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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그림의 한류를 일으킨 취옹(醉翁) - 김명국

일본 열도를 떠들썩하게

by 금삿갓

술을 좋아하는 필자 금삿갓도 술을 지고 가라면 싫어도 마시고 가라면 좋아했다. 술에 대한 일화야 무지하게 많지만 금삿갓도 소싯적에 읽은 <명정 40년>의 저자 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 만큼 일찍 음주계에 입문해서 회사에서는 술상무 노릇도 오래 했다. 오늘은 그야말로 술 좋아하는 취옹(醉翁)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니 절로 신이 난다. 그의 신상 털기는 나중에 하고 그의 술과 관련된 일화부터 한 자락 깔고 가야겠다. 그의 <명사도(冥司圖)>와 관련된 일화(逸話)이다. <명사도(冥司圖)>란 사찰의 명부전(冥府殿)에 걸리는 불화(佛畵)의 하나로 저승에 가서 염라대왕(閻羅大王)에게 심판(審判)을 받는 일종(一種)의 ‘지옥도(地獄圖)’와 관련(關聯)된 이야기다. 명부전은 보통 지장전(地藏殿)으로 부른다.

<세계 최고로 평가 받는 달마도>

이 일화는 완암 정내교(浣巖 鄭來僑)의 <완암집(浣巖集)>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화사(畵師) 김명국(金鳴國)은 인조(재위 1623~1649) 시대 때의 사람이다. 그의 집안 씨족은 어디에서 나왔는지 알 수가 없지만, 스스로 호를 연담(蓮潭)이라고 하였다. 사람이 소탈(疎脫)하고 호방(豪放)하여 농담(弄談)을 잘했고, 술을 좋아하여 한 번(番)에 두어 말씩 마시곤 했으며 그림을 그릴 적에도 반드시 크게 취(醉)해야 붓을 휘둘러댄다. 그의 그림은 옛것을 본뜨지 않고 자기의 마음에서 얻어진 것이었다. 인물과 수석(水石)을 잘 그렸는데, 수묵(水墨)과 담채(淡彩)를 잘 활용하여, 그것으로 풍취(風趣)·신운(神韻)·기개(氣慨)·격조(格調)등을 이루었다. 그러나 세속의 연지와 분칠로 화려하게 꾸미는 법을 취하여, 사람의 눈을 즐겁게 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그래서 취한 후에 더욱 자유분방(自由奔放)하였고, 술이 뚝뚝 떨어질 듯 대취하면 뜻이 더욱 무르녹아 신운(神韻)이 넘쳐흘렀으니, 대개(大槪) 멋지게 그린 것은 취(醉)한 뒤에 그린 것이 많다고 한다. 사람들이 그 집에 가서 그림을 그려 달라고 하려면 반드시 술을 큰 독에 지고 가야 했고, 사대부(士大夫)들이 그를 자기(自己) 집으로 초대(招待)할 때도 역시 술을 많이 장만해 놓고 양(量) 껏 마시게 한 뒤에야 그는 붓을 들곤 했다. 그러므로 세상(世上)에서 그를 ‘주광(酒狂)’이라 했다. 그를 아는 자(者)들이 더욱 기이(奇異)하게 여겼다.

<기려도>

어느 날 영남(嶺南)의 어떤 중이 큰 폭의 비단(緋緞)을 가지고 와서 <명사도(冥司圖)>를 그려 달라고 할 적에 고운 베 수십 필(匹)을 폐백(幣帛)으로 바쳤다. 김명국(金明國)이 그 베를 기쁘게 받아서 집사람(家人)에게 건네주면서 말하길 “이것으로 술값을 장만해서 내가 여러 달 동안 실컷 마실 수 있도록 하시오.”라고 하였다. 얼마 뒤에 그 중이 와서 문안(問安) 하니, 김명국(金明國)이 말하길 “너는 일단 돌아가서 내가 그리고 싶을 때 그리기를 기다리고 있어라.”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한 것이 서너 차례(次例)만에 하루는 듬뿍 취(醉)하여 드디어 비단(緋緞)을 펴 놓고 곰곰이 생각한다. 그리고 한참을 들여다본 뒤에 붓을 들고 쓱쓱 그려 나가서 단번에 그림을 마쳤다. 그 불전(佛殿)의 위치(位置)와 귀물(鬼物)의 형상(形象)이 삼삼하여 생생한 기운(氣運)이 감돌았다. 그런데 머리채를 잡혀 앞으로 끌려가는 자, 끌려가서 형벌을 받는 자, 무릎이 꺾이고 불에 태워지는 자, 방아에 찧기고 맷돌에 갈라는 자들을 모두 화상(和尙)과 비구(比丘)로 그린 것이다. 중이 그것을 보고 깜짝 놀라 헐떡이며 말하길 “아이고, 공(公)은 어찌하여 우리의 대사(大事)를 그르치려 하십니까?” 하였다.

