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4년(연산군 10년) 여섯 살 난 어린아이가 한 살 많은 형과 함께 충청도 괴산으로 도망길에 올랐다. 이들은 바로 이준경(李浚慶)과 형 이윤경(李潤慶)이었다. 그들의 할아버지 이세좌(李世佐)는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廢妃) 윤 씨에게 사약(死藥)을 가져갔던 인물이다. 그는 연산군 9년(1503년) 9월 11일 인정전(仁政殿)에서 열린 양로연(養老宴)에서 연산군이 술을 하사할 때, 실수로 어의(御衣)에 술을 엎질렀다. 이 일을 기화로 15일에 예조판서에서 파직시키고, 계속 물고 늘어져서 9월 20일에 전라도 무안, 온성, 거제 등으로 유배를 보냈다. 술을 엎은 것이 죄가 되기보다 갑자사화(甲子士禍)를 일으키려는 서곡(序曲)을 울린 것이다. 연산군은 이세좌의 유배 과정을 철저히 추적하고, 그의 죄를 두둔한 자나 처벌하라고 주장하지 않은 신료들을 철저하게 응징한다. 마치 손 안 대고 코를 푸는 방식이다. 1504년 5월 2일 이세좌의 머리와 사지(四肢)를 베어 와서 머리에 글을 써서 붙여서 매달도록 했다. 그리고 이틀 뒤에 그의 아들 4형제(수원, 수형, 수의, 수정)를 군기시(軍器寺) 앞에서 참형(斬刑)에 처했다. 참형당한 4형제의 막내 이수정(李守貞)이 이준경의 아버지이다. 이준경의 어머니 신가이(申加伊)는 내자시(內資寺)의 노비로 갔다가 다시 장숙용(張淑容) 즉 장녹수(張綠水)의 사노비로 보내진다. 조상들의 공신첩도 모두 회수되고 재산과 노비들도 모두 빼앗긴 것은 당연하다. 유모 손에 이끌려 도망 온 이준경은 어린 나이에 유배 생활을 하는데도 남달리 특이했다. 그 시절의 일화가 그의 저서 <동고유고(東皐遺稿)> 연보에 실려 있다. 귀양 가서 1년이 지난 때 일이다. 하루는 집주인의 실화(失火)로 준경 형제의 낡은 솜옷이 모두 불에 타버렸다. 이웃사람들이 찾아와 위로의 말을 했고, 유모도 준경의 손을 잡고 울었다. “이제 낡은 솜옷마저 불에 타 없어졌으니 도련님, 추워서 어떻게 겨울을 나겠습니까?” 그러자 준경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말했다. “이 옷은 이와 벼룩이 득시글거려 항상 괴로웠는데 불에 다 타버렸으니, 이제 밤잠을 편히 잘 수 있을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 말하는 모습이 태연하여 듣는 이들이 기이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이준경은 8세 때인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유배에서 풀려나 서울로 돌아왔다. 그리고 노비 생활을 하던 어머니와도 다시 만나게 되었다. 어머니 신씨는 ‘과부가 키운 자식’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해 윤경·준경 형제를 대단히 엄하게 가르쳤다. 그녀는 부친 신승연(申承演)으로부터 학문을 익혀서 아들 형제에게 직접 <효경(孝經)>과 <대학(大學)>을 가르쳤다. 신승연(申承演)은 늘 신씨에게 “이 아이들은 봉추(鳳雛)와 기자(麒子)로 세상에 이름을 떨칠 훌륭한 인물이 될 것이니 잘 가르치고 보호하라”라고 당부하곤 했다. 윤경·준경 형제에게는 15살 위의 사촌형인 이연경(李延慶·1484~1548년)이 있었는데, 그도 같은 시기에 유배를 갔다가 이때 풀려났다. 이연경은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당시의 신진 사림(士林)들과 가깝게 지냈다. 1519년 현량과에 급제해 사헌부와 홍문관의 요직을 두루 거쳤으나 같은 해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중종이 이연경은 연산군 때 화(禍)를 입은 집안의 자손이라 하여 특별히 그의 이름을 삭제해 준 덕에 무사할 수 있었다. 이후 이연경은 공주에서 은거하면서 성리학과 양명학 등을 두루 공부했고 그의 학문적 명망을 듣고 찾아온 노수신(盧守愼)과 강유선을 사위로 삼기도 했다. 이준경이 훗날 성리학이 기본임에도 다른 학문에 대해 개방적 태도를 보일 수 있었던 것은 이연경으로부터 받은 영향이 컸다. 기묘사화가 일어났을 때 이준경은 스물두 살이었다. 이미 사화를 온몸으로 겪어서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적 방황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각 분야의 많은 사람과 교유를 하며 20대를 보냈다.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년)과의 깊은 교감도 이때 이루어졌다. 조식에게는 <심경(心經)>을 선물하기도 했다. 훗날 이준경은 술학(術學)에도 깊은 조예를 보이는데, 이 시기에 접한 공부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학문의 덕으로 그는 사람 보는 눈이 아주 남달리 뛰어났다.
