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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려 최장거리 여행자 - 익재(益齋) 이제현

중국을 종횡으로 여행하기

by 금삿갓

인생은 세월 속에 사는가? 필자 금삿갓은 인생은 길 위에서 산다고 생각한다. 길은 무엇인가? 두 발이나 교통수단을 이용해서 몸을 어딘가로 이동시키는 과정에 필요한 것이 바로 길, 한자로 도(道)이다. 몸이 아닌 정신을 어떤 지향점으로 이동시키는 과정도 우리 도(道)라 부른다. 그러니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데 정신과 육체를 빼고 있을 수 없으며, 이 둘은 한 곳에 고정되어 머물러 있지 아니하고 끊임없이 움직이니까 늘 길 위에 있는 것이다. 길 위에서도 움직이지 않으면 죽은 것이니까 길은 언제나 필요하다. 길이 없으면 만들고, 가지 않으면 길은 다시 없어진다. 그래서 현대인들의 농담에 “누죽걸산” 즉 누우며 죽고 걸으면 산다고 까지 하지 않는가. 이렇듯 인생은 육체적으로 길 위를 누비고 다니든 정신적으로 도를 닦든 길과 친하게 된다. 오늘은 신라의 저 유명한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쓴 최고의 여행가 혜초(慧超)에게는 못 미치지만 고려시대를 장식한 한 문사(文士) 이제현(李齊賢)의 여행 기록을 살펴보자.

<충선왕의 모습>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1288-1367)은 누구인가? 그는 고려 충렬왕(忠烈王)부터 공민왕(恭愍王)까지 무려 일곱 왕을 모신 정치가요, 원나라 간섭기(1259∼1356) 거의 전 기간을 살았던 시대의 증인이었다. 성리학 수용에 앞장선 대학자였으며, 수많은 역사책을 쓴 역사가이기도 했다. 여기서는 그의 정치적 활동이나 학문적 활동보다는 비교적 덜 알려진 당대의 여행가적인 면모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제현은 27세 때 처음 원나라의 대도(大都)인 현재의 베이징(北京)에 간 것을 시작으로 29세 때 쓰촨(四川)성 성도 아래의 아미산(峨眉山), 32세 때 저장(浙江)성 항저우(杭州) 근처의 보타산(普陀山), 36세 때 간쑤(甘肅)성 란저우(蘭州) 너머에 있는 두오스마 즉 타사마(朶思痲)까지 발길이 미쳤다. <서정록을 찾아서>를 지은 단국대 중국문학과 지영재(67) 교수가 계산한 바에 따르면 4만 km가 넘는 거리이다. 그러니 어찌 여행가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는 또 가는 곳마다 시를 지었으니, 이 시를 그대로 연결하면 하나의 긴 여행기가 된다. 익재(益齋)는 아미산(峨眉山)으로 가는 4-5개월의 여정(旅程)에서 한시(漢詩) 31수를 지었으며, 이 시를 한 권의 책으로 엮은 것이 바로 <서정록(西征錄)(1316)>이다. 이제현의 문집인 <익재집(益齋集)>에는 270수의 시와 54수의 장단구(長短句)가 실려 있다. 이 작품들이 쓰여진 순서대로 <익재집>에 실렸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 지영재(67)씨다. 그는 이를 위해서 작품에 등장하는 지명들과 날짜를 알려주는 단어들을 분석하고, 또 현재의 교통로와 비교해 가면서 당시의 여정을 밝히는 데 들인 노력은 놀랄 만하다. 그 덕분에 우리는 <익재집>에 실린 시들이 몇 개의 시리즈로 구성됐음을 알게 됐고, 이 시들의 창작 시기가 밝혀짐으로써 역사적으로 생명을 얻게 됐다.