<고사관수도>

그러자 김명국(金明國)이 다리를 쭉 뻗고 앉아 웃으며 말하길 “너희 놈들이 평생(平生)에 못된 짓 한 악업(惡業)이 바로 세상(世上)을 미혹(迷惑)시키고 백성(百姓)들을 속인 것이니, 지옥(地獄)에 들어갈 자(者)는 너희 놈들이 아니면 그 누구이겠는가.”하였다. 그 중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하길 “공(公)은 어찌하여 우리의 대사(大事)를 그르쳐 놓습니까? 원(願)컨대 이것은 불태워 버리고 우리 베나 돌려주십시오.”라고 하였다. 그러자 김명국(金明國)이 웃으며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 그림을 온전히 완성하고 싶으면 술을 더 사 오너라. 그러면 내가 또 너희들을 위하여 고쳐 주겠다.” 하였다. 그리하여 중이 술을 사 오니, 김명국(金明國)이 하늘을 우러러 다시 껄껄 웃고는 큰 잔(盞)에 잔뜩 부어 실컷 마신 다음 취기에 붓을 들었다. 머리 깎은 자(者)는 머리털을 길게 하고, 수염(鬚髥)이 없는 자는 수염(鬚髥)을 그리고, 치의(緇衣 : 승려의 검은 물을 들인 옷)와 납의(衲衣 : 승려의 헝겊을 모아 기워 만든 옷)를 입은 자는 채색(彩色)을 해 그 색깔을 바꾸어 놓았다. 잠깐 사이에 그림이 완성(完成)되었는데, 붓 돌아간 맛이 더욱 새로워져서 고친 흔적(痕迹)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림을 마친 다음 붓을 던지고 다시 큰소리치며 잔(盞)에 가득 부어 마시니, 중들이 빙 둘러서서 보고 있다가 감탄(感歎)하여 말하길 “공(公)은 진실(眞實)로 천하(天下)의 신필(神筆)입니다.” 하였다. 이내 중들은 절을 하고 물러갔다. 정내교가 이 글을 쓸 당시까지 그 그림이 남아 있어서, 사문(沙門)의 보물이 되어 있다고 썼다. 명국이 죽은 뒤에, 그의 문도(門徒) 중에 패강(浿江) 조세걸(曺世杰)이란 자가 있었는데, 그가 남긴 화법을 전수받아서 수묵화와 인물화로 이름이 알려졌다. 그러나 김명국의 신운(神韻)과 정수(晶髓)는 얻지 못하였다고 평했다. 그는 "그 변화 무궁함은 어느 한 곳에 머물지 않았다. 작으면 작을수록 더욱 오묘하고, 크면 클수록 더욱 기발하여 그림에 살이 있으면서도 뼈가 있고, 형상을 그리면서도 의취(意趣)까지 그려냈다. 그 역량이 이미 웅대한데 스케일 또한 넓으니, 그가 별격(別格)의 일가를 이룬 즉, 김명국 앞에도 없고 김명국 뒤에도 없는 오직 김명국 한 사람만이 있을 따름이다."라고 평했다.

<고사관화도>

참고로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전생의 업보를 심판받는다고 한다. 죽은 날부터 49일까지 7일을 단위로 열 명의 왕 중 먼저 7명의 왕인 진광왕(秦廣王), 초강대왕(初江大王), 송제대왕(宋帝大王), 오관대왕(五官大王), 염라대왕(閻羅大王), 변성대왕(變成大王), 태산대왕(泰山大王)의 심판을 받는다. 그래서 죽은 사람이 좋게 환생할 수 있도록 7일마다 불경을 읽고 부처님께 공양하는 재(齋)를 지낸다. 그것이 바로 사십구재다. 업보가 많아 사십구재를 지내도 죄가 남아 있는 중생들은 죽은 지 백일(百日), 소상(小祥 : 1년), 대상(大祥 : 2년)에 평등왕(平等王), 도시대왕(都市大王), 오도(五道) 전륜대왕(轉輪大王) 등 나머지 3대 왕에게 차례로 선악의 업을 심판받는다. 유교에서는 이런 제례절차가 없었고 불교의 제례 절차를 차용한 것이다. 이런 심판은 지옥에서 거행된다. 지옥은 칼산인 도산지옥(刀山地獄), 끓는 가마솥인 화탕지옥(火湯地獄), 한빙지옥(寒氷地獄), 검수지옥(劍樹地獄), 발설지옥(拔舌地獄), 독사지옥(毒蛇地獄), 거해지옥(鋸骸地獄) 7 지옥과 나머지 철상지옥(鐵床地獄), 풍도지옥(風途地獄), 흑암지옥(黑闇地獄)이 더 있다. 마치 단테의 <신곡>과도 비슷한 구조로 느껴지는데, 인간은 동서양이 비슷하게 생각하는 모양이다.

