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부처님 오신 날과 어린이날이 겹쳐서 4일 연휴가 후딱 지나갔다. 불탄일(佛誕日)을 지나면서 옛사람 이야기를 불교 관련 인사로 정해서 기록해 본다. 1834년 조선조 말엽. 지금의 해남 대흥사(大興寺) 산내 암자인 진불암(眞佛庵)에는 당시만 해도 70여 명의 스님들이 참선 정진하고 있었다. 현재의 규모는 작으나 조선 중기에는 영곡(靈谷)·영파(影波)·만화(萬化)·운담(雲潭)·아암(兒庵) 등의 고승들이 머물렀던 유서 깊은 암자이다. 어느 날 이 암자의 조실 스님께서 동안거(冬安居) 입제(入制) 법어(法語)를 하고 있는데, 마침 어린 종이장수가 종이를 팔려고 절에 왔다. 대중 스님들이 모두 법당에서 법문을 듣고 있었으므로 종이장수는 누구한테도 말을 건 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먼 길을 걸어왔는데, 그냥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법당 안을 기웃거리다 법문 하시는 조실 스님의 풍채에 반해 자기도 모르게 법당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바로 속성(俗姓)은 최씨에 이름은 창호로 완도군 군외면 범진에서 아버지는 최철(崔徹), 어머니는 성산 배(裵)씨 사이에 태어났다. 집안이 어려워 일찍부터 장사 길로 나섰던 것이다. 그는 스님들 맨 뒤쪽에 앉아 법문을 들었는데,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훌륭한 스님이 하신 거룩한 말씀이라고 생각했다. 리고 대중 스님들의 경건한 모습이며 법당 안의 장엄한 분위기가 종이장수 최씨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나도 출가하여 스님이 될 수 있으면 종이장사를 하지 않아도 되고 오죽 좋을까?” 내심 이런 생각에 잠겼던 그는 결심을 한 듯 법회가 끝나자 용기를 내어 다짜고짜 조실 스님을 찾아가서 엎드려 절을 했다.
“스님, 저는 떠돌아다니며 종이를 파는 최창호라 하옵니다. 오늘 종이를 팔러 이곳에 들렀다가 스님의 말씀을 듣고 불현듯 저도 입산수도 하고픈 생각이 들어 불쑥 스님을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조실 스님인 호의 시오(縞衣 始悟) 스님은 그를 바라만 볼 뿐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러면 그렇지. 종이 장수 주제에 종이나 팔면서 살 것이지 스님은 무슨 스님. 이런 말을 한 내가 잘못이지.’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가타부타 말을 한마디 듣고자 더 앉아 있어도 스님은 그저 눈을 지그시 감고 좌선(坐禪)에 들어가서 꿈적도 없다. 해는 뉘엿뉘엿 저물어 가는데, 그도 마음을 고쳐먹어야 했다. 빨리 하산하여 인근 마을에서 오늘 못한 장사를 벌충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스님께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일어나서 문지방을 막 넘으려는데 스님의 호령이 떨어졌다. “네 이놈, 불문에 들겠다는 생각이 그리 쉬이 가셔서 어찌 도반이 되겠다는 게냐? 마음이 변한 게 없다면 이 발우를 들고 가서 공양간(供養間)에서 일을 배우거라.” 그래서 그는 지고 온 종이들을 공양간 옆방에 부려놓고, 그날부터 절집의 허드레 일을 도맡아 하기 시작했다. 그날로 최행자(崔行者)가 된 그는 물을 긷고, 나무를 하고, 바ᆞ갑도 짓고, 빨래하고, 장작 패고, 터 밭을 가꾸는 등 온갖 일을 하는 틈틈이 염불(念佛) 공부를 시작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그는 다른 일을 손에 익어 잘 처리하는데, 염불은 통 외우 지를 못했다. 더구나 글자를 모르는 무식한 처지라서 책을 볼 수도 없고, 다만 다른 스님들이 외우거나 읽는 것을 귀동냥으로 습득해야 하니 더욱 힘들었다.