<이제현의 여행 경로>

이제현의 <서정록(西征錄)>은 그의 저술 목록에는 있지만 실물은 현존하지 않았다. 그런데 서정록의 존재는 일본에 소장돼 있던 고려말 학자 최해(崔瀣, 1287-1340)의 문집 <졸고천백(拙藁千白)>을 통해 1930년에야 비로소 확인된다. <졸고천백>은 또한 모함을 받아 타스마(朶思痲 ; 당시 티베트인의 거주지역)에 유배된 충선왕을 만나러 가는 여정에서 익재가 지었다는 한시 35수를 담은 <후서정록(後西征錄>(1323)의 존재도 확인시켜 준다. <서정록>과 <후서정록>의 특징은 한 여행을 한 시리즈의 시로 읊었다는 것이다. 한 제목 아래 짧은 시 여러 수를 차례로 엮으면 그대로 긴 여행 이야기가 되는 서사시인 것이다. 이는 새로운 시작(詩作)의 형식이고, 익재는 이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치 고려시대의 <일리아드><오디세이>처럼 말이다. 그럼 그가 왜 이렇게 긴 거리를 여행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바로 그가 거의 비서실장 역할을 하면서 모셨던 왕인 충선왕(忠宣王) 덕분이다. 충선왕은 고려와 몽골의 국제결혼인 왕실 혼인에 따라 쿠빌라이 칸의 딸 쿠툴룩켈미쉬 공주(제국대장공주)와 충렬왕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혼혈인으로써 이지르부카(益智禮普化)란 몽골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며, 10대 후반 이후로는 주로 몽골에서 생활했다. 33세가 되던 1307년, 몽골의 후계 싸움에서 카이샨(海山 : 원 무종武宗)·아유르바르와다(愛育黎拔力八達 : 원 인종仁宗) 형제 편에 섰고, 이들이 승리해서 카이샨 칸(武宗)이 즉위하자 몽골 조정의 실력자가 되었다. 다음 해 부친 충렬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지만 계속 몽골에 머물며 원격 통치를 하다가 왕위를 아들 충숙왕에게 물려줬다. 그는 왕위 재위기간 1년여 정도만 고려에 있었고 대부분 원나라에서 거주하면서 원격 통치했다.

<아미산의 모습>

그의 관직 생활에서 하이라이트는 고려를 대표하여 원(元)에 갔던 사행(使行)에 있다. 1313년(충선왕 5)에 당시 왕이었던 충선왕은 왕위를 둘째 아들인 충숙왕(忠肅王)에게 전위하고는 연경(지금의 북경)으로 가서 만권당(萬卷堂)이라 불리는 학술기관을 짓게 된다. 그리고 당시 원의 석학인 요수(姚燧)·염복(閻復)·원명선(元明善)·조맹부(趙孟頫) 등과 고전을 연구하며 교유하고 있었다. 충선왕은 원의 세조 쿠빌라이의 외손자로 세자 시절부터 오랫동안 원나라에서 생활한 탓에 본국인 고려보다 원나라에 더 많은 지우(知友)들이 있었다. 충선왕은 본국의 이제현을 불러 원나라 거유(巨儒)들과 어울리게 하였다. 이제현이 연경에 처음 발을 디딘 것은 1314년 충숙왕 원년 정월로 이때 그의 나이 불과 29세였다. 1316년(충숙왕 3) 7월 6일(이하 음력)에는 서촉(西蜀)에 사신으로 갔는데, 아미산에서 행해지는 산신제에 원나라 황제의 특사로 파견되었기 때문이다. 그해 연말쯤인 음력 11월에 돌아와서 대강 5개월이 걸렸다. 이때 이제현이 아미산을 돌아보면서 많은 시를 남기기도 했다. 충선왕은 이후 1319년 3월부터 몇 달 동안 이제현과 권한공 등을 데리고 절강 방면으로 함께 여행하였고, 이제현은 절강 지방과 보타산을 유람하면서 여행록(旅行錄) 1권을 만들었다.

