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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미수(米壽)에 만난 사랑 – 권섭과 가련(可憐)

사랑에 나이가 있나요?

by 금삿갓

옛날부터 미천한 신분의 기녀였지만 타고나고 닦은 본인의 재주를 기반으로 훌륭한 시인을 만나 불후(不朽)의 이름을 남긴 경우가 많이 있다. 황사랑(黃四娘)은 두자미(杜子美)에게, 유기(柳妓)는 의산(義山) 이상은(李商隱)에게, 상부(商婦)는 낙천(樂天) 즉 백거이(白居易)에게, 국향(國香)은 노직(魯直) 황정견(黃庭堅)에게, 설도(薛濤)는 원진(元稹)에게, 조운(朝雲)은 소동파(蘇東坡)에게 서로 인정을 받아 이름을 남겼다. 문학과 풍류가 이러할 진데 우리나라라고 예외가 있을 수 없다. 황진이(黃眞伊)의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매창(梅窓)의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홍랑(洪娘)의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진옥(珍玉)의 송강(松江) 정철(鄭澈)·유지(柳枝)의 율곡(栗谷) 이이(李珥)·매향(梅香)의 퇴계(退溪) 이황(李滉)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조합의 공통점은 기녀의 나이가 한창때의 만남이고 연분이다. 메뚜기도 한철이고 백일홍도 석 달 열흘이면 다하니 기생들의 전성기가 그리 길 수는 없다. 반짝하고 퇴물이 되거나 일찍 요절하여 역사의 뒤안길로 묻히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전성기를 한참이나 지난 퇴기(退妓) 아니 죽을 날이 가까운 시기에도 불같은 활동을 한 기녀가 있었다. 기록상으로 연산군(燕山君) 때 거문고를 잘 타는 데다가 얼굴이 절색이었던 상림춘(上林春)은 가흥청(假興淸)으로 선발되어 활동했다. 기예가 더욱 발전되어 중종 때 이르러 제일가는 거문고 명수가 되었다. 기생의 나이 이미 70이 넘었는데 중종 때 도화서(圖畫署) 화가 이상좌(李上佐)가 그녀의 그림을 그렸단다. 이때 그녀를 짝사랑하던 사대부 신종확의 시와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이 율시(律詩) 한 수를 써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상림춘에 비해 훨씬 고수가 있었으니, 그녀는 바로 오늘 이야기하는 옥소(玉所) 권섭(權燮, 1671~1759)과 미수(米壽 : 88세)가 된 나이에 만나서 열렬히 연분을 맺은 함흥의 기녀(妓女) 가련(可憐)의 이야기다. 함흥의 잘난 기녀는 대대로 이름을 가련으로 짓는지는 몰라도, 가련의 이야기는 여러 가지가 있어서 정확히 어느 것이 바로 옥소 권섭과 교류한 사람인지는 출생년대나 활동 시기들을 살펴보아야 한다. 첫 번째는 호를 문무자(文無子) 또는 매사(梅史) 등 5~6개를 두루 사용하던 이옥(李鈺 1760~1815)이 지은 <북관기야곡론(北關妓夜哭論)>에 이렇게 전한다. 이옥이 동시대의 인물을 묘사했다면 옥소의 출생년대와 비슷하여 상당히 가능성이 많다.

“함흥에 가련이라는 기생이 있었다. 얼굴이 몹시 아름다웠으며, 성격이 소탈하고 기개가 있었다. 시문도 제법 알아 제갈량(諸葛亮)의 <출사표(出師表)>를 낭랑하게 외웠고, 술을 잘 마셨으며, 노래도 잘했다. 칼춤에도 능하고 거문고를 탔으며 퉁소(洞簫)도 품평했다. ··· 그녀와 더불어 시를 지었다. 가련이 화답하면 소년이 부르고, 소년이 화답하면 가련이 불렀다. 함께 거문고를 타며 노래했는데, 가련이 거문고를 타면 소년이 노래하고, 가련이 노래하면 소년이 거문고를 탔다. ··· 함께 퉁소를 불자, 한 쌍의 봉황이 와서 그 만남을 기뻐하는 것 같았다. 함께 검무를 추자, 한 쌍의 나비가 만나 헤어질 줄을 모르는 것 같았다.” 한편의 비디오를 보는 것 같다.