듣고 따라서 외우고 뒤돌아서면 잊어버리고, 또 외워도 그때뿐이었다. 스님들은 그를 바보라고 수군대며 놀려댔다. 그래도 최행자는 꾹 참고 노력에 노력을 해 봤으나 허사였다. 입산한 지 1년이 지났으나 그는 260자의 짧은 반야심경(般若心經) 조차도 못 외웠으니 수계는 꿈도 꾸지 못할 처지였다. 매일 일만 하다 허송세월하는 자신의 우둔함을 탓하면서 그만 하산하기로 결심하기에 이른다. 며칠을 고민하다가 드디어 용기를 내서 조실 스님을 찾아갔다. “큰스님, 저는 아무래도 절집과 인연이 없나 봅니다. 1년이 지나도록 염불 한 줄 외우 지를 못하니 다시 마을로 내려가 종이 장사나 하겠습니다.” 최행자의 심각한 고민을 다 들은 조실 스님은 빙그레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너무 심려치 말고 공부를 계속하여라. 옛날 부처님 당시에도 너 같은 수행자가 있었는데, 열심히 공부하여 깨달음을 얻었느니라.”라고 했다. 그리고 옛날 인도에서 부처님을 찾아가 수행하던 판타카(Panthaka, 半託迦) 형제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며 최행자를 위로했다. 파타카란 ‘길에서 출생한 아이’라는 뜻이고, 마하는 ‘큰길’, 출라는 ‘작은 길’을 의미한다. 부처님의 제자 중에 형 마하 판타카(Maha Panthaka)와 함께 출가한 출라 판타카(Chula Panthaka)는 아무리 부처님께서 법문을 설하여도 기억하질 못했다. 형은 똑똑하여 모든 면에 뛰어났는데, 동생은 대중 스님들로부터 바보라고 놀림을 받게 됐다. 그러자 형이 그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판타카는 울면서 부처님 곁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때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판타카야, 내 말을 기억하거나 외우는 일은 그렇게 소중한 일이 못된다. 오늘부터 너는 절 뜰을 말끔히 쓸고 대중 스님들이 탁발에서 돌아오면 발을 깨끗이 닦아주어라. 이처럼 매일 쓸고 닦으면 얻는 바가 있을 것이니라.”라고 일러주셨다.
출라 판타카는 그날부터 정사(精舍)의 뜰을 쓸고 스님들의 발을 씻어 주었다. 판타카가 잊고 있으면 대중 스님들은 대야에 물을 떠 가지고 와서 거만스럽고 비아냥거리며 닦으라고 더러운 발을 내밀었다. 그렇게 여러 해가 지난 어느 날 아침에 판타카는 마당을 쓸던 빗자루를 땅바닥에 홱 내던지면서 크게 깨달았단다. 수년간 밑바닥 일을 하면서 번뇌와 업장을 씻은 결과 자기도 모르는 사이 모든 사리가 통하게 된 것이다. 부처님은 그 길로 큰 북을 울려서 출라 판타카의 득도를 알리고 같이 기뻐했단다. 어느 날, 비구니들만 수도하는 승방에서 법회가 있었다. 비구니들은 법상에 올라가 설법을 할 수 없었기에 보름마다 반드시 비구를 초빙하여 법문을 들어야 했다. 그날도 비구니들은 부처님께 청을 올려 법문 할 비구를 보내달라고 했다. 부처님은 출라 판타카를 선택하여 보냈다. 그러자 대중들은 수군거렸다. 도대체 출라 판타카 같은 바보 멍청이가 어떻게 법문을 할 수 있겠느냐는 거였다. 그러나 그는 불평 한마디 없이 여승방으로 향했다. 승방에서는 이미 출라 판타카가 법사로 온다는 전갈을 받았다. 그녀들은 바보로 소문난 그를 골려 주자고 의견을 모았다. 부처님께서 선택하여 보내 준 비구이니 내놓고 불평은 할 수 없었고, 그녀들끼리 그렇게 은밀히 작정을 했던 것이다. 출라 판타카가 승방에 도착해 보니, 설법하는 법단이 지나치게 높았다. 비구니들이 법사가 올라갈 수 없도록 일부러 높게 설치한 것이었다. 그는 이미 깨달음을 얻어 아라한이 되어 있었기에 그녀들의 심중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가 팔을 들어 손을 뻗자 그의 팔이 갑자기 늘어나 한 길이 넘는 법단 위까지 닿고, 약간 힘을 가하자 그 높은 나무 법단이 납작해졌다. 그는 법단에 올라앉았다. 법단은 본래대로 높아졌다. 마치 용수철을 이용한 것처럼 낮았던 법단이 높아진 것이다. 비구니들은 내심 크게 놀랐다. 하지만 법문이야 별 게 있으랴 싶었다. 그러나 비구니들은 다시 한번 놀랐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법문은 구구절절이 모두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었으며 논리적이고 정확했다. 비구니들은 그제야 그를 공경하게 되었다. 그 어떤 비구보다도 가장 존경하게 되었다. 그는 16 아라한 중의 한 명이 된 것이다.