이준경은 33세 때인 중종 26년(1531년) 마침내 문과에 급제하고,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33세 때인 중종 29년(1534년) 문과에 2등으로 합격했다. 이들은 늦은 나이에 합격했지만 당시의 정치적 관계에서 연결되어 있었다. 권간(權奸) 김안로(金安老·1481~1537년)가 퇴계 이황을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에서 한직인 승문원(承文院)으로 좌천시킨다. 퇴계가 급제 시에 인사를 오지 않았다는 이유와 그의 장인 권질(權礩·1483~1545년)이 바로 안처겸 사건과 연루되어 경상도 예안(현 경북 안동)에 유배 중이라는 것과 권질의 동생 권전은 신사무옥(辛巳誣獄) 때 고문을 당해 죽었는데, 이런 인척관계가 이유였다. 이준경은 이 사건의 억울함을 호소하다가 김안로에게 당하여 파직된 것이었다. 중종 32년 김안로 등의 실각 이후 이준경은 복귀하여 홍문관(弘文館) 응교(應敎)였고, 퇴계는 홍문관 수찬(修撰)으로 선후배의 연을 맺었다. 이들은 홍문관과 사헌부를 옮겨 다니면 선후배의 정을 키웠다. 이들이 의기투합해서 중종에게 학문과 정치, 민생을 바로잡을 것을 청하는 유명한 상소(上疏)를 올린다. ‘일강구목소(一綱九目疎)’가 그것이다. 일강, 즉 가장 중요한 원칙은 ‘치중화(致中和)’로 올바른 화합의 정치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한 구체적인 실천 방침이 바로 구목이다. 첫째, 궁궐 내의 기강은 엄격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되고(宮禁不可不嚴), 둘째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고(紀綱不可不正), 셋째 인재를 잘 가려서 쓰고(人才不可不辨), 넷째 제사를 근엄하게 거행하고(祭祀不可不謹), 다섯째 백성의 곤궁함을 구제해 주고(民隱不可不恤), 여섯째 백성을 일깨우는 일을 밝게 하고(敎化不可不明), 일곱째 형벌을 신중하게 하고(刑獄不可不愼), 여덟째 사치는 금하고(奢侈不可不禁), 아홉째 신하들이 간하는 의견을 받아들여야 된다(諫諍不可不納)는 것이다. 이준경은 이황, 이언적과 같은 도학자들이 왕에게 도학정치를 권면한 사례이다.