<아미산의 모습>

1320년 12월에 연경(燕京)에 있던 충선왕이 참소를 받아 토번(吐藩)의 살사결(撒思結)이라는 곳으로 유배를 당하는 ‘악양의 화(岳陽之禍)’가 발생했다. 고려출신 환관인 백안독고사(伯顔禿古思)가 평소 충선왕을 미워하다가 황제 영종을 움직여 충선왕을 제거하려 한 것이다. 이후로 충선왕은 영종이 시해되고 태정제가 즉위한 후 3여 년을 티베트의 오지 살사결(撒思結)과 타사마(朶思馬)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충선왕이 유폐된 토번은 연경과는 1만 5천 리나 떨어진 벽지였다. 이제현은 최성지(崔誠之)와 더불어 충선왕의 무고함과 귀국을 호소하였고, 충선왕을 알현하기 위해 험한 길을 건너 유배지를 찾아갔다. 당시 이제현은 황토점이라는 곳에 이르러 시 3편을 지어 자신의 울분을 표현했다. 당시 이제현(李齊賢)이 원나라 승상부(丞相府)에 보낸 서신은 다음과 같다. “우리 늙은 심왕(瀋王)은 바로 원나라 세조(世祖)의 친조카입니다. 그 인척 관계가 매우 가깝고 또한 오래되었는데, 지금 토번(吐蕃)으로 멀리 쫓겨나서 위험한 절벽 꼭대기에서 열 걸음 걷다가 아홉 번 비틀거리고, 층층이 언 얼음과 눈 쌓인 곳을 지나 바람과 열기가 푹푹 찌는 무더운 곳에서 가죽배(革船)를 타고 강을 건넜습니다. 밤에는 소외양간에서 야숙(野宿)하고 험한 길을 떠난 지 반년 만에 유배지에 막 도착하였습니다. 흙방에서 보리 가루를 먹으니 그 고생을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는 길을 가는 사람이 들어도 오히려 슬퍼서 기가 막히는데, 그 신하 된 사람은 어떻겠습니까? 이 때문에 저는 음식을 먹어도 맛을 모르고 누웠다가도 다시 일어나며, 눈물이 메마르고 피가 멈추지 않고 흐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승상께서는 이 상황을 자세히 살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또 원나라의 승상 배주(拜住)에게도 글을 올리니 모든 말이 측은하고 슬펐으며 정성이 간절하였다. 배주가 크게 감탄하여 곧 원나라 황제에게 말하니, 가까운 곳으로 옮기도록 명하였다. 이제현이 이때 그곳에 가서 충선왕을 뵙고 돌아왔다. 태정제(泰定帝)가 즉위하여 대사면을 할 때 충선왕을 소환하였다. 이에 숙비(淑妃) 김씨가 여러 신하를 시켜서 원나라에 고하여 환관 백안독고사를 죽였다.

<보타산의 불상>

아무튼 이제현의 여행 기록은 그가 고려에서 원나라의 대도(大都 : 북경)에 간 2년 뒤에 아미산으로 가는 특별한 여행의 기회를 갖게 된다. 아미산은 사천성에 있는 산으로, 무협소설에서 무당파와 쌍벽을 이루는 아미파의 본산이다. 역사적으로는 아미산이 보현보살을 모신 불교 성지였다. 이제현은 몽골 칸 즉 황제의 명으로 보현보살에게 제사를 올리기 위해 아미산에 파견되었는데, 당연히 충선왕의 추천이 있었다. 대도에서 아미산까지는 편도로 약 2,500㎞로, 오가는 길에 황하를 건너고 정주(鄭州)·태원(太原)·서안(西安)·성도(成都)를 지났다. 왕복 5,000㎞ 길을 다섯 달 만에 다녀왔으니, 한 달 평균 1,000㎞를 가는 강행군이었다. 한 달에 1,000Km를 가려면 하루에 34Km를 매일 가야 한다. 필자 금삿갓이 산티아고 프랑스 순례길 800Km를 30일 동안 걸었는데, 하루에 27~8Km를 매일 걸었다. 물론 공무로 가는 출장이었으므로 조정에서 제공하는 역마(驛馬)와 배를 타고 안전한 역로와 수로를 이용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평소 말 탈 기회가 적었던 고려의 백면서생에게는 고된 여행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30세 젊은이는 여행의 흥분으로 고단함을 잊고 가는 곳마다 시를 지어 감흥을 표현했다. 이제현의 시에 나타난 장소를 근거로 여행경로를 대강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북경(연경, 출발)-태원(太源)-황하(黃河)-닝보(寧波)-화산(華山)-시안(西安)-마외검문관(馬嵬劍門關)-촉도(蜀道)-성도(成都)-아미산(목적지)-성도(成都)-대산관(大散關)-시안(西安)-화산(華山)-함곡관(函谷關)-낙양(洛陽)-황하(黃河)-북경(도착). 이제현이 성도(成都)의 제갈공명(諸葛孔明)의 사당인 무후사(武侯祠)에 들러서 읊은 시를 소개한다.

“群雄蜂起事紛挐(군웅봉기사분라) / 뭇 영웅 벌떼처럼 일어나자 세상 일 어지러운데,

獨把經綸臥草廬(독파경륜와초려) / 온갖 경륜 품고서 초가집에 누웠었지.