<노엽달마도>

김명국(金明國, 1600?년~1662? 이후)은 신상이 그리 명확하지 않은 조선 중기의 화가이다. 본관은 안산(安山)이며, 다른 이름으로 한자가 鳴國, 命國이 있고, 자는 천여(天汝), 호는 연담(蓮潭) 또는 취옹(醉翁)이다. 중인 출신이라서 족보가 불명확하다. 도화서(圖畵署)의 화원을 거쳐 사학교수(四學敎授)를 지냈고, 1636년(인조 14)에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다녀왔다. 남송의 선승(禪僧)들의 활력이 넘치는 필치를 연상시키는 발묵(潑墨)으로 인물을 그리는 데 뛰어났으며 수석(水石)도 잘 그렸다. 임진왜란 후에 침체된 화단을 재건하는 데에 크게 공헌했다. 그의 그림에 반한 일본 조야의 요청으로 1643년에 한 번 더 통신사를 수행하여 다녀왔는데, 화원이 두 번이나 일본에 다녀온 것은 그가 유일하다. 1647년 창경궁 중수 공사 때 화원 6명과 화승 66명을 데리고 책임 화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림을 속사로 그리고 많이 그렸음에도 남아 있는 화적(畵蹟)으로는 덕수궁 미술관 소장의 《관폭도(觀瀑圖)》, 《투기도(鬪碁圖)》, 《심산 행려도(深山行旅圖)》, 《어정산수도(漁艇山水圖)》, 《기려인물도(騎驢人物圖)》, 《노엽달마도(蘆葉達摩圖)》, 《은사도(隱士圖)》, 개인 소장의 《누각산수도(樓閣山水圖)》, 《수로예구도(壽老曳龜圖)》, 《달마도(達磨圖)》 등이 있다.

<설중귀려도>

일본에 통신사로 갔을 때 그에게 그림을 청탁하는 사람들은 많아도 너무 많았다. 전 열도가 김명국에 열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가는 곳마다 그를 졸졸 따라다니는 일본인과, 통신사가 머무는 숙소 앞에는 긴 줄이 밤늦도록 줄어들 줄 몰랐다. 통신 부사 김세렴(金世濂)은 1636년 11월 14일 자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왜인들이 밤낮으로 모여들어 괴로움을 견디지 못한 김명국은 심지어 울려고까지 했다.” 대갓집 벽화(壁畫) 사건은 일본에서 있었던 일화이다. 이 이야기는 청죽 남태응(聽竹 南泰鷹)의 <청죽화사(聽竹畵史)>에 나오는 내용(內容)이다. 연려실 이긍익(燃藜室 李肯翊 : 1736~1806)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도 축약(縮約)되어 재록(再錄)돼 있는 내용(內容)이다. 연담(蓮潭) 김명국이 통신사(通信使)를 따라 일본(日本)에 갔더니 온 나라가 물결일 듯 떠들썩하여 김명국(金明國)의 그림이라면 조그만 조각이라도 큰 구슬을 얻은 것처럼 귀(貴)하게 여겼다. 한 왜인(倭人) 권력자가 그를 그림을 그려 달라고 초청했다. 잘 지은 세 칸 별채의 사방 벽(四方 壁)을 좋은 비단(緋緞)으로 바르고 천금(千金)을 사례비(謝禮費)로 하여 연담(蓮潭)을 맞아 벽화(壁畵)를 그려 달라고 부탁(付託)했다. 그러자 김명국(金明國)은 먼저 술부터 찾았다. 양(量)껏 마신 다음 취기(醉氣)에 의지(依支)하여 비로소 붓을 찾으니 왜인(倭人)은 금가루(泥金) 즙(汁)을 담은 주발(周鉢)을 받들어 올렸다.