조실 스님의 이야기를 다 들은 최행자는 자기도 판타카와 같은 수행인이 되기로 마음을 다졌다. 그는 후원 일을 도맡아 하면서 <천수경>을 외우고 또 외웠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조실 스님이 막 잠자리에 들었는데 밖에서 환한 불빛이 비쳤다. 이상스럽게 생각하고 문을 열어 보니 최행자 방에서 발광이(發光) 일어나고 있었다. 조실 스님은 감격스러웠다. 최행자는 곤하게 잠들어 있는데 그가 보던 <천수경>에서 경이로운 빛이 발하고 있는 것이다. 또 그다음 날은 다른 이변이 일어났다. 글 한 줄 못 읽던 최행자가 천수경뿐 아니라 무슨 경이든 한 번만 보면 읽고 줄줄 외웠다. 이것이 그와 관련된 설화(說話)인지 실화(實話)이지 알 듯 모를 듯 전해온다. 불교에 이런 설화는 일찍이 중국의 선종(禪宗)에서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땔나무 장수 출신의 혜능선사(慧能禪師)가 그 으뜸이다. 그는 입적하면서 전신이 불상으로 굳어서 육신불 또는 진신불상이 되었다. 그의 구체적인 행적을 보면 이렇다. 그의 이름은 각안(覺岸)이요, 자(字)는 환여(幻如) 혹은 청해인(淸海人)이다. 범해(梵海)는 그의 호(號)이며 실명(室名)이기도 하다. 그는 신라 명유(名儒) 최치원의 후예라는데, 확실하지는 않다. 조선시대 은사(隱士)였던 최수강(崔壽崗)의 6대 손이다. 아버지는 부모는 앞서 밝힌 바와 같다. 어느 날, 그의 어머니는 꿈에 연못의 흰 물고기를 본 이후 범해를 잉태하였다. 이 태몽 때문인지 태어난 범해의 사타구니의 좌우 밖으로 희고 긴 무늬가 번쩍거렸고, 평소 물고기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아명도 어언(魚堰) 혹은 초언(超堰)이라 하였다. 그의 아명도 태몽과 깊은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14세에 대둔사 한산전에서 출가하여, 16세에 호의(縞衣) 시오(始悟, 1778~1868)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그는 하의 정지(荷衣 定智) 스님과 초의 의순(草衣 意恂) 스님뿐만 아니라 문암(文菴) 영유(永愈), 운거(雲居) 채인(綵仁), 응화(應化) 같은 선사들에게 참학 했다. 하의(荷衣) 정지(正持)는 그의 설계사(說戒師)이며 묵화(黙和) 준훤(俊暄)이 그의 수계사(授戒師)이다. 화담(華潭) 영원(永源)이 그의 증계사(證戒師)이고, 초의(草衣) 의순(意恂)에게 비구계와 보살계를 받았으며, 호의 시오가 그의 전법사였다. 특히 그는 통감사기(通鑑私記)를 쓸 정도로 역사의식이 뚜렷했다. 저서로는 <동사열전(東師列傳)>을 비롯하여, <범해선사유고(梵海禪師遺稿)>, <경훈기(警訓記)>, <유교경기>, <사십이장경기>, <시략기>, <통감기>, <진보기>, <박의기(博儀記)>, <사비기(四碑記)>, <명수집(名數集)>, <동시선(東詩選)>, <은적사 사적기> 등 20여 편이 있으나 모두 간행되지 않은 것 같다. 22년 동안 경전을 수많은 강의 하였다. 1896(고종 33)년 12월 26일에 77세, 법랍 65세로 입적하였다.
