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즐기는 방랑벽의 금삿갓은 주로 비행기를 타고 다니니까 표류(漂流)의 위험은 없다. 그런데 과거 역사에는 바다를 항해하려면 노련한 뱃사람의 오랜 경험과 튼튼한 배, 무사 항해를 위한 신의 가호(加護)에 대한 믿음이 필수적이다. 금삿갓의 선조 금훈(琴熏) 공(公)도 1272년에 삼별초(三別抄)의 초유사(招諭使)로 임명되어 그들을 타이르러 제주로 향하다가 풍랑에 휩쓸렸다. 어렵사리 추자도에 당도하자 거기서 도리어 삼별초군에게 잡혀서 고초를 겪은 후 탈출하여 고려와 원나라 조정에 실상을 보고한 사실도 있다. 이렇듯 바다의 항해란 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이번에는 17세기에 멀리 안남국(安南國) 지금의 베트남까지 표류해 간 조선인 김태황(金泰璜)의 이야기를 보자.
안남국이 어디인가를 당시 조선 사람들이 잘 알기나 했을까? 제주도에서 2,600Km 떨어진 먼 나라다. 지금도 베트남의 다낭(DaNang)과 호이안(Hoi-An) 사이에는 따이한(Daihan) 도로가 있다. 이 도로는 1968년 베트남 전쟁 당시에 청룡부대가 건설한 도로이다. 당시에도 다낭과 호이안 일대에는 파병장병, 군무원, 경제인 등 수많은 한국인이 머물고 있었다. 전쟁이라는 아픈 인연이 있는 다낭과 호이안에는 280여 년 전에 이미 한국과 깊은 인연의 장소였다. 바로 1687년 10월 4일에 조선 사람 김태황 등 제주도 주민 24명이 이곳 호이안에 표류하여 도달한 것이다. 이들은 이듬해인 1688년 7월 28일까지 10개월가량 호이안에 머물렀다. 당시 호이안은 월남의 응우옌(Nguyễn) 왕조의 통치지역으로 인도차이나 반도 최대의 무역항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이러한 호이안에 대한 기록은 베트남 중부의 당쫑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했던 이탈리아인 크리스토퍼로 보리(Christophoro Borri)의 <코친차이나 왕국의 예수 선교활동(Compagnia di Gesù al Regno della Cocincina)>, 명말청초의 지식인 주지유(朱之瑜)의 <안남공역기사(安南供役記事)>, 승려 대선(大仙)의 <해외기사(海外記事)> 등에 간헐적으로 존재한다. 이곳까지 떠내려 온 김태황 일행의 표류 경위를 기록한 것은 다음과 같다. 조선의 대청관계 외교문서를 집대성한 <동문휘고(同文彙考)>, 이익태(李益泰)의 <지영록(知瀛錄)>, 송정규(宋廷奎)의 <해외문견록(海外聞見錄)>, 정운경(鄭運經)의 <탐라문견록(耽羅聞見錄)>, 정동유(鄭東愈)의 <주영편(晝永編> 등에 부분적으로 수록되어 있다. 그의 이름이 <숙종실록> 1689년 2월 13일 기록과 <동문휘고>에는 김태황(金泰璜)으로 되어 있다. 다른 기록에는 김대황(金大璜)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김태황으로 통일하겠다.
