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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꿈속 사랑 이야기

정약용의 숨겨둔 여인

by 금삿갓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을 사랑하는 죄이라서...” 손석우 씨가 작사하고 가수 현인 선생이 부른 <꿈속의 사랑> 노래 가사이다. 이 노래는 원래 중국의 영화 <薔薇處處開(장미처처개)>의 음악인 <夢中人(몽중인)>으로 중국 작곡가 진가행(陳歌幸)의 작곡이다. 이루지 못할 사랑 이야기는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조선시대의 위대한 저술가요 대학자인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선생도 이룰 수 없는 사랑이야기며, 현실 같으면서도 꿈같은 애틋한 사랑이야기가 전해 온다. 아니 꿈으로 현몽(現夢)한 사랑이야기가 현실에서 잠시나마 이루어졌다가 깨어진다.

다산은 역사 시간에 배웠듯이 천주교에 대한 신유박해(辛酉迫害)를 명분으로 수많은 교인이 죽어 나갈 때, 천주교인이 아니라는 진술로 1801년에 장기로 유배를 가게 된다. 그 후 조카사위 황사영(黃嗣永)의 백서사건으로 인하여 배소(配所)를 강진으로 옮겨갔다. 이곳에서 그는 노론 출신의 현감 이안묵에게 박해를 많이 당했고, 그가 파직당하자 그나마 좀 수월하게 생활했다. 처음에는 주막집의 뒷방에서 4년간 생활했는데, 그는 이 집을 사의재(四宜齋)라 불렀다. 이 집에 딸이 있었는데, 아마 섬마을 선생님 같은 다산을 흠모했을 수 있다. 그러다가 고성사의 보은산방에서도 생활하고, 주변의 양민 자식들을 불러 가르치다 보니 제자들의 집을 전전(轉傳) 하기도 했다. 47세가 되던 1808년에야 윤단(尹慱 1744~1821)이 귤동 만덕산 자락에 지은 초당으로 옮겨 생활한다. 이곳에서 그는 윤단의 아들 윤규로(尹奎魯 1769~1837)의 아들과 조카들을 가르치며, 윤 씨들이 가업으로 조성한 장서(藏書)를 보면서 학문과 저술활동의 꽃을 피운다.

유배 생활이란 것이 가족과 떨어져서 의식주도 최악으로 한두 해도 아니고, 10년을 넘겨 언제 해배(解配)할지도 모른 채 살아가야 하니 의지가 약하거나 건강이 나쁜 사람은 대부분 세상을 뜨는 경우가 많다. 올곧은 선비인 다산이라 하더라도 50대를 바라보는 나이에 처자식과 떨어져 있으니 여인의 보살핌과 사랑이 절절히 그리운 건 사실일 것이다. 어느 겨울날 밤이다. 흰 눈이 온 천지를 다 덮도록 내렸는데, 어두운 밤에 눈을 뚫고 누군가 방문을 두드린다. 이윽고 인기척이 들리면서 향긋한 냄새가 풍기고, 어슴프레 보아도 미색(美色)인 낯선 여인이 방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깜짝 놀란 다산이 등불로 비춰보니 여인이 다소곳이 앉아서 그를 평소에 흠모하여 모시고자 늦은 밤에 이렇게 찾아왔단다. 자다가 홍두깨가 아니고 오랜 객고(客苦)에 이런 횡재가 있을까. 다산의 입장에서는 마음이 동하여 불감청(不堪請) 이언정 고소원(固所願)이라. 얼씨구 쌓인 회포나 풀어보자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거사(擧事)를 막 치르려는데, 갑자기 뒤통수가 번쩍한 것이다. 한양에 두고 온 부인의 서슬 퍼런 눈길과 날카로운 호통이 머릿속을 온통 뒤집어 놓은 것이다. 깜짝 놀라 막 넘으려던 마지노선에서 물러나 여인을 단호하게 내쳤다. 여인은 눈물을 머금으며 깊은 밤 이 눈밭에 이렇게 여인을 내보내는 게 가당키냐 하면서 살며시 일어나 나가버린다. 가슴에 휑하니 바람구멍이 나면서 아쉬움과 미안함이 솟아올라 안절부절못하던 다산이 드디어 방문을 열어 여인을 다시 부른다. 그는 다시 돌아온 여인의 치마폭에 아래의 시를 써주고 이별한다.


雪山深處一枝梅(설산심처일지매) / 눈 깊은 산속의 한 떨기 매화가

爭似緋桃護絳紗(쟁사비도호강사) / 붉은 비단 두른 복사꽃만 하랴만

此心已作金剛鐵(차심이작금강철) / 이 마음은 이미 금강석이 되었으니

縱有風爐奈汝何(종유풍로나여하) / 풍로가 있다한들 너를 어찌하리.

거유(巨儒)의 꿈속 사랑놀음을 읊은 시로서는 물씬한 에로틱(Erotic)이 피어난다. 눈을 뚫고 밤길을 온 시골의 아낙이 어디 한창 춘정(春精)이 오른 춘삼월의 도화(桃花) 같은 명기(名妓)만큼이야 농염(濃艶)하겠는가? 그래도 꽃 없는 계절에 한 떨기 꽃이라도 귀한 것이지. 그런데 어쩌랴? 두고 온 부인의 강한 바가지를 생각하니 온몸에 힘이 빠져서 몸은 이미 녹은 엿가락이 아니라 한겨울 얼은 돌부처가 된 것이다. 그래도 사나이의 자존심이 있다. 보여 준 것이 아니니 말로는 강철 같다고 슬쩍 허풍을 떤다. 이 대목에서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남원 감사에서 도승지로 이임할 때 동기(童妓) 진옥(眞玉)에게 준 <영자미화(詠紫薇花)>란 시가 오버랩 된다. 시는 아래와 같다.