<수노인도>

김명국(金明國)은 그것을 받아 한 입 가득 들이킨 다음 벽(壁)의 네 모퉁이에 뿜어서 그릇을 다 비워버렸다. 왜인(倭人)은 깜짝 놀라고 또 크게 화가 나서 칼을 뽑아 꼭 죽일 듯하였다. 그러자 김명국(金明國)은 크게 웃으면서 붓을 잡고 벽(壁)에 뿌려진 금분(金粉) 가루를 쓸 듯이 그려가니 혹(或)은 산수(山水)가 되고 혹(或)은 인물(人物)이 되었다. 깊고 얕음과 짙고 옅음의 설색(設色)이 손놀림에 따라 천연(天然)스럽게 이루어져 채색(彩色)이 더욱 뛰어나고, 더욱 기발(奇拔)하였으며, 필세(筆勢)가 힘차게 살아 움직이는 것이 잠시(暫時)도 머무는 데가 없는 것 같았다. 작업(作業)이 끝나고 나니 아까 뿜어졌던 금분(金粉) 가루의 흔적(痕迹)은 한 점(點)도 남아 있지 않고 울창(鬱蒼)한 가운데 약동(躍動)하는 모습이 마치 귀신(鬼神)의 도움으로 된 것 같았다. 김명국(金明國) 평생(平生)의 득의작(得意作)이었다. 왜인(倭人)은 놀랍고 기뻐서 머리를 조아려 몇 번(番)이고 사례(謝禮)를 할 따름이었다. 왜인(倭人)은 이 별(別)채를 잘 보호(保護)하여 나라의 볼 만한 구경거리로 삼으니, 멀고 가까운 데서 소문(所聞)을 듣고 다투어 모였다. 이것을 돈을 내고 보도록 하니 몇 년(年) 안 되어 공사비(工事費)가 다 빠지게 되었다. 그 왜인(倭人)의 자손(子孫)들은 잘 보존(保存)하고 있으며, 혹(或) 다치기라도 할까 봐 기름막(油幕)으로 덮어두고 있다고 한다. 우리 사신(使臣)이 가면 반드시 먼저 열어 보이면서 이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한다. 남태응이 이 글을 쓸 때까지는 잘 보존돼 왔던 모양인데, 지금은 없어진 모양이다. 한편 그는 통신사의 일행으로서 인삼의 밀무역에 관여하거나, 일본에서 돈을 좇아 공무를 제치고 사인(私人)들의 그림을 그려주느라 눈총을 많이 받았다. 귀국 후에 처벌도 받았다.

<신선도>

그의 그림에 관한 일화 하나가 더 있다. 이 이야기는 뇌연 남유용(雷淵 南有容 : 1698~1773)의 <뇌연집(雷淵集)>에 나오는 것으로 위암 장지연(韋庵 張志淵 : 1864~1920)의 <진휘속고(震彙續考)>에 재록(再錄)되어 있기도 하다. 어느 날 인조(仁祖)가 김명국(金明國)에게 노란 비단(緋緞)을 바른 빗첩(帖)에 그림을 그려 올리라고 명(命)하였다. 열흘이 지난 후(後) 비로소 빗첩(帖)을 올렸는데 아무리 봐도 그림이 없었다. 인조(仁祖)는 화가 나서 벌(罰)을 주려고 불렀더니, 연담(蓮潭)은 “신(臣)은 분명(分明)히 그림을 그려 넣었습니다. 다음날 저절로 알게 될 것입니다.”라고 대답(對答)했다. 다음날 공주(公主)가 머리빗 가장자리에 이가 두 마리 붙어 있는 것을 보고 손톱으로 눌러 죽이려 했으나 좀처럼 죽지 않아 자세(仔細) 히 보았더니 그것이 그림이었다고 한다. 아무리 성격이 호방한 화가라지만 천하의 공주가 사용하는 머리빗에 이를 그려 넣는다는 것이 상상이 되지 않는다. 솔거의 황룡사 소나무 그림이나 신사임당의 꽃 그림처럼 새들이나 나비가 날아와 앉으려 했다는 얘기와 비슷하다니 말이다. 그의 실력을 과찬하는 지어낸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탐매도>