<제주목사 이익태의 모습>
1687년 9월 3일 제주진무(濟州鎭撫) 김태황(金泰璜), 습마(習馬) 박근립(朴近立), 사공(沙工) 이덕인(李德仁), 해남 대둔사로 유학 가는 고상영((高尙英), 격군종인(格軍從人) 등 24명이 제주 목사(牧使) 이상전이 진상하는 진상마(進上馬) 3 필을 싣고 화북진을 출항하였다. 제주는 고려 때부터 왜구들의 침입이 잦아 3성 9진을 쌓았는데, 화북진은 조선 숙종 4년(1678)에 제주 목사 최관(崔寬)이 축성하였다. 김태황은 바로 군진(軍鎭)의 하급 관료였다. 당일 저녁 무렵에 선박이 추자도 앞바다를 지나던 중에 동북풍을 만나서 표류하게 되었다. 선박은 돛대가 넘어지고 키가 부러져 침몰할 위기에 있었다. 그러나 키잡이 이덕인의 능숙한 대처로 인해 위기를 넘길 수 있었으나 표류하기 시작했다. 조선 시대 항해는 배의 제조 기술보다 조류와 바람을 잘 타는 게 기술이었다. 길을 잃고 망망대해에서 표류하자니 식수도 바닥이 났다. 그들은 바닷물을 끓여서 수증기로 마실 물을 만들고, 노를 젓는 격군에게 생쌀을 계속 씹게 했다. 이후 김태황 일행은 31일을 표류하다가 오늘날 베트남 호이안, 즉 안남국(安南國) 회안부(淮安府)에 도착하였다. 호이안 해안에 반파된 이상한 배가 나타나자 20여 척의 배들이 몰려나와 배의 상태를 확인했다, 작은 배들은 표류민들을 태워 호이안 명덕부(明德府) 관아로 데려가 식사를 주고 표류 과정을 조사했다.
<조선의 배 모습>
김태황 일행은 압송되어 관리의 조사를 받게 되었다. 다행히 안남국은 한자 문화권 나라였다. 제주진무 김대황은 해적이 아니고 조선에서 온 표류한 사람임을 필사적으로 주장하며 한자로 소통했다. 조사과정에서 김태황과 이덕인은 자신들의 출신지역을 제주도가 아닌 전라도 흥덕현이라고 거짓으로 진술한다. 이처럼 김태황 일행이 출신지역을 속인 것은 당시 동아시아의 제주도 인식과 관련이 있었다. 15~19세기 제주도는 ‘도적의 섬’으로 인식되었다. 이는 제주도 주변의 해적, 왜구의 횡포와 수많은 암초 등의 예기치 않은 항해 장애물로 인해 제주도가 두려움과 공포심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1611년 제주목사 이기빈(李箕賓)과 판관 문희현(文希賢)이 표류한 유구국(琉球國)의 왕자 일행을 살해하고, 재물을 약탈했다는 소문이 동아시아에 유포되어 있었다. 이러한 소문으로 제주도 주민이 표류하면 출신지를 강진이나 해남으로 속이는 주된 원인이 되었다. 이기빈과 문희현은 이 일이 발각되어 북청(北靑)으로 유배되었다. 당시 호이안은 투본강을 따라 기원전부터 발달한 도시로 바다의 실크로드로 불릴 정도로 호화로운 국제무역항구로 많은 배가 정박했다. 1,000여 명의 일본인이 거주하고, 네덜란드인, 인도인, 화교, 아랍인들도 거주해 아주 화려했다. 유네스코는 2천 년의 긴 항구 역사를 가진 인구 80,000명의 무역항 호이안을 1999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호이안은 15세기에 참파(Champa) 왕국의 항구로 번창하고, 문화 중심지로 성장했다. 기독교가 17세기에 호이안으로 들어왔다. 응우옌(Ngunen) 왕조의 왕들이 무역을 장려하여 인근의 다낭 등 큰 항구들이 개발되어 호이안은 옛 모습 그대로 남게 되었다.