一園春色紫微花(일원춘색자미화) / 봄빛 가득한 남원고을의 자미화여

纔看佳人勝玉釵(재간가인승옥채) / 옥비녀 보다 고운 미인을 겨우 보네.

莫向長安樓上望(막향장안루상망) / 누각에 올라 서울 쪽으로 바라보지 말라.

滿街爭是戀芳花(만가쟁시연방화) / 길 가득히 너의 예쁜 모습 그리며 다툴까 봐.

또 유배지 강계에서 어른이 된 기생 진옥(眞玉)이와 주고받은 수창시조(酬唱詩調)가 어른거린다. 진옥은 원래 송강이 전라감사 시절에 어린 관기였는데, 송강이 머리만 올리고 수청을 받지 않고 시가를 가르치는 등 어여삐 여겼다. 세월이 흘러 그가 강계로 유배를 가자 진옥이 천리길을 달려가 한 많은 세월 동안 그리던 송강을 만나 회포를 푸는 것이다. 처음에 진옥을 못 알아보다가 자초지종을 듣고 너무 반가워 이런 시조를 주고받았다.


옥이 옥이라거늘 번옥(燔玉)으로 여겼더니

이제야 보아하니 진옥(眞玉) 일시 적실(適實)하다.

나에게 살 송곳 있으니 뚫어볼까 하노라.(송강 정철)


철이 철이라거든 섭철(鍱鐵)로 여겼더니

이제야 보아하니 정철(正鐵) 일시 분명하다.

나에게 골풀무 있으니 녹여볼까 하노라.(진옥)

아주 맞장구가 불꽃이 튄다. 아마 그날 밤 그곳에는 골풀무가 다 닳고, 어떤 강철이라도 도가니 속에서 봄 눈 녹듯이 녹아져 흘렀으리라. 진옥은 송강의 강(江)을 따서 강아(江娥)로 개명하여 그가 해배(解配)하는 날까지 모셨다. 송강도 진옥의 존재를 부인에게 모두 알렸고, 부인은 속에 천불이 나겠지만 사대부가 며느리의 체모를 지켜 남편을 잘 보살피고 상경할 때 동행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진옥은 거절하고 혼자서 강계를 지키다가 송강의 타계 소식을 듣고 종적이 묘연했다. 이러한 스토리는 시조집 <권화악부(權花樂府)>에 “정송강여진옥상수답(鄭松江與眞玉相酬答)”으로 실려 있다.

다산의 꿈속 연애담이 한낱 이것으로 끝났다면 금삿갓이 필(筆)을 들지도 않았다. 옛 말에 꿈보다 해몽(解夢)이라고 했듯이 다산도 해몽을 잘했는지, 운이 좋았는지 꿈속의 사랑이 현실로 살아난 것이다. 그로부터 몇 년 후에 정말로 한 여인이 다산초당(茶山草堂)을 찾아왔다. 얼굴은 전혀 밉상도 아니고 이런 시골에서 자주 볼 수 없을 정도의 미색은 되었는데, 햇빛과 바닷바람에 그을어서 약간 가무잡잡하지만 건강미가 있었다. 다짜고짜 다산을 흠모하여 모시고 살겠단다. 이 여인은 누구인가? 다산은 500권의 저서를 냈지만 이 여인의 정체에 대하여 일언반구(一言半句)도 없다. 물론 천주학에 연루된 형님인 정약종(丁若鍾)에 대한 언급도 없기는 마찬가지다. 자기 신상에 해가 될 사항은 철저히 함구(緘口) 한 것이다. 요즘 정치인들이 인터넷이나 SNS, 저서 등에 함부로 기록한 것들이 도리어 자기의 발목을 잡는 행태를 다산은 200년 전에 예감한 것이다. 그래서 필자 금삿갓이 그녀의 정체에 대해서 이런저런 유추(類推)를 해보았다. 다산이 처음으로 강진에 유배 와서 살던 주막집 딸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나이가 차서 성혼하였으나 서방이 뱃일을 나갔다가 그만 사고를 당한 모양이다. 몇 년을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자, 좁은 시골에서 개가할 상대도 없고 해서 차라리 어릴 때부터 흠모하는 양반의 소실을 자청한 것이다. 아무튼 다산은 이 여인과 알콩달콩한 신접살림을 하면서 저술활동에 전념할 수 있었다. 따지고 보면 다산의 훌륭한 저술활동의 보이지 않은 내조자인 것이다. 그러나 다산은 송강 정철과 달리 소실의 존재에 대하여 서울의 정실부인에게 한마디의 언질(言質)도 없었다. 다산이 해배가 되었을 때, 그녀와의 사이에 딸이 하나 있었다. 다산은 말없이 이들을 데리고 서울의 본가로 돌아왔으나, 정실부인인 풍산 홍 씨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다산은 한마디 대꾸도 못하고 사랑으로 도망가고, 애꿎은 소실 모녀만 눈물을 흘리면서 다시 천리 먼 길 강진으로 되돌아가야만 했다. 그 후 이들에 대한 흔적이나 후일담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야말로 다산의 꿈속의 사랑이야기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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