이준경의 인재 등용에 대한 일면을 살펴보자. 이준경이 홍문관 부제학으로서 성균관 공천(公薦)의 문란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상소인 차자(箚子)를 올린다. 이준경이 병조 판서로 있을 때, 권신 이기(李芑)가 무인들의 뇌물을 많이 받고, 병사(兵使), 수사(水使) 및 첨사(僉使), 만호(萬戶) 등의 자리가 비면 그들의 명단을 적어 정청(政廳)으로 보내어 이들을 주의(注擬)하게 했다. 그러나 이준경이 들어주지 않았다. 이에 이기가 앙심을 품고 이준경을 무고해 관직을 삭탈당하기도 했다. 1554년(명종 9) 이조 판서로 재직하고 있을 당시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이 찾아와 인사 문제로 부탁을 하자 “왕자가 사대부 집에 드나드는 것은 옳지 못하다.”라며 거절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의 아들이 홍문관 관리 후보로 올라왔을 때 이를 삭제해 두고두고 후세의 귀감이 되었다. 당시 영의정이던 이준경은 자신의 아들이 홍문관 관리 후보로 오르자 “내 아들이라서 누구보다 그릇이 안 된다는 것을 잘 안다.”며 명단에서 지워 버렸다. 조선 시대 최고 엘리트 코스가 홍문관이었던 점을 생각하면 실로 공평하고 절도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후에도 이준경은 자신의 아들들을 요직에 앉히려는 조정 중신들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 평안 감사로 재직할 당시 권신(權臣) 윤원형(尹元衡)이 그에게 무관직 인사를 청탁한 일이 있었다. 대놓고 거절할 경우 화를 입을 것을 고려해 수를 썼는데, 아전에게 청탁의 당사자를 데리고 올 때 감영 내를 몇 바퀴 빙빙 돌다가 오게 한 것이다. 들어온 그를 보고 이준경은 “이 동헌이 어느 방향이냐?”라고 물었는데, 평양 감영 같은 큰 관아를 한참이나 빙빙 돌다가 온 그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대감이 추천한 인사가 동서남북을 분간 못하는 사람이라 쓸 수가 없다.”는 이유로 인사 청탁을 거절해 버렸다. 실록에 따르면 훗날 명종이 자식 없이 승하하자 조카인 하성군(河城君 : 선조)을 상주로 모셔올 때 요행을 바라는 무리가 몰려들어 하성군의 수레 뒤를 따랐다. 이들의 이름을 기록한 것이 한 두루마리나 되었는데, 어떤 자가 이들을 녹고(錄功) 하자고 했지만, 이준경은 말하기를 “하성군의 보위는 예전에 결정된 일인데 신하가 무슨 공이 있단 말인가?” 하고 문서를 불태워 버리게 했다. 이준경의 강직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외에도 이준경은 병조 판서 시절 휘하에 있던 장수 방진(方震)이 무남독녀 사윗감으로 고민하고 있을 때 벼슬 없는 포의(布衣)의 이순신(李舜臣)을 추천했다고도 한다. 인재를 보는 눈이 가히 남달랐음을 짐작할 수 있다. 상세한 내막을 들여다보자.
이준경의 사촌형 이연경은 장수 방진(方震)도 가르쳤다. 방진은 이준경보다 16살이 어리지만 동문수학의 후배이다. 이준경은 이순신의 할아버지 이백록(李百祿), 방진의 아버지 방국형(方國亨)과는 1522년 사마시 동방(同榜) 급제의 관계이다. 그러니 세 사람은 친구인 셈이다. 이백록은 말단 한직이지만, 불법상가 단속 관리로 재물이 생기는 자리에 있었다. 이백록은 관직에 더 오르지 못하고 일찍 죽고, 이준경이 옛 친구 아들(李貞) 집에 우연히 들렀다가 열두어 살 되는 이순신이 자기 친구들에게 한문을 가르쳐 주는 것을 목격하고 “참, 기특한 아이로구나!” 하고 기억에 남겨 두었다. 이순신은 서당에 못 가는 평민 이하 아이들에게, 그날 배운 한문을 가르쳐 주고 있었던 것이다. 이준경은 문인이면서도 을미왜변(乙未倭變)을 평정시키면서, 병조판서가 되었다. 병조판서였을 때, 같이 전장을 누볐던 무장 방진 후배를 옆에 데리고 있었다. 방진은 온양(아산)의 대대로 이어온 명문대가로 할아버지는 평창군수를 지낸 방흘(方屹)이고, 아버지는 영동현감을 지낸 이준경의 친구 방국형(方國亨)이다. 그는 아들은 없고, 무남독녀 외딸만을 두고 있었다. 딸아이가 혼기가 차 사윗감을 고르고 있던, 방진은 직속상관이며, 동문수학 선배인 이준경에게 중매를 부탁하니, 이순신을 강력히 추천한다. 이준경은 친구의 손자이자, 10대 때 한번 보았을 때, 강력한 인상이 늘 그의 마음에 있던 그를 추천한 것이었다. 