또 다른 기록은 명미당(明美堂) 이건창(李建昌)이 쓴 『명미당휘초(明美堂彙抄)』의 <가련전(可憐傳)에는 “가련(可憐, 1671~1759)은 함흥부의 기생이다. 나이 14~15세 때 함경감사 권흠(權歆, 1644~1695)의 식객으로 온 목생(睦生)과 사랑에 빠졌다. 한해 남짓 지나 목생이 돌아갈 때 가련은 따라가기를 원했지만, 목생은 어렸을 때부터 문장을 공부해서 과거시험 합격을 추구했다. 그런데 기생을 받아들이면 이름과 행실이 손상될까 염려했기 때문에 가련을 데려가지 않은 것이다. 가련의 슬픔이 오래되자, 그 어머니가 날마다 꾸짖기를 ‘너는 어찌하여 목생을 위해 절개를 지키는가? 영부(營府)에는 귀공자가 많으니 하필 목생뿐이겠는가?’라고 하였다. 가련은 어쩔 수 없이 점점 다시 스스로 풀어졌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가련도 출생 연도가 옥소 권섭과 같다.

또 다른 기록은 강효석(姜斅錫)이 편찬한 <대동기문(大東奇聞)>에 “이광덕이 가련이의 출사표 외워 읊음에 감동하다.(匡德感可憐誦出師表)”라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은 주인공 이광덕의 출생 년대가 옥소 보다 20년 아래이고, 또한 가련이란 기생이 일찍 자결을 한 것으로 되어 있어서 옥소와 함께 미수가 될 때까지 생존하지 못한 것이니 다른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내용은 이렇다.


