목왕과 서왕모가 요지에서 만난 뒤 이별할 때, 서왕모가 노래를 불러 죽지 않는다면 다시 찾아줄 것을 바라자 목왕이 답가를 불러 삼 년 뒤에 다시 오겠다고 약속한 고사가 《穆天子傳(목천자전)》에 전한다. 이 고사에 의거하여 목왕이 불로장생하지 못하여 다시 서왕모를 찾아오지 못하였다는 함의를 담은 시구이다.

黃竹(황죽)은 穆天子傳(목천자전)에 天子乃休日中(천자내휴일중)에 大寒(대한)하야. 北風雨雪(북풍우설)에 有凍人(유동인)이어늘, 天子作詩三章以哀之曰(천자작시3장왈) : “我徂黃竹負閟寒(아조황죽부비한)이라”하고, 史要云(사요운) : “穆王(목왕)이 宴瑤池(연요지)에 王母有白雲黃竹謠(왕모유자운황죽요)라”하니라. 上二句(상2구)는 言綺窓開而黃竹歌也(언기창개이황죽가야)요. 下二句(하2구)는 言日行三萬里之八駿馬有之(언일행삼만리지준마유지)어늘 穆王(목왕)이 不來(불래)하니, 緣何事而然也(연하사이연야)라.

황죽은 목천자전에 천자가 쉬는 날에 크게 추워 북풍과 눈비에 얼어 죽은 사람이 있어, 천자가 시 삼장을 지어 불쌍히 여기는 말을 하되 “내가 황죽에 가니 추위에 닫히니 내 책임이로다.”라 하였고, 사요는 “목왕이 요지의 잔치에 서왕모의 백운황죽노래가 있었다.”라고 하였다. 위 2구는 비단 창을 열고 황죽가를 불렀다는 말을 했고, 아래 2구는 하루 3만 리를 가는 팔준마기 있는데도 목왕이 오지 않으니, 무슨 연고로 그런가 라고 말하였다.

* 李商隱(이상은) : 813년 ~ 858년(추정), 자는 의산(義山)이고, 호는 옥계생(玉溪生), 번남생(樊南生)이다. 허난(河南) 싱양(滎陽) 출신이다. 조부 이보(李俌)는 후베이(湖北)성 징저우(邢州)의 녹사참군(彔事參軍)을 지냈으며, 부친 이사(李嗣)는 중시어사(中侍御史)를 맡았다. 이상은이 태어날 때 부친은 가현령(嘉縣令)으로 임명되었으나 이때부터 가세가 몰락했다. 이상은은 10세에 아버지 이사를 병으로 잃었고, 그와 어머니, 동생들은 허난의 고향으로 돌아왔고, 빈곤하게 생활하며 친척들의 도움에 의존해 살아갔다. 이상은은 장자로서 집안을 지탱하는 책임을 졌다. 25세에 令狐楚(영호초)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進士(진사)가 되고 校書郎(교서랑), 東天節度書記(동천절도서기), 檢校工部郎中(검교공부낭중) 등 높지 않은 벼슬을 역임했다. 영호초의 반대파인 王茂元(왕무원)의 사위가 되어 두 정파 사이를 내왕하여 절조를 비난받기도 했다. 그의 시는 서정적인 작품이 많고 修辭(수사)를 중히 여기어 정밀하고 화려하다고 하며, 典故(전고)를 많이 인용했다. 시를 지을 때는 참고 서적이 자리를 꽉 차지해 물개가 물고기를 늘어놓은 것 같았다고 한다. 당 나라 말기와 五代(오대)를 통하여 그의 시는 크게 유행했다. 溫庭均(온정균)과 함께 ‘溫李’로 불리웠으며, 이들의 시파를 西崑體詩派(서곤체 시파)라 했다. 그는 일생을 불우하게 지냈지만, 杜甫(두보)의 전통을 이은 만당의 대표적 시인으로 높이 평가받으며 저서에 ‘義山詩集(의산시집 6권)’과 ‘西崑唱酬集(서곤창수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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