방진은 몰락한 양반 가문에 그의 별 특출한 능력도 없고 아직 과거 급제도 못한 그가 마음에 썩 들지 않았다. 그러나 거부할 수 없는 선배이자 상관이 강력히 추천하였으니 받아들인다. 그리고 자기가 무술을 가르쳐 자기처럼 무관으로 등용시키려는 마음을 먹은 것이다. 방진은 조선 시대 명궁(名弓)의 반열에 오를 만큼 유능한 장수로 무술과 병법에 능했다. 그는 심심하여, 밤이 되면 하나밖에 없는 딸에게 자기의 무술을 전수했다. 문과를 통해 등용하기 어려운 별 볼일 없는 20세 청년 이순신은 갑자기 부자가 되어 버렸다. 그때부터 데릴사위 생활을 하며, 장인으로부터 무술을 배운다. 그런데, 진짜 스승은 자기 부인이었다. 그러고 나서 12년 후 32살의 나이에 무과에 합격한다. 일찍이 인물을 알아본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일설에 따르면, 정미년(1547) 10월, 명종(明宗) 대의 명신(名臣) 이준경은 상서로운 자색 기운이 도성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나라를 떠받칠 인재가 탄생했다”며 크게 기뻐했다. 그날 한양 유동(楡洞) 천달방(泉達坊, 지금의 종로구 동숭동 부근)에서 태어난 아이 이원익(李元翼)을 두고 한 말이다. 21년이 지나 무진년(1568년). 청년이 된 그 아이가 중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자 영의정이었던 이준경은 급히 입궐해 임금에게 “장차 나라에 큰 도움이 될 이가 병으로 매우 위태합니다. 보필할 재주는 얻기 쉽지 않으니 속히 구해야 합니다.”라고 간청했다. 왕은 강삼(江蔘) 다섯 근을 내려주며 병을 치료하도록 하면서도 무척 궁금했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기에 영상이 저토록 관심을 갖는 것일까.’ 왕은 청년이 병에서 낫자마자 입궐시켜 직접 만나봤다. 얼굴은 볼품이 없었고 키도 작달막했다. ‘저런, 내가 강삼 닷 근만 낭비했구나.’라고 생각했단다. 하지만 그로부터 24년이 흘러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이제는 어엿한 조정의 대신이 돼 전란을 수습하기 위해 앞장서는 그를 보며 선조는 감탄한다. “그때 원로 이준경이 천거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구나. 참으로 나라를 떠받칠 재주를 가졌다.” <동고유고(東皐遺稿)> 중 후손들이 덧붙인 부록 ‘유사(遺事)’에 나오는 기록이다.
명종 뒤의 선조(宣祖)를 추대하는 과정에 얽힌 설화도 있다. 집안이 풍비박산(風飛雹散)이 된 이준경은 어려서부터 가난하여 나이가 들어서도 과거에 합격하지 못했다. 그러나 술학(術學)에 아주 밝아 빈궁한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아랫동서가 가장 연소자로 과거에 합격했을 때 그의 장인은 평양감사로 있었다. 동고(東皐) 이준경이 동서의 집으로 가서 묻기를 “언제 장인께 문안드리러 가겠는가?” 하니 동서가 대답하기를 “앞으로 모일에 떠날 계획입니다.” 그러자 동고는 “나도 또한 가고 싶은데 종과 말이 없네. 동서와 같이 가고 싶은데 자네의 종과 말을 빌려 주게나.” 동서는 속으로 비웃으며 마지못해 승낙하였다. 도착하기 전에 미리 통지하기를 “이서방이 새로 급제한 동서와 함께 옵니다.” 하니 평양감사 부인이 듣고서 혀를 차며 말하기를 “이서방은 염치도 없구나. 비록 곤궁하더라도 말과 마부도 준비하지 못하고 동서의 행차에 따라온단 말인가?” 마침내 그들 일행이 당도하자 평양감사인 장인은 작은 사위 장원급제를 환영할 겨를도 없이 먼저 동고의 손을 잡고 하는 말이 “내가 바야흐로 자네가 오기를 고대했는데, 속으로 자네가 탈 것을 준비 못했을까 봐 걱정했었네. 그런데 자네가 이것을 준비해 가지고 오니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라고 하였다. 이에 부인이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대감은 이서방한테만 홀리니 이상한 일이오. 대감은 큰 경사를 만난 사위를 환대하지 않고 어찌 이서방만하고 무슨 그리 급한 말이 많소?” 감사가 웃으면서 “부인은 작은 사위를 사랑하고 나는 묵은 사위를 사랑하는 것이 좋지 않소?”라고 하면서 과거 급제한 사위를 불러 몇 차례 왔다 갔다 하면서 부인으로 하여금 여러 자식들과 함께 놀게 하였다.