許國義高三顧後(허국의고삼고후) / 나라 위한 의리는 세 번 돌아 본 후에 높아졌고

出師謀遠七擒餘(출사모원칠금여) / 출사 할 계책은 일곱 번 잡은 다음에 굳어졌다오.

木牛流馬誰能了(목우유마수능료) / (군량미 운반용) 목우와 유마 누가 능히 알았겠으랴?

羽扇綸巾我自如(우선륜건아자여) / (출전 복장) 우선과 윤건 혼자만이 이용하였네.

千載忠誠懸日月(천재충성현일월) / 일월처럼 밝은 충성 천고에 빛나는데,

回頭魏晉但丘墟(회두위진단구허) / 그 당시 위·진나라들은 지금 터만 남아 있네.

이 여행 중에 이제현이 지은 시(詩)는 28편이며, 사(詞)가 22편으로 모두 50편이다. 이때 지은 사(詞)도 모두 시와 비슷한 형식을 띠고 있고, 그 내용이 여행 중에 보고 듣고 느낀 점을 묘사하고 있어서 여행시로 볼 수 있다.

<보타산의 모습>

그는 아미산에 다녀온 지 2년이 조금 더 지난 1319년 5월, 이번에는 강남 절강성의 닝보(寧波)에서 조금 떨어진 보타산에 다녀오게 되었다. 왕복 6개월쯤 걸린 것으로 추정된다. 보타산은 절강성 항주 근처 앞바다의 주산도(舟山島)에 붙어 있는 아주 작은 섬에 있는 산이다. 중국의 오대산, 구화산, 아미산과 더불어 4대 불교 성지로서 관세음보살을 모신 보제선사(普濟禪寺)가 있다. 보타산은 옛날 신라 시대에 무역을 하던 일본인들이 오대산에서 모셔온 관음보살을 모시고 바다를 건너가려고 하는데, 풍랑이 그치지 않아 보타산에 모셨단다. 그랬더니 바람이 가라앉고 바다가 조용해져 무사히 바다를 건넜다는 전설에서 시작한다. 이후 보타산의 관음보살은 이 지역 뱃사람들의 안전과 행운을 상징하고, 바다에 나간 뱃사람들을 수호하는 보살로 자리 잡게 되었다. 독실한 불자였던 충선왕이 이곳에 향을 올리러 가면서 이제현에게 특별히 수행을 명했던 것이다. 대도에서 보타산까지는 왕복 4,200㎞가 되는 여정이었다. 이동 여정 대부분을 운하를 이용했던 만큼 흔들리는 말 위에서가 아니라 배를 타고 편안하게 다녀올 수 있었을 것이다. 조정 실세의 행차였으므로 채비는 물론 주변의 대접도 융숭했을 터이다. 이제현은 여행 중 “배 가득 술 싣고 미인을 태웠으니”라고 노래했다. 특히 이번 여행에서는 시간에 쫓기지 않고 유유자적(悠悠自適) 관광을 즐겼을 거다. 진강(鎭江)에서는 백사(白蛇)와 청사(靑蛇)의 전설로 유명산 금산사(金山寺) 또는 강천선사(江天禪寺)와 학림사 등을 둘러보았을 것이다. 또 진강의 북고산(北固山) 감로사(甘露寺) 다경루(多景樓)에 들려 그윽한 차 한 잔에 시 한 수를 읊었을 것이다. 소주(蘇州)에서는 오왕(吳王) 합려(闔閭)의 무덤이 있는 호랑이 언덕인 호구(虎丘)에서 동양의 피사의 사탑으로 불려지는 일명 호구탑(虎丘塔)인 운암사탑(雲巖寺塔)도 둘러보고, 동진(東晉)의 왕희지(王羲之)의 글씨인 “검지(劍池 )”도 보았으리라. 그리고 오왕 부차(夫差)가 미인계로 보낸 서시(西施)와 꿈같은 시간을 보내던 고소대(姑蘇臺)는 그의 마지막 죽음의 장소가 되고 말았다. 이런 영고성쇠(榮枯盛衰)의 역사를 돌아보면서 한산사(寒山寺)의 달밤에 장계(張繼)의 저 유명한 시 <풍교야박(風橋夜泊)>을 읊조리고, 이태백(李太白)의 운에 따라 화답시도 지었을 것이다. 항주(杭州)에서는 왕안석의 신법을 반대하다가 이곳으로 밀려난 시인 소식(蘇軾)이 시를 몇 수 읊은 해회사(海會寺)에서 묵고, 오랜 역사를 가진 영은사(靈隱寺)·서호(西湖)·냉천정(冷泉亭) 등 명소를 찾아보았을 것이다. 소흥(紹興)을 지나면 한 잔 술을 마다하지 않고 명주인 소흥황주(紹興黃酒)에 객고를 풀었음 거다. 영파(寧波)에 당도하면 여행의 끝자락이다. 여기서 보타산은 그리 멀지 않다.