불교 얘기만 할 게 아니라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과 교류가 깊었고 <동다송(東茶頌)>을 지어서 우리 차의 비조로 일컫는 초의선사의 제자이다 보니, 그도 차에 대한 식견과 저술이 제법 있다. 금삿갓은 바로 이런 부분을 조금 들춰내서 알아보고자 하는 것이다. 범해는 임자년(1852) 6월에 이질에 걸렸다. 약이 귀하던 시절, 위생 상황도 좋지 않은 사찰의 식생활에서 자연스러운 발병일 수도 있다. 당시 그는 이질로 인해 기력을 잃고 사경을 헤매고 있었는데, 사형인 무위(無爲)의 권유로 차를 달여 마셨다. 이후 가을에 남암(南庵)에서 몸이 회복되는 과정을 상세히 기술한 것이 바로 <차약설(茶藥說)>이다. 차가 바로 약이라는 이 글은 그가 거의 달포 이상을 이질로 고생을 했던 경험담을 쓴 것이다. 이 글에 의하면 대흥사는 차가 나는 곳인데도 범해가 병이 났을 때 쓸 차가 없었다고 하니 당시 차는 귀한 물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치료 과정을 이렇게 기술했다.
一椀腹心小安(일완복심소안) / 한 잔을 마시니 뱃속과 마음이 조금 편안해지고
二椀精神爽塏(이완정신상개) / 두 잔을 마시니 정신이 상쾌해졌으며
三四椀渾身流汗淸風吹骨(삼사완혼신류한청풍취골) / 서 너 잔을 마시고 나니 온몸에서 땀이 흐르고, 맑은 바람이 뼈에 부는 것 같았다.
快然若未始有病者也(쾌연약미시유병자야) / 상쾌하여 마치 처음부터 병이 없었던 것 같았다.
由是食飮漸進振作日勝(유시음식점진진작일승) / 이로 말미암아 먹고 마시는 것이 점차 나아져서, 떨쳐 일어나는 것이 날마다 나아졌다.
이 시절은 모든 차가 자연산으로 채취하기가 어려워서 거의 약용으로 쓰였을 것이다. 아무튼 약이든 차든 그 효용에 맞게 쓰는 것이 중요하다. 이로부터 범해 각안 스님은 차에 빠져서 차에 관한 시와 글을 여러 편 쓰게 된다. 그중 한시(漢詩)를 공부하는 금삿갓의 눈에는 그가 지은 43구(句)의 장시(長詩)인 <차가(茶歌)>가 돋보인다.
如何奇正力書與我傳(여하기정력서여아전) / 어이해야 형편에 따라 힘껏 써서 나와 함께 전할까.
차에 관한 장시(長詩)는 여럿이 있다. 특히 초의선사의 <동다송(東茶頌)>의 장시는 68구(句)로 매우 길고, 칠언(七言)이 주를 이루지만, 중간중간에 구언(九言)과 11 언도 섞여 있다. 근체시(近體詩)의 형식이나 내용과는 부합하지 않지만 당시의 기록으로 매우 중요한 사료가 될 것 같다. 차 생활을 즐겼던 귤산(橘山) 이유원(李裕元)의 <죽로차(竹露茶)>는 54구(句) 장시임에도 모두 칠언이고 53구만이 구언으로 죽로차의 제다기법인 증구포구(蒸九曝九)를 언급하고 있다. 초의선사의 이렇게 긴 시에 조선의 토종차에 대한 언급은 4구(句)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에 범해의 이 장시는 칠언(七言) 42구에 9언(九言) 1 구로 되어 있다. 시의 내용도 차의 효용에서 차의 명산지, 차를 즐기는 도반들을 비교적 소상하게 소개하고 있다. 그의 시 내용으로 보면, 보림사의 작설차와 화개의 진품차는 최상급으로 왕실과 고관대작(高官大爵)들에게 공물(貢物)로 바쳐졌던 것 같다. 그 외에 함평·무안·강진·해남·광주 서석산·덕룡산·월출산 등의 차명산지를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차를 즐긴 중부(中孚:艸衣)·리봉(离峯)·무위(無爲)·예암(禮庵)·남파(南坡)·영호(靈湖)·제산(霽山)·언질(彦銍)·성학(聖學)·태연(太蓮) 등 10명의 도반 이름이 거론된다. 그는 또한 스승 초의선사의 차에 대한 증언으로 <초의차(草衣茶)> 시를 남겼다. 그 외에도 <다구명(茶具銘)>, <적다(摘茶)>와 <제다(題茶)>도 있다. 그의 <다구명(茶具銘)>를 마지막으로 음미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