저녁때가 되자 나머지 가족들은 새로 급제한 사위와 잔치를 벌였으나, 감사는 큰 사위 동고와 함께 사람의 출입을 막고 함께 잤다. 나이가 어린 손자가 별당으로 가지 않고 할아버지 곁에서 잔다고 하고, 자는 척하고 엿들으니 장인과 사위가 아주 늦은 밤에 일어나 앉아서 나누는 말이 매우 길고 때로는 한탄을 나타내기도 했다. 내용은 나라를 근심하는 말들이었다. 동고가 말하기를 “이런 때에 장인은 그 일을 감당하시겠습니까?” 하니 장인이 말하기를 “아닐세, 내가 반드시 모년 모월 모일에 꼭 죽을 것이니 자네가 어찌 무관심할 수 있겠는가.” 동고가 잠잠히 한 참 있다가 “장인께서 가르쳐 주십시오.” “자네는 반드시 금년 가을에 과거 급제할 것이고, 이러이러한 때에 이르면 대신이 될 걸세. 나는 근심할 필요가 없으나 또 한 가지 난처한 일은 심통원(沈通源)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동고가 말하기를 “이것은 또한 잘 생각해야 합니다. 제가 마땅히 별당에 다 가두어 그의 계획을 행하지 못하게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장인은 무릎을 치며 감탄하여 말하였다. “자네의 생각이 이렇게까지 깊으니 나라 일에 관해서는 근심하지 않아도 되겠네. 그러니 내가 죽어도 무슨 한이 있겠는가?” 그의 손자는 이와 같은 소리를 들었으나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장인은 동고를 십여 일 동안 머물게 하여 환대하다가 작은 사위를 먼저 보내고 며칠 후 동고를 보낼 때에 백금 천냥을 주면서 “후일에 반드시 쓸 곳이 있을 것이니 그때 자네 마음대로 쓰게 하였다.” 그 해 가을에 동고는 과연 과거에 급제했고, 명종 말년에 이르러서는 영의정이 되었으며, 심통원은 국척(國戚)의 위치에 있으므로 좌상(左相)이 되었다.
당시 명종이 병이 위중했는데, 후사가 없었다. 그래서 심통원 좌상은 그 문제에 대하여 매우 관심을 갖고 있었다. 하루는 동고가 좌상과 더불어 내의원에 있으면서 심좌상에게 말하기를 “그 환약은 소매 속에 넣고 들어가서 대감께서 내어 놓으시오.”라고 하니 심좌상이 “그럽시다.”라고 대답하고, 관리로 하여금 그 환약을 가지고 가게 했다. 그때 동고가 정색을 하고 하는 말이 “이렇게 위급한 때에 임금님께 바치는 약을 어찌 다른 사람의 손을 거치게 할 수 있소?”라고 하니, 심좌상이 놀라하는 말이, “대감의 말이 옳소이다.” 하고서는 일어나 누각으로 올라갔다. 동고가 즉시 쇠빗장으로 누각문을 단단히 잠그고, 급히 임금님께 들어가 큰 소리로 아뢰기를, “왕세자가 정해져 있지 아니하니 부디 성교(聖敎 : 임금의 가르침)를 내려 주십시오.”라고 했다. 명종은 입안으로 다만 “덕흥”이라고만 말할 뿐 더 말을 잇지 못했다. 동고가 더 큰 소리로 아뢰기를, “신이 귀가 먹어 말씀을 잘 알아듣지 못하오니 원컨대 큰소리로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하고서 주서(主書 : 승정원의 정 7품 벼슬) 황대수를 돌아보고 말하였다. “덕흥군 제삼자(德興君 第參子)”라고 하니 황대수가 큰 붓으로 여섯 글자를 써서 관리 보고 읽어 보게 했다. 그 뒤에 동고는 늘 주서 황대수의 민첩함을 칭찬하였다. 이것이 이준경이 평양감사인 장인과 이야기한 내용의 전말이다. 장인은 풍산 김씨 김양진(金楊震)인데, 이 설화대로라면 그도 매우 선견지명이 높았다.