『광덕(匡德, 1690-1748)은 전주 사람이니 호는 관양(冠陽)이다. 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참판에 이르고 문형(衡)을 맡았었다. 북관(北關, 함경북도 지방)에 암행어사(御史)가 되어 나갔을 때 종적을 감추고 비밀히 하여 모든 어려움을 맛보면서 고을 원의 잘잘못과 풍속의 완악함과 무너짐을 조사하여 찾아내고자 했다. 함흥에 이르러 장차 그 기색을 드러내려 할 새 곧 수행원과 더불어 날이 저물어 성안으로 들어갔다. 성 안의 백성들이 분주하게 외쳐 떠들썩하기를 “암행어사가 장차 올 것이다.”하였다. 이공(公)이 의심스럽고 괴이하여 말하기를 "여러 고을을 두루 다녀도 알아채는 자가 없었음인데, 여기가 이렇게 시끄러우니 필시 수행원(從者)들이 누설했다."고 생각했다. 곧 도로 성 밖으로 나와 수행원들을 힐문하였으나 단서를 찾지 못했다. 두서너 날이 지나 다시 성 안으로 들어가 비로소 곧 출도(出頭)하여 업무를 판결하였다. 그리고 또 여러 아전들에게 묻기를 “너희들이 어떻게 내가 오는 것을 알았느냐.” 하니 아전이 말하기를 “온 성이 시끄럽게 왁자지껄한 소문만 있었지 근원은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 이공(公)이 그 근원을 찾으라고 명하니 아전이 물러나서 자세히 탐문한즉 7세의 작은 기녀 가련(可憐)이 제일 먼저 부르짖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공(公)이 가련을 앞으로 가까이 오도록 명하고 말기를 “포대기 두를 작은 아이가 어떻게 내가 올 것을 알았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저의 집은 길거리에 있는데, 저번에 창문을 밀치고서 엿보니 두 걸인이 길에 나란히 함께 앉아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옷과 신발은 비록 낡고 해졌으나 두 손은 매우 희었던 까닭으로 스스로 생각하기를 “얼고 굶주린 사람이 어떻게 이와 같이 살찌고 흴 수가 있을까.”했습니다. 그즈음에 그 사람이 옷을 벗어 이를 잡고, 이내 도로 입는데 옆에 있던 한 사람이 당겨서 옷을 입히고, 예를 표함이 몹시도 공손하여 마치 신분의 높은 이와 낮은 이 사이와 같았던 까닭으로 암행어사라 확신하고, 집 사람들께 자세히 고하니 순식간에 왁자지껄 퍼져서 온 성이 혼란스러워졌습니다.” 했다. 이공(公)이 크게 그 영리함을 기특히 여겨 그 사랑하고 가엾이 여김을 지극히 하고 돌아올 때에 되어서 시 한 수를 지어 주었다. 기녀도 또한 공(公)의 아름다운 글(文華)에 감복하여 시를 몸 가까이에 지닌 채 몸을 의탁하는 뜻이 있었다. 오래 지나서 이미 비녀를 꽂을 나이가 되었는데도 한결같이 정조를 지키고, 남에게 허락하지 않기를 맹서 하였는데, 공(公)인즉은 이미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 뒤에 공(公)이 어떤 일에 연좌되어 북쪽으로 귀양 가서 함흥에 우거(寓居)하게 되었는데, 그 기녀가 와서 알현하고 곁에서 모시어 아침저녁으로 게을리하지 않거늘 공(公)도 또한 그 정성에 깊이 감동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신분이 죄에 걸려 있으므로 여색을 가까이할 수 없음이라. 더불어 두루 함께한 지가 4~5년에 일찍이 어지러움에 이르지 않았고, 기녀 또한 그 훌륭함에 마음으로 감복하여 공(公)이 일찍이 다른 곳으로 시집가라고 하였다. 기녀는 죽음에 이르도록 듣지를 않고, 슬퍼하며 마음을 넓게 하여 작은 일에 구애되지 않았다. 제갈공명의 출사표를 암송하기를 좋아하여 매양 맑은 밤 달이 밝음에 공(公)을 위해서 한 번 외면 맑은 소리가 한들한들하여 마치 학의 울음소리와 같으니, 공(公)이 그 소리를 듣고 눈물을 흘리며 이내 한 절구를 읊조림에 “함경도 여협(俠) 머리에는 실이 한가득, 나를 위해 출사표 두 곡을 목청껏 노래하네. 그 가락 삼고초려 장에 이를 제면, 내 쫓긴 신하 맑은 눈물만 갈래로 흐른다네.”라 하였다. 어느 날에 공(公)이 죄에서 풀려 집으로 돌아오게 됨에 비로소 곡진하게 서리어서 못내 잊혀지지 아니함을 느껴서 공(公)이 타일러 말하기를 “내가 떠나는 것이 날짜가 정해져 있으니, 비록 너와 함께 가고는 싶으나 용서받고 풀려나 돌아가는 사람이 기녀를 뒷 수레에 태움은 내가 하지 못할 일이다. 집에 돌아간 뒤에 반드시 마땅히 힘써 이를 것이니 조금 늦는 것을 탓하지 말거라.” 하였다. 기녀는 눈썹을 움직이며 기쁨 가득한 얼굴로 개연히 승낙하였다. 공(公)은 돌아간 지 몇 달이 안 되어 병으로 인하여 세상을 떠났다. 기녀는 흉측한 부음을 듣고 제물을 차려놓고 통곡하고, 인하여 자결하여 돌아가니 집 사람들이 길 곁에 장사 지냈다. 후에 영성군 박문수(1691-1756)가 함경감사로 나가 그 길을 지나다가 그 말을 수소문해 얻어듣고, 비석을 세우고 쓰기를 “함관여협가련지비(咸關俠可憐之碑)”라 하였다.』

필자 금삿갓의 150년 전 선배 삿갓인 난고(蘭皐) 김병연(金炳淵, 1807~1863)의 일화에도 함흥 기생 가련이 나온다. 함흥 땅에 들어오는 잘 나가는 문사들의 파트너 기생은 모두 가련으로 이름을 통일시켰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김삿갓과 가련의 일화는 대충 이렇다. 금강산을 유람하던 김삿갓이 유점사(楡岾寺)의 말사인 마하연(摩訶衍)에서 공허스님을 만났다. 거기서 그와 시 짓기 내기도 한판 붙곤 했다. 시 짓기 내용은 생략한다. 그는 이곳에서 함흥의 가련이란 기생 얘기를 듣는다. 그리고는 안변 땅에 어느 노파 집에서 묵고 또 가련이 얘기를 들었단다. 그 노파는 마음이 부처님 가운데 토막인지 길 가던 길손들이 하룻밤을 머물면서 원하면 동침을 해서 12명의 자식을 낳았단다. 막내가 가련인데, 아마 금강산 어느 절의 스님이 아비란다. 노파의 신세 이야기와 부탁을 모른 척할 수 없는 김삿갓이 함흥에서 가련을 만나 3년을 머물렀다는데 정확히는 알 수 없다. 다만 믿거나 말거나 하는 가련에 관한 시가 남아 있는 것이다. 가련을 만날 때의 시는 이렇다.