안남국 관리의 조사를 거친 이후 김태황 일행은 대변청(待變廳)이라는 관청에서 머무르게 되었다. 그리고 호이안에 도착한 지 10일이 지난 10월 14일에 일행 중 5명은 국왕을 알현하기 위해 당시 안남국의 수도였던 훼(Hue)로 이동하였다. 다음은 김태황 일행이 안남국의 국왕을 알현하는 장면이다. “다음날 동이 틀 무렵 국왕 앞으로 이끌려 들어가니, 국왕이 전언하기를 ‘그대 나라의 예법에 따라 배알하라.’라고 글을 써서 보여 주었다. 그래서 우리가 옷을 가다듬고 갓을 쓰고 재배(再拜)의 예를 행하니, 쌀 5포와 젓갈 5 항아리, 돈 10 꿰미를 하사했다. 돈 1 꿰미는 600문(文)이었다. 그리고 회안부에 머물도록 하였다. 이날 국왕이 배를 타고 경치를 즐겼는데, 배에 오르내릴 때 거동을 살펴보니 머리를 풀었고 바지는 입지를 않았으며 몸에는 비단으로 된 긴 옷을 상하 통으로 입고 있었다.” 여기서 언급된 안남국의 국왕은 응우옌 푹 떤(Nguyễn PhúcTần)으로 추정된다. 당시 베트남은 후레왕조였는데, 찐짱(Trịnh Tráng) 가문과 응우옌(Nguyễn) 가문이 2개 지역을 분할하여 통치하고 있었다.
당시 호이안과 그들이 방문한 훼(Hue)는 응우옌 왕조가 통치하던 지역이었다. 살고 있던 조선에서도 한양을 방문하고 왕을 배알 하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 보다 힘든데, 이국 왕조의 수도를 방문하고 왕을 배알 하였으니 엄청 경이로운 경험이었다. 이렇다 보니, 왕실 문화를 이것저것 묘사해 두었다. 안남의 국왕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검은 비단을 입은 채 앉아 있었는데, 그 좌우로 수십 명이 검을 차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계단 아래에는 병사와 병장기가 나열해 있었다고 하였다. 또한 국왕이 물놀이를 하는 모습도 묘사해 두었다. 안남의 국왕은 누선 가운데에 앉아 있고, 좌우로 노를 젓는 사람이 100명이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노를 젓는 사람은 종모를 쓰고, 붉은 옷을 착용하였다고 하였다. 이 밖에 수도 훼의 모습도 묘사하였다. 궁전은 크지는 않고, 돌이 없어서 흙을 구어 섬돌을 깔았다고 하였다. 그리고 대나무를 심어 성으로 삼았는데, 둘레가 20리에 달한다고 하였다. 해자를 설치하고 강물을 끌어와 연못을 만들었기에 다리를 들어 올리면 사람과 말이 오갈 수 없었다고 하였다. 국왕을 알현하고, 호이안으로 돌아온 김태황 일행은 인근 지역을 자유롭게 왕래하였다. 이들은 시장과 상점의 위치를 정확히 인식하였고, 풍속과 언어도 대략 이해하게 되었다. 김태황 일행은 당시 안남국의 지역정보를 습득하게 되었다. 이는 김태황 표류 기록에 상세히 서술되어 있고, 분량 면에서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김태황의 표류 기록에 수록된 안남국의 지역정보를 보면 대략 이렇다. 기후는 항상 덥고 비가 많이 내린다. 겨울에도 눈이 없다. 지형이 낮고 습기가 많다. 토질이 비옥하여 벼농사를 3번 짓는다. 농경에 물소를 사용한다. 양잠 1년에 5번 하고, 산에서 모시를 채취하여 밧줄을 만든다. 말소리는 새소리 같고, 머리는 묶지 않고 귀인을 빼고 모두 맨발로 다닌다. 비단으로 된 긴 통옷을 입는다. 신분고하나 남녀 처별이 없이 의관복식이 비슷하다. 옷의 길이로 귀천을 구별한다고 하였다. 관원은 말총모자 착용했고, 대부분 빈랑(檳榔)을 씹어서 치아가 검은색이다. 코끼리·원숭이·공작 등 이색 동물을 구경하고, 사탕수수·야자 등을 경험했다. 남존여비가 있고 인심이 넉넉했다. 안남지역의 농지는 모두 관개가 되어, 밭을 갈고 모내기를 할 때 호미로 김을 매는 수고가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삭을 베고 나서는 소가 그것을 밟도록 하여 도리깨질이 필요 없다고 하였다. 또한 벼에는 3종류가 있는데 흰 벼를 상급으로 삼고, 누런 벼와 검은 벼를 그다음이라고 하였다. 조선에는 없는 코끼리의 외양을 자세히 묘사하였다. 코끼리는 이빨이 한 자 남짓이나 길고, 몸뚱이는 큰 집채만 하며, 코끼리를 씻어주는 사람은 반드시 사다리를 놓고 등 위로 올라간다고 하였다. 그리고 털은 푸르스름한 흰색으로 길이가 짧으며, 코는 길이가 10여 자나 되어서 사람이 손을 사용하듯 쓴다고 하였다. 또한 울음소리가 태평소 소리와 비슷하고, 군사용도로 사용된다고 하였다.