<보타산의 모습>

이제현의 시에 나타난 장소를 근거로 여행경로를 대강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북경(연경, 출발)-항주(杭州) 대운하(大運河), 항주-영파(寧波) 수로(水路), 영파-보타산 해로(海路), 보타산-영파(귀경) 해로, 영파-항주 수로, 항주-북경(도착) 대운하. 이 여행 중에 이제현이 지은 시는 14편이며, 사(詞)가 2편으로 모두 16편이다. 육로와 운하의 배를 타고 강남의 이국적이고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면서 시도 짓고 하면서 나름 즐거웠으리라. 운하를 이용하다 보니 어떤 날은 배 안에서 잠을 잔 경우도 있다. 배에서 잘 때 그는 이렇게 읊었다.

“夜深篷底宿(야심봉저숙) / 밤이 깊어 배 안에서 자자니,

暗浪鳴琴筑(암랑명금축) / 어둠 속의 물결이 금과 축의 소리를 낸다.

夢與白鷗盟(몽여백구맹) / 꿈속에서 백구와 맹약을 맺었거니와,

朝來莫漫驚(조래막만경) / 아침이 되어도 마구 놀라게 하지 말라.

집 떠나면 개고생이라고 신산(辛酸)한 여행이다. 아미산 여행과 보타산 여행은 공무여행이었기 때문에 역참에서도 잠을 잤다. 원나라 때 역참은 유라시아에 걸친 매우 광활한 영토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매우 발달되어 있었다. 역참은 20~30킬로미터 간격으로 일정한 거리마다 설치되어, 공무여행을 하는 사람들이나 지방과 변방을 오가는 관리나 파발들이 말을 바꾸고 숙식을 해결하는 장소로 이용되었다. 고려인으로서 중국 대륙을 여행하는 것이 아마 충선왕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뜻이므로 나름 뿌듯했을 것이다. 이제현은 이런 기분을 이렇게 읊기도 하였다.

“偪僂驛中卒(핍루역중졸) / 허리 구부정한 역참 군졸이,

顚倒身上袍(전도신상포) / 헝클어진 옷섶을 여미지 못하고,

移床拂簞席(이상불단석) / 의자와 대자리를 깨끗이 펴놓고,

巵酒慰我勞(치주위아로) / 술 한 잔 가득 부어 나를 위로하네.”

이러한 영광이 영원하리라는 기대와 희망으로 들떴을지도 모른다. 이때가 그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 즉 화양연화(花樣年華)였겠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바다에서 본 보타산>