남태응이 그의 저서에서 세 화가에 대한 평가를 하면서 <삼화가유평(三畵家喩評)>을 쓴 내용이다. 문장가에 삼품(三品)이 있는데, 신품(神品) 법품(法品) 묘품(妙品)이 그것이다. 이것을 화가에 비유해서 말하면 연담(蓮潭) 김명국(金明國)은 신품에 가깝고, 허주(墟舟) 이징(李澄)은 법품에 가까우며,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는 묘품에 가깝다. 학문에 비유하자면 김명국은 태어나면서 아는 것이고(生知), 윤두서는 배워서 아는 것이며(學知), 이징은 노력해서 아는 것이다(困知). 그러나 그것은 이루어지면 모두 한가지이다. 조선 필가(筆家)에 비유하자면 김명국은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류이고, 이징은 석봉(石峯) 한호(韓濩)류이며, 윤두서는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 류이다. 김명국의 폐단은 거침(麤 : 추)에 있고, 이징의 폐단은 속됨(俗)에 있고, 윤두서의 폐단은 작다(細)는데 있다. 작은 것은 크게 할 수 있고, 거친 것은 정교하게 할 수 있으나, 속된 것은 고칠 수 없다. 김명국은 배울 수가 없으며, 윤두서는 배울 수 있으나 능숙하게 할수 없고, 이징은 배울 수 있고 또한 능숙할 수 있다. 김명국은 마치 바다 위의 신기루처럼 결구가 그윽하고 심오해서 바탕과 기교가 변화가 심해서 그 제작을 상세히 설명할 수 없다. 떠있음이 일정치 않고, 보이고 사라짐이 일정하지 않으며, 그 방향을 가리킬 수 없다. 바라보면 있는 것 같으나 다가서면 없어지니, 그 멀고 가까움을 헤아릴 수 없어서, 이와같은 것은 잡으려 해도 얻을 수 없고, 황홀하여 묘사하기 어려우니 그것을 가이 배울 수 있겠는가? 윤두서는 마치 공수반(公輸般)이 끌을 잡고 사람의 상을 만드는 것과 같아서, 먼저 몸체와 손발을 만들고 그 다음 이목구비를 새기는데, 공교로움을 다하고 극히 교묘하게 본떠서 터럭 하나 사람과 닮지 않은 것이 없으나 아직 부족하다. 하여 급기야 그 속에 기관(機關)을 설치하여 스스로 발동하게끔 함으로써 손은 쥘 수 있고, 눈은 꿈적거릴 수 있고, 입은 열고 벌릴수 있게 한 다음에야 참모습과 가상(假像)이 서로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조화를 얻어 낸것과 같다. 그러니 기관이 발동하기 이전까지는 아직 배울 수 있으나 그 이후는 불가능 할 것이다. 이징은 마치 큰 장인(大匠)이 방을 만들고 집을 지을 때 짜임새가 법규에 부합하지 않음이 없는 것처럼 직각자(曲尺)로 네모를 그리고, 그림쇠로 원을 만들고 먹줄로 수평과 수직을 잡되 대단한 설계와 대단한 기교(機巧)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공사를 마치고나면 규모가 다 정연하여 법도에 부합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으되 모두 인공(人工)으로 가이 미치는 바이다. 이런 이유로 배울 수 있고 또 가능하다고 이르는 것이다. 이렇게 평하고 다음과 같이 추가 했다. 김명국은 그 재주를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고, 공교로운 솜씨를 끝까지 구사하지 않았다. 이런 연유로 비록 신품이라도 거친 자취를 가릴 수 없었다. 윤두서는 그 재주를 극진히 다했고, 그 공교로운 솜씨를 끝까지 다했다. 그래서 묘하기는 하지만 난숙함에서는 조금 모자랐다. 허주는 그 재주를 다하고 그 솜씨를 다했으며 난숙하기도 하다. 그러나 다만 법도 밖에서는 더불어 논할 수 없다.

<은사도(隱士圖)>

위는 그의 은사도(隱士圖)이다. 다른 그림과 달리 <달마도>와 함께 아호(雅號)를 취옹(醉翁)이 아닌 연담(蓮潭)으로 썼다. 그림 위에 초서로 활달하게 화제시(畵題詩)을 일필휘지해 놓았다.

將無能作有 (장무능작유) / 없는 것을 가지고 있게 만드려하니

畵貌豈傳言 (화모개전언) / 모양은 그리지만 어찌 말을 전하나?

世上多騷客 (세상다소객) / 세상엔 시인들 많으니

唯招已散魂 (유초이산혼) / 누가 이미 흩어진 혼을 부를까?

달마도와 각종 불화를 많이 그려서 그런지 그의 화제시 조차도 금삿갓에게는 선승(禪僧)의 오도송(悟道頌) 처럼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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