1688년 3월에 동료 중 3명이 거친 항해와 풍토병을 끝내 이겨내지 못하고 죽어 그 땅에 묻혔다. 이를 계기로 김태황 일행은 귀국을 결심했다. 이들은 4월 5일에 자신들의 슬픈 사정을 글로 적어 국왕에게 귀국을 요청하였다. 이에 안남국은 일본 상선에 김태황 일행의 귀국에 협조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일본 상인은 김태황 일행이 표류했다는 이야기를 듣자 안남국의 요청을 거절하였다. 결국 안남국은 중국 복건 상인의 상선에 김태황 일행을 보내는 방안을 모색하였다. 이들은 호이안에 무역 목적으로 체류하고 있었던 청나라 복건성(福建城)의 상인(商人) 선주 진건(陳乾)과 선장 설자천(薛子千), 재부(財副) 주한원(朱漢源)의 협조를 받아서 제주도로 귀국할 수 있었다. 이는 김태황 일행의 귀국에는 호이안이라는 국제무역 네트워크가 이용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진건과 주한원이 김태황 일행의 귀국에 협조한 배경에는 조선과의 무역이 있었다. 게다가 안남국에서 김태황 일행의 조선 귀국에 협조하는 조건으로 돈 600냥을 이미 지급받았고, 김태황 일행도 도착하면 뱃삯으로 쌀 600포를 주기로 약조했다. 안남국이 조선정부의 외교문서를 받아 오면 후한 상을 주겠다고 제안한 상황이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진건과 주한원은 김태황 일행의 귀국에 협조한 것이다. 또한 안남국(安南國)에서 가져온 공문(公文)도 지참했는데, 그 나라의 변신(邊臣) 명덕후(明德侯) 오(吳)가 작성한 것이다. 그것은 인장(印章)은 쓰지 않고 단지 도서(圖書)만을 썼다고 되어 있다.
협상이 성사되자 그들은 1688년 7월 28일에 안남지역을 출항하였다. 그리고 광동성과 절강성을 경유하여 그해 12월 17일 제주도 대정현 진모살(長沙) 해변에 도착하였다. 이 과정에서 중국 태주 인근에서 해적선의 위협으로 인해 온주부(溫州府) 순초선(巡哨船)의 호위를 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청나라 군인 심보국(沈輔國)과 시(詩)를 주고받았고, 영파부 보타산에 있는 사찰을 방문하여 승려를 만나기도 하였다. 이곳은 고려의 문식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이 그들보다 370년 전에 다녀간 곳이다.(https://brunch.co.kr/@0306a641d711434/1183) 참조. 제주도에 도착한 김태황 일행은 우선 관청에 생환 소식을 보고하였다. 그리고 진건과 주한원의 상선은 정의현 경내 서귀진(西歸鎭)에 정박하였다. 집에 돌아오자 그의 가족들은 그들이 죽었다고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지영록>에 수록된 <김태황표해일록>에 귀국경로가 가장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토대로 귀국 경로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안남부 출항(1688.07.28.) → 광동성(08.06) → 금문위(08.29) → 숭문위(09.03)→ 빈해위(09.07) → 평해위(09.10) → 복주부(09.16) → 복청현(09.17) → 송하위(09.28) → 북교위(10.18) → 복녕현(10.23) → 절강성 온주부(11.03) → 태주 경유(11.10) → 석당위(11.14) → 영파시(11.17) → 상산현(11.25) → 석파위(11.26) → 정해현(12.09) → 대정현 진모살 해변 도착(12.17)이다.