충선왕의 권력의 힘은 바로 이렇다. 1307년 원나라 6대 황제 성종 테무르가 사망하면서, 차기 황위를 놓고 원나라 황실이 일대 혼란에 빠진다. 성종의 사촌 안서왕 아난다와 성종의 조카 아유르바르와다가 유력한 후보였다. 고려의 충렬왕은 아난다를, 충선왕은 아유르바르와다를 지지했다. 그해 2월 아난다가 원나라 수도인 연경(燕京)에 입성하자, 아유르바르와다 일파가 정변(政變)을 일으켜 그를 체포했다. 아난다를 옹립하려는 세력을 단죄(斷罪)하는 일은 충선왕이 맡았다. 그래서 아유르바르와다의 형 카이샨이 먼저 황위에 올라 7대 무종(武宗)이 되었다. 그리고 다음 보위는 형의 아들이 아닌 동생인 자기가 맡기로 약조를 했다. 1311년에는 아유르바르와다가 8대 인종으로 즉위했다. 충선왕은 두 형제와 어린 시절부터 친밀한 사이였다. 게다가 정변에서도 정적을 제거하는 데 큰 공을 세웠으니, 충선왕은 두 형제의 재위 기간 동안 큰 권력을 누릴 수 있었다. 충선왕은 카이샨을 황제에 옹립한 공으로 고려 국왕보다 위계(位階)가 높은 심왕(瀋王) 작위를 받았다. 그런데 충선왕 일행이 보타산에서 돌아온 직후 1320년 3월에 충선왕의 유력한 후원자였던 황제 인종(仁宗 : 아유르바르바다)이 사망하면서 사태가 급변했다. 인종의 아들인 시다발라(碩德八刺)가 다음 황제 영종(英宗)으로 즉위를 했다. 하지만 확고한 후원자가 사라지자 조정과 왕실내에서는 그를 모략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결정적으로 고려출신 임씨(任氏) 환관인 백안독고사(伯顔禿古思)가 충선왕을 모략하자 권력투쟁에서 패배하고 멀리 티베트의 사캬로 유배되었다. 원인은 충선왕이 원나라 황태후의 허락을 받아 환관 백안독고사(伯顔禿古思)의 토지와 노비를 몰수하여 원주인에게 돌려준 것이 화근이었다.

<토번의 군사들>

당시 고려는 개성의 현지왕과 심양의 원격왕 간의 치열한 권력 다툼이 있었다. 충선왕의 후원자가 사라지자 현지왕의 세력들이 은밀하게 원 왕실을 움직인 것이다. 원 영종은 충선왕을 관원을 동원 고려로 돌아가게 하였으나 말을 듣지 않자 형부에 회부하였다가 조금 뒤 머리를 깎고 석불사에 유치하였다. 그리고 토번으로 유배하였다. 대도에서 유배지까지는 1만 5000리다. 아마도 충선왕은, 비록 타의지만, 고구려의 고선지(高仙芝) 이후에 고려사람 가운데 가장 멀리까지 가 본 사람이 아닐까 한다. 수행하던 최성지 등은 도망하여 나타나지 않았다. 오직 박원각과 장원지등 18명이 호종하여 유배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첫 유배지 살사결(撒思結)은 지금 이름으로는 샤카 지역이고, 티베트의 수도 라싸에서도 서쪽으로 450Km 더 들어간 오지이다. 그 사이에 이제현은 고려로 돌아와 있다가 왕의 유배 소식을 듣고 대도로 달려갔으나 만날 수 없었다. 대신 그곳에서 왕의 저택을 지키면서 몽골의 여름 수도인 상도(上都·네이멍구 정란치)를 오가며 구명 운동을 펼쳤다. 다행히 이제현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몽골에도 편들어주는 사람이 있어 충선왕은 1323년 대도에서 2,300㎞ 떨어진 도스마(타사마 朶思馬 : 간쑤성 린샤)로 옮겨졌다. 이제현은 그해 음력 4월 21일 대도를 출발해서 충선왕이 있는 도스마로 향했다. 이때 충선왕을 찾아가던 이제현은 경사(京師 : 서울 즉 북경)를 떠나면서 다음과 같이,

“主恩曾未答丘山(주은증미답구산) / 태산 같은 임금의 은혜 보답하지 못했으니,

萬里驅馳敢道難(만리구치감도난) / 만 리를 달려간들 어찌 어려우리.

彈劍不爲兒女別(탄검불위아녀별) / 칼날을 치면서 아녀자의 이별처럼 하지 않고

引杯聊盡故人歎(인배료진고인환) / 술잔 들고 친구와 마음껏 즐겨야겠네.

五雲廻看籠金闕(오운회간농금궐) / 바라보니 오색구름 금궐에 둘러 있는데,

片月夕情照玉關(편월석정조옥관) / 조각달도 정이 있듯 옥관에 비추는구나.

惟念慈親鬢如雪(유념자친빈여설) / 머리 허연 늙은 어머님 생각하니,

數行淸淚洒征鞍(수행청루쇄정안) / 두 줄기 눈물 안장에 흘러내리네.”

라는 시를 남긴다. 죄인인 충선왕을 만나는 사적인 여행이었으므로 아미산 행이나 보타산 행과 전혀 다른, 초라하고 고생스러운 길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제현은 지나는 곳마다 시를 지어 기록으로 남겼다.