可憐行色可憐身(가련행색가련신) / 가련한 행색의 가련한 몸이

可憐門前訪可憐(가련문전방가련) / 가련의 문 앞에 가련을 찾아왔네.

可憐此意傳可憐(가련차의전가련) / 가련한 이 내 뜻을 가련에게 전하면

可憐能知可憐心(가련능지가련심) / 가련이 이 가련한 마음을 알아주겠지.

알콩달콩 재미있게 지내다가 떠날 때는 말없이 훌쩍 가는 것이 김삿갓 아닌가? 그런데 가련에게 김삿갓 답지 않은 언질을 남기고 갔다는 설(說)이 있는데 영 믿기지 않지만 기록해 둔다.

可憐門前別可憐(가련문전별가련) / 가련의 문 앞에서 가련과 이별하려니

可憐行客尤可憐(가련행객우가련) / 가련한 나그네의 행색 더욱 가련하네.

可憐莫惜去可憐(가련막석거가련) / 가련아, 애석해 마라. 가련하게 간다고

可憐不忘歸可憐(가련불망귀가련) / 가련을 잊지 않고 가련에게 돌아 오리.

그런데 김삿갓의 출생 연도는 옥소 보다 거의 140여 년 후인 관계로 같은 기녀 가련일 수가 없다.

그럼 옥소(玉所) 권섭(權燮)에 대해 알아보자. 그는 우리나라 숙종과 영조 당시의 잘 나가는 문인인데, 한국문화백과대사전에서 소개는 다음과 같다. 옥소 권섭은 1686년(숙종 12) 16세의 나이로 경주 이씨(慶州李氏) 이조참판 이세필(李世弼)의 딸과 혼인하였다. 14세인 1684년에 아버지와 사별했기 때문에 큰아버지의 각별한 보살핌과 훈도를 받으며 수학하는 한편, 외숙인 영의정 이의현(李宜顯), 처남인 좌의정 이태좌(李台佐) 등과 함께 면학하기도 하였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 때는 19세로 소두[疏頭 : 연명(連名)하여 올린 상소문에서 맨 먼저 이름을 적은 사람]가 되어 소를 올리는 등 한때 시사에 관심을 갖기도 했으나, 송시열(宋時烈)을 위시한 주변 인물들의 사사(賜死) 또는 유배의 참극을 겪은 뒤, 관계(官界) 진출의 길보다는 문필 쪽을 택하였다. 일생을 전국 방방곡곡 명승지를 찾아 탐승(探勝) 여행을 하며 보고 겪은 바를 문학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따라서 그의 작품 세계는 내용이 다양하고 사실적이며 깊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문필 유산 가운데에는 한시·시조·가사 작품 외에도 유행록(遊行錄)·기몽설(記夢說) 등이 있어 그 내용이 광범위하고 섬세하다고 평가받고 있다. 시만 해도 방대한 양을 남기고 있어 오늘날 전해진 것만도 한시 3,000여 수, 시조 75수, 가사 2편이 된다. 시조 75수 중에는 연시조가 많은 편이다.

「황강구곡가(黃江九曲歌)」는 주자의 「무이도가(武夷櫂歌)」와 이이(李珥)의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의 맥을 이은 작품으로, 시사적 의의가 큰 것으로 평가된다. 1704년(숙종 30)에 지은 기행 가사 「영삼별곡(寧三別曲)」과 1748년(영조 24)에 지은 「도통가(道統歌)」는 각기 나름대로 특성을 지니고 있는 작품이다. 그의 시는 주제·소재·시어·기법 면에서 모두 파격적 참신함을 보여 준 점에서 그 특성을 찾아볼 수 있으며, 전통의 터전 위에서 새롭게 열리는 근대기를 내다보면서 새로운 시 세계를 창조해 낸 점이나, 시기적으로 정철(鄭澈)·박인로(朴仁老)·윤선도(尹善道)의 시의 주맥(主脈)을 이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말년에 가의대부(嘉義大夫)의 예우를 받았다. 저서로는 간행본 『옥소집(玉所集)』(13권 7 책)과 필사본 『옥소고(玉所稿)』가 있다.