제주목사 이희룡(李喜龍), 제주판관 윤이취(尹以就), 정의현감 박제(朴濟)는 귀환자와 중국 상선의 진건과 주한원 등을 면담 조사했다. 안남국에서 김태황 일행을 만난 경위, 귀국경로 등을 질문하였고, 청나라의 패표(牌表)와 안남의 외교문서, 승선명단과 적재화물 목록을 제출토록 하였다. 당시 중국 상선의 승선자는 모두 28명이었고, 적재 화물은 56개 품목의 각종 특산물인데, 동남아와 중국산의 향과 향신료, 가죽, 종이, 안경, 옷과 옷감, 약재 등 다양했다. 중국은 쇄국을 하다가 강희제 이후 무역을 장려하고 있었지만 조선은 육로 무역 이외는 금지하고 있었다. 관리들은 면담과정에서 청나라의 무역정책, 선박과 건조기술에 대한 정보, 안남국과 중국과의 외교관계에 대한 정보도 파악하였다. 이 과정에서 중국의 상인들은 조선 관리에게 송환자의 배 삯 정산을 요구하였다. 김태황 일행의 생활 여건 상 그 배 삯을 감당할 여력이 없음을 간파한 것이다. 그래서 대신 조선 정부에서 대납해 주도록 요구한 것이다. 이러한 저변에는 배 삯보다는 그들이 싣고 온 물건을 교역하고 차후로도 계속 교역하기를 바라는 요구였다. 그들은 쌀 대신에 해삼과 전복으로 배 삯으로 지급해도 좋고, 쌀은 주면 이곳에서 전복으로 교환하여 가져가겠다고 했다.
이들에 대한 처리 문제를 당시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 권시경(權是經)이 장계를 올려 숙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그 해 여름에 제주(濟州)로부터 상인(商人) 주한원(朱漢源) 등 28명을 안동(眼同)하여 도성 근처로 데리고 와서, 그 배 삯과 쌀값(米價), 화물 값(糧資)을 계산하여 은(銀)으로 주고, 그대로 역관(譯官)에게 연경(燕京)으로 거느리고 들어가라고 명하였다. 조선 조정은 청나라 상인에게 은자 2,852냥을 지급하였다. 이 액수는 배 값 명목 1,000냥, 수군가(水軍價) 400냥, 김태황이 약정한 쌀 600포를 환산한 600냥, 여비 800냥, 평안도지역을 경유할 때 반전(盤纏) 52냥으로 책정한 것이다. 조선은 이들을 육로를 통해 호송했는데, 청나라에서는 다음부터 표류민을 육로로 보내지 말도록 요구하였다. 그리고 인원수와 적재화물 내역을 진공사(進貢使)를 통해 발송하고, 배가 파손된 경우에만 육로를 통해 호송토록 하였다. 1691년 선주 진건의 동생 진곤(陳坤)과 선장 설자천(薛子千) 등 33명이 서귀포에 도착하여 또 통상을 요구해 왔다. 이들은 예물을 바치면서 해삼과 어포(魚脯) 무역을 요구하였으나, 조선 조정은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폐쇄된 사회였던 조선에서 본인의 뜻과는 다르게 자연재해의 힘으로 이역만리를 여행한 사람들의 기록은 많은 사람들에게 세상을 향한 열린 눈을 보여주는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나비효과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조선은 늘 은둔의 나라로 닫혀있었다. 이 글은 아주대 인문과학연구소 전상욱 교수의 <김태황 일행의 안남국(安南國) 표류와 체험> 논문의 자료를 많이 활용하였음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