<토번의 군사들>

그는 8월경에 도스마에 도착하여 충선왕을 만나고, 충선왕이 북경에 돌아온 그해 12월 8일 이전에 북경으로 돌아왔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대강 왕복 7개월의 장기 여정이다. 이제현의 시와 기타 그의 문집에 나타난 장소를 근거로 여행경로를 대강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북경(연경, 출발)-탁군(涿郡)-태원(太源)-화산(華山)-시안(西安)-건현(乾縣)-림조(臨洮)-림하(臨河)-도스마(귀경)-림하-림조-정서-시안-화산-낙양-석가장(石家庄)-북경(도착). 아무튼 술을 좋아하는 필자 금삿갓의 눈에 확 들어오는 부분이 있었다. 이제현도 역시 술꾼이었나 보다. 토번의 이색 문물 중에서 보리술(麥酒 : 지금의 맥주 즉 Beer는 아닌 게 분명하다.) 마시는 방법에 대하여 자세히 기록하고 시를 장단구(長短句)로 지어 놓았다. 마시는 방법은 이렇게 기술했다. “飮麥酒(음맥주) 其法不篘不壓(기법불추불압) 揷竹筒甕中(삽죽통옹중) 座客以次就而吸之(좌객이차취이흡지) 傍置杯水(방치배수) 量所飮多少(량소음다소) 挹注其中(읍주기중) 酒若不盡(주약부진) 其味不渝(기미부유). / 보리술을 마시는 그 법은 용수도 쓰지 않고 눌러짜지도 않고, 대통을 독 속에 꽂고서, 좌중의 객들이 차례로 가면서 빤다. 곁에다 잔에 물을 담아놓고, 마신 분량을 재서 그 속에 물을 따라 넣으면, 술이 다 없어지지 않으면 그 맛이 변하지 않는다.” 아마 잔에 따라서 건배를 하면서 마시는 우리네 방법과 무척 다른 방법이라서 기록하고 시도 이렇게 지었다.

“香不斷(향부단) / 향기는 끊어지지 않고,

味難窮(미닌궁) / 맛은 다할 줄 몰라.

更添春露吸長虹(갱첨춘로흡장홍) / 다시 봄 이슬 보태서 긴 무지개 빨아들인다.

飮中妙訣人如問(음중묘결인여문) / 마시는 중의 비결을 사람들이 묻는다면,

會得吹笙便可工(회득취생변가공) / 생황 불 줄 알면 곧 잘할 수 있다네.”

이 여행 중에 이제현이 지은 여행시는 35편이다. 그런데 충선왕을 모시고 돌아오는 길에는 전혀 시를 짓지 않았다.

<토번의 옛 성터>

이제까지 고려시대 인물로서 기록이 남은 사람 중 최장거리 여행기록을 수립한 익재(益齋)의 여행과 시에 대하여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그의 여행 기록을 마무리하는 측면에서 정리해 보겠다. 그의 여행 동기는 공무 수행과 개인 업무 수행의 두 가지로 구성되었다. 공무는 요즘으로 치면 출장 여행이고, 개인 업무는 그야말로 여행이다. 여행의 교통수단은 당시의 시대 상황에 맞게 활용하게 되어 있다. 공무일 경우 나라에서 제공하는 말이나, 수레, 가마, 배 등을 공식적으로 이용하고, 개인 용무의 경우는 아마 개인의 경비로 충당되어야 할 것이다. 중국은 당시에도 내륙의 운하 시설이 발달되어 있었고, 티베트의 오지를 제외하고는 도로도 잘 정비되어 있었을 것이다. 숙박 시설은 관사(館舍)·여관·주막·역참·수참(水站)·사찰 등을 이용했으리라. 중국은 주(周) 나라부터 역참이 잘 발달되어 있었다. 주로 단정(短亭 : 5리)과 장정(長亭 : 10리), 참(站 : 30~40리) 등으로 구분했다. 우리말에 ‘한참’ 간다고 할 때, 이번 역참에서 다음 역참까지 가는 거리를 뜻하는 말인데, 요즘은 시간의 개념으로 변화한 것이다. 그는 여로(旅路) 주변에 있는 주요한 기념물이나 사찰, 명산, 누대, 능묘, 날씨 등에 대하여도 자세하게 감회를 시로 나타냈다.

<익재 이제현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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