위의 내용처럼 옥소는 18차례의 과거 시험을 보았지만 등용되지는 못하고, 1714년 서울을 떠나 충북 청풍으로 이주한 뒤에는 전국을 유람하면서 글을 짓고 유유자적한 삶을 보냈다. 그가 다닌 거리는 삼천 구백리 정도가 된다고 한다. 거리 수로는 고려의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에 비교해서 짧지만 우리나라 이곳저곳을 많이 다녔다. 그는 당 시대의 정치문학예술계의 중요인물들과 폭넓은 교류를 지속한 문인이었다. 정치적으로는 김유경과 김재로, 어유룡 등 당대 핵심관료들과 평생토록 친분을 유지했다. 시문의 측면에서는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과 포음(圃陰) 김창즙(金昌緝)에게 글을 배웠으며,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으로부터는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대한 별도의 가르침을 받았고, 당대의 대표적 다작 시인으로 꼽히는 사천(槎川) 이병연(李秉淵)과는 나이 80세가 넘도록 시적 교유를 유지했다. 이 인물들은 17세기 말기의 대표적 시단(詩壇)이라 할 백악시단(白嶽詩壇)의 핵심 구성원이었다.

옥소는 진정한 한 시대의 ‘방랑자’라고도 평가할 수 있을 정도로 일생동안 많은 여행을 다녔다. 그는 조선의 전 지역을 두루 다녔으나 함경도 지역을 가보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항상 있었다. 그런데 옥소의 나이 87세인 1757년에 종제(從弟)인 자장(子章) 권혁(權爀, 1694∼1759)이 함흥부사가 되어 부임하자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함경도 지역의 여행을 결행하였다. 요즘도 87세면 다리가 후들거려 여행을 못 다니는 판국에 평균 수명이 짧은 그 시절에 90세를 목전에 둔 노인이 오지로 여행을 떠난다니 말리지 않는 사람이 이상한 것이다. 하여튼 대단한 방랑객 옥수는 이 여행에서 기생 가련을 만났다. 첫 만남에서 가련은 시조 한 수를 불러 단번에 옥소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바로 <제련낭가곡후(題憐娘歌曲後)>이다.

南岳火燒而西園月出際(남악화소이서원월출제) / 남악은 불에 타고 서원엔 달이 뜨는데.

北方賤人則得失知不知(북방천인즉득실지부지) / 북방의 천인은 득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幼兒乎今得旣失之慈母(유아호금득기실지자모) / 아희야 잃었던 어미를 이제야 얻었노라.

이 시조는 내면은 갑술옥사(甲戌獄事 : 숙종 20, 1694)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내용에 등장하는 남악(南岳)은 남인(南人)을, 서원(西園)은 서인(西人)을 상징한다. 옥소의 말에 의하면 이 시조는 갑술년에 불렸다고 하는데, 갑술옥사가 일어난 지 한 갑자가 지난 다음 갑술년에 불렸다. 이 시조를 통하여 옥소가 가련에게 관심을 가진 것은 그녀가 기녀이면서 고금 역사를 활용하여 당사자의 마음과 잘 융합하여 시조를 지을 수 있는 능력을 높이 본 것이다. 옥소의 개인적인 경력이나 정치적 관계에 있어서 자신의 일생에서 가장 긴밀했던 순간이나 영향을 미쳤던 사건을 기화로 이 시조를 지은 사람의 기민함에 놀랐을 것이다. 그는 그 시기 정치적 환란으로 자신의 백부와 스승인 송시열, 외가 쪽 가문의 많은 사람을 잃은 아픈 상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소문의 소두도 하고 결국은 낭인(浪人)으로서 세상을 떠돌게 된 것이다.

기녀 가련의 시에 옥소가 가만히 있을 소냐. 이에 화답하여 옥소가 <유기사수가련이낭(有寄斯酬可憐伊娘)>를 얼른 지어서 불렀다.

滿車黃橘(만거황귤) 千載風情(천재풍정) / 수레 가득 노란 귤은 천년 전의 풍정이라.

櫻桃一闋(앵도일결) 慚愧聲名(참괴성명) / 앵도가 한 곡조에 헛된 명성 부끄럽도다.

非時閑戱(비시한희) 老妄神精(노망정신) / 한가로이 희롱하니 노망 든 게로구나.

一詞非嫌(일사비혐) 九袠同庚(구질동경) / 아흔 살 동갑 우리 시 한 수가 흉이 되랴.