선조(宣祖) 대에는 기존의 훈구(勳舊) 세력들을 멀리하고 율곡(栗谷) 이이(李珥) 등을 중심으로 하는 사림세력을 많이 등용하였고, 유일(遺逸)이라는 제도아래 전국에서 유능하고 덕망 있는 선비들을 많이 불러들였다. 그러나 율곡 이이 등을 중심으로 해서 사림의 세력이 커짐에 따라 이준경을 이를 우려하기 시작하여, 임종할 당시 선조에게 붕당의 폐해에 관한 유차(遺箚)를 올린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사로운 붕당(朋黨)을 깨뜨려야 할 것입니다. 지금 세상 사람들이 혹 지나친 행동이 없고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 없는 사람이라도 자기네와 한마디의 말이라도 합하지 아니하면 배척하여 용납하지 않습니다. 자기들은 행실을 닦지 아니하고 글 읽기에 힘쓰지 아니하며, 거리낌 없이 큰소리치며 당파를 지으면서 그것이 높은 것이라고 하며 헛된 기풍을 양성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들이 군자이면 함께 서서 의심하지 마시고 소인이거든 버려두어 저희끼리 흘러가게 하심이 좋을 것입니다. 이제야 말로 전하께서 공평하게 듣고 공평하게 보아주시어 힘써 이 폐단을 제거하실 때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반드시 국가의 구제하기 어려운 근심이 될 것입니다.” 이에 율곡 이이는 매우 당황하여 “조정이 맑고 밝은데 어찌 붕당이 있겠습니까? 이는 임금과 신하를 갈라놓으려는 것이옵니다. 사람이 죽음에 임해서는 말이 착한 법인데, 이준경은 죽음에 이르러 그 말이 악하옵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실제로 4년 뒤 1571년(선조 4) 인사권을 담당하는 이조전랑(吏曹銓郞) 자리 문제 때문에 사림은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이에 율곡 이이는 역시 큰 유학자답게 지난 일을 크게 부끄럽게 생각하고 이후 동인과 서인의 분쟁 조정에 온 힘을 기울이게 된다.
허황된 전설이지만, 그의 임진왜란과 관련된 설화가 유명하다. 이준경은 겨울에도 큰 부채를 가지고 항상 동쪽을 향해 부채질을 하였는데, 이로 인해 현해탄에 바람이 일어 풍랑이 거세어져서 이준경의 살아생전에는 일본이 현해탄을 건너와 조선을 칠 수 없었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또한 왜란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임금을 위해 지금의 창의문(彰義門 : 자하문) 근처 성벽에 비상구 하나를 더 만들어서 선조가 그 문을 통하여 피난길에 올랐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편 자신이 죽고 난 뒤 왜란이 터질 것을 미리 알고, 식솔들을 안전한 장소로 피난시킨 전설이 가장 유명한데, 강효석(姜斅錫)의 저서 <대동기문(大東奇聞)>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이준경은 몸가짐이 청백하고 검소하며 기국(器局)이 방정하고 엄격하였으며, 후덕과 중망이 평소 사람들을 감복시켰다. 그러나 후배들과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당시에 미움을 받기는 하였는데, 정승으로서의 업적을 말한다면 이준경이 제일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어머니 신씨가 입으로 <대학>과 <효경>을 가르치면서 늘 타일렀다. “과부의 자식과는 사귀지 말라고 하였으니 반드시 학문을 부지런히 하기를 남보다 열 배나 더하여 옛날의 집안 명성을 떨어뜨리지 말아라.” 그래서 이준경이 그의 형 정헌공 이윤경과 어머니의 뜻을 공경히 받들어 종형인 탄수(灘叟) 이연경(李延慶)의 문하에서 글을 배우며 학문에 힘을 썼다. 이준경이 동부승지였을 때에 홍섬(洪暹)이 도승지였다. 홍섬이 일찍이 이름난 기생 유희(兪姬)를 가까이했었는데, 유생 송강(宋康 역시 유희와 정을 맺어 매우 가까이 지내는 터였다. 그런데 어느 날 홍섬이 승정원에서 여러 동료들에게 말하였다. “송강이 죽었다. 나와는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 같은 시각에 태어났는데도 먼저 죽어 곤궁하고 통달한 것이 같지 않으니 어찌 이상하지 않은가”했다. 이준경이 그 말을 받았다. “도승지 영감께서도 유희를 사랑하였고, 송강 역시 유희를 사랑하였으니 운명이 같을 뿐 아니라 행한 일도 같지 않습니까?” 