수레 가득 귤을 채우는 것은 당나라 시인 두목지가 당시 시와 얼굴로 천하의 인기남이었는데, 양주 고을에 근무할 때 그가 지나가면 길옆의 주루에서 기녀들이 황귤을 던지며 추파를 보낸 고사이다. 앵도일결은 아마도 가련이 자기를 높이 평가해 주는 칭찬의 노래가 몹시 부끄럽다는 표현 같다. 구십을 바라보는 동갑이 시 한수 주고받은 게 무엇이 허물될까.

앞서 살펴본 이건창의 기록과 같이 가련이 처음 인연을 맺은 사람은 15세 무렵에 만난 목생(睦生)이라는 사람이었다. 목생은 남인으로서 기사환국의 주역이었던 목래선(睦來善, 1617∼1704)의 먼 일가로 당론을 좋아하였다. 그런데 함흥에 와서 더불어 이야기할 만한 상대가 없자 가련을 상대로 서인은 그릇되었고, 남인이 옳다고 강설하였다. 그리하여 수 십 년간의 조정의 다툼과 송사 및 고관대작과 포의의 선비들이 갑론을박하며 자웅을 가리던 기개와 이론들이 하루아침에 가련의 경대와 이부자리 사이에서 논해지게 되었다. 당시 가련이 목생에게 푹 빠져서 그런지 가련이 일평생 남인을 지지하는 입장을 취했다고 한다. 가련은 심지어 ‘차라리 남인의 종이 될지언정 노론의 첩이 되지는 않겠다.’라고 했으며, 소론의 인사를 만나서는 가끔 속마음을 말하기를 ‘소론이 일찍이 남인에게 덕을 베풀었으므로 제가 감히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라고 할 정도였다. 이는 가련이 기녀이면서 이처럼 정치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는 사실로 매우 주목되는 부분이다. 그런데 늘그막에 온 옥소야말로 당색으로 보아 정통 노론의 인물이므로 가련의 입장에서는 적대적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가련에게 있어서 ‘서인은 그르고 남인은 옳다.’는 생각은 이미 잊은 지 오래된 젊은 시절의 정인(情人) 목생과 함께 저 멀리 흘러가 버린 세월이다. 이제는 90을 바라보는 나이의 두 사람에게 과거의 정치 입지가 무슨 소용이며, 단지 지난 추억으로만 다가왔을 것이다. 오히려 역설적으로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이 옥소와 가련의 결연(結緣)을 가능하게 했다고도 볼 수 있겠다.

옥소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나는 늙어 나이가 90에 가깝다. 젊은 날의 친구들은 다 땅속으로 들어가고 다만 두 사람이 남았는데, 신명숙은 동갑이고, 심여랑은 한 살 차이이다. 지금 함흥에 와 보니 가련이라는 노파가 하나 있는데 동갑이다. 글을 알고 명성이 있어 내가 만나보았다. 이 노파는 젊어서 서울과 시골에 이름을 날렸으므로 뜻이 오만하고 높아 안하무인이었다. 여러 선비 중에 앙모했던 자가 겨우 몇 명뿐이었고, 같은 기녀들을 볼 때 멸시해 마지않은 것은 셀 수도 없다. 그래서 늙어 물러난 뒤에는 신세가 매우 외롭게 되어 같은 무리나 나이 어린것들도 모두 비웃고 업신여겨 한 사람도 오가는 자가 없다. 그러니 그 신세와 명성이 어찌 그리도 나와 같은가? 이래서 내가 유별나게 대했다.” 바로 이 대목이다. 기녀 가련은 젊어서 콧대 세우며 도도하게 굴어서 기녀 세계의 따돌림을 받아 지금은 퇴기로서 어려운 처지가 되었다. 자신도 정치적 알력의 산물로 전국을 방랑하면 살다가 늙어서 변변한 친구도 없다. 물론 다들 먼저 저 세상으로 간 탓이지만. 그러니 서로 의지할 곳 마땅찮은 두 사람이 옛날의 기개를 살리고, 추억을 곱씹으면서 알콩 달콩 시를 지으면 교분을 만들 수 있을 거다.

옥소는 1757년 4월 15일에 제천의 청풍을 출발하여 5월 10일에 함흥에 도착하였다. 도착하여 함흥부의 부속 건물인 객사에서 약 73일간 머물렀다. 그리고 113일 만인 8월 9일에 2,280리를 유람하고 제천으로 돌아온다. 옥소는 함흥에 있던 두 달 보름의 기간 동안 가련과 함께 여러 명소를 유람했으며, 그곳의 문인들과 교유하기도 했다. 가련은 늙었지만 유람과 연회의 과정에서도 자연스럽게 동참하였으리라 본다. 그가 가련과 노닐면서 읊은 것으로 보이는 시인 <번노파가곡희성일사(飜老婆歌曲戱成一詞)>를 보면 그 정경이 마치 젊은 청춘 남녀가 꽃놀이를 가서 즐기는 모습이다. 이 어찌 90세를 바라보는 노인들의 사랑놀음이라고 할까. 적절히 의역해 보았다.

七寶亭前(칠보정전) 君子之花(군자지화) / 칠보정 앞의 군자꽃(연꽃)을 꺾어서

白首把折(백수파절) 驚動老婆(경동노파) / 백수의 늙은이가 노파를 놀리네.

男仙女仙(남선여선) 游戱婆娑(유희파사) / 선남선녀로 너울너울 놀다 보니

千古風情(천고풍정) 一曲悲歌(일곡비가) / 천고의 풍정도 한 가락의 슬픈 노래지.

짧은 만남이지만 서로의 정과 의가 통하고, 시와 말이 통하며 눈빛이 교차되었다. 하지만 이별은 어쩔 수 없는 통과의례이다. 옥소는 이별의 한을 말이나 몸으로 표현하지 않고 시를 지어서 작별을 한 모양이다. 그러자 가련이 사내의 무정 또는 매정함에 야속하여 원망 섞인 마음을 이렇게 노래한다.

是何老丈夫肝腸堅而矯而强乎也(시하노장부간장견이교이강호야) / 이 무슨 노장부의 간장이 이리도 씩씩하고 강한가

不惜離恨餙文翰而出之(불석리한식문한이출지) / 이별의 한 안타까운 표시없이 글만 지어 내미네.

文翰則貴而悅奈離別之悵然(문한즉귀이열나리별지창연) / 글은 귀하고 기쁘나 이별이 어찌 서럽고 슬프지 않으리오.

드디어 이별의 발걸음을 떼서 같이 걸어 나와 성천강 남쪽에서 마지막 이별을 맞는다. 한시에서 대부분의 이별은 남포(南浦)에서 이루어지듯이, 이들도 강나루에서 이별한다. 옥소는 이별의 아쉬움과 두고 가는 정의 허전함을 이렇게 읊었다.

成川江陰離別(성천강음이별) / 성천강 남쪽에서 이별하자니

九十年光豈獨汝(구십년광기독여) / 아흔 살 나이 어찌 너뿐이랴.

松茸醬此何味(송이장차하미) / 송이장 맛은 얼마나 맛있었는지

夢魂之千里(몽혼지천리) / 꿈속에 천리를 가네.

除是一闋詞章(제시일결사장) 寄之彼鴈聲(기지피안성) / 시 한 수 지어 기러기에게 부치네 /

가련이 담근 송이장의 맛이 좋아서 잊지를 못할 것 같다. 이 시로 보아 옥소가 가련의 집에서도 머물렀으리라 짐작이 된다. 가련도 질세라 화답하여 이렇게 지었다.

鴻雁帶秋雲歸故鄕乎(홍안대추운귀고향호) / 기러기 가을 구름 띄고 고향으로 가네.

過去黃江時必傳此洒息(과거황강시필전차쇄식) / 황강 지날 때 이내 소식 전하리.

傳之則憐婆福愁庶可察知否(전지즉련파복수서가찰지부) / 전하면 가련 노파의 행복과 수심을 아시려나 모르시려나.

이처럼 이들은 구순의 나이에 서로 만나 시를 수창(酬唱)하며 정분을 나눈 특이한 사례이다. 아마 역사상 최고령 미팅에 펜팔 사교가 아닌가 생각된다. 헤어진 뒤에도 이들을 서로에게 시를 보내고 받고 하였다. 지금 기록되어 남아 있는 시가 모두 23수이다. 옥소가 5수를 지었고, 가련이 18수를 지은 것이다. 물론 이들이 지은 것이 시조일 수도 있고, 이 시조를 옥소가 한역(漢譯)을 하여 한시로 변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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