승정원의 여러 승지들은 도승지를 공경하여 감히 농담을 하지 못하며, 불경한 자는 벌연(罰宴)을 베풀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준경의 집에서 벌연을 베풀기를 무릇 일곱 차례를 한 뒤에야 그만두었다. 이준경은 이 일을 두고 이렇게 말하였다. “나로 하여금 이 일 때문에 가산이 거덜 난다 하더라도 이야기의 실마리가 너무나 멋지니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준경의 집에 피씨(皮氏) 성을 가진 하인이 있었는데, 사람 됨됨이가 조심성이 있었으므로 이준경이 그를 매우 아꼈다. 그런데 그 하인이 이준경에게 청원하였다. “소인에게는 단지 딸자식 하나밖에 없으니 장차 좋은 사람을 데릴사위로 맞아다 늘그막에 의탁했으면 합니다. 대감께서 신랑감을 골라 주시기를 감히 바랍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준경이 대궐에서 돌아와 피씨의 하인을 불러 말하였다. “오늘 아침에 비로소 너의 사윗감을 얻었으니 빨리 불러오는 것이 좋겠다.” “그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한성부 앞에 어떤 총각이 거적으로 몸을 가리고 앉아 있는데 바로 그 사람이다.” 피씨 하인이 사람을 시켜 가서 보게 하였더니 과연 그런 사람이 있으므로 정승의 명령이라 하면서 그를 불렀다. 그러자 그 총각이 말하였다. “정승은 어떤 벼슬이며 나를 불러다 무엇을 맡기려 하시오?” 총각이 굳게 거절하며 오지 않으므로 피씨 하인이 가서 위협하고 공갈을 쳐보았지만 만 마리의 황소 같은 고집을 돌리기 어려웠다. 하는 수 없이 이런 사실을 돌아와 고하였더니 이준경이 말하였다. “그 사람이 반드시 이와 같이 하리라는 것을 나도 알았다.” 다시 대궐 문을 지키는 군졸 몇 명을 보내자 그제야 비로소 불러올 수 있었다. 공이 결혼하기를 타이르고 권하자 억지로 허락을 하니, 이준경이 기뻐하며 하인에게 일렀다. “내일 혼례를 치르도록 하라.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기회를 잃게 될 것이다.”
하인이 곁에서 그 총각을 보니 남루하고 멍청한 모습이 바로 누더기를 걸친 거지 아이에 불과할 뿐이었다. 놀랍고 괴상한 마음을 감당하지 못하였으나, 감히 명령을 어기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데리고 나가 그의 머리를 빗기고 몸을 씻게 한 뒤 새 옷을 내주었다. 이튿날 초례를 치르는데 온 집안사람이 코를 가리며 웃어대었지만 그의 사위는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가 한번 처가살이를 한 뒤로는 두건도 쓰지 않고 버선도 신지 않은 채 잠자는 것을 일과로 삼아 문밖을 엿보지 않은 지가 3년이 되었다. 그러자 집안사람들이 모두 어리석고 게으른 사람으로 지목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세수를 하고 의관을 갖추므로 그의 아내가 이상하게 여겨 물으니, 그가 대답하였다. “오늘 틀림없이 대감께서 찾아오실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그를 비웃었다. 그런데 조금 있으려니까 문 밖에서 갑자기 고관을 모시고 다니는 하인의 잡인 통행을 통제하는 우렁찬 소리가 들렸다. 과연 대감이 찾아와서 곧장 방으로 들어가 그의 손을 잡고 말하였다. “장차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장차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하늘의 운수인데 어찌하겠습니까?” 하인의 사위가 대답하니 이준경이 말하였다. “이 뒤의 일은 전적으로 너에게 맡긴다.” “재능을 인정해 주시고 대우하여 주시는 은혜를 어찌 감히 잊겠습니까. 다만 앞으로의 일의 형세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관찰할 것이며 결정지어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몇 마디 주고받고 하다가 대감이 떠나니, 온 집안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기며 그제야 그가 범상한 사람이 아닌 줄 알고, 이때부터 앞서보다 대접이 조금 나아졌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에 그 하인이 이준경의 처소에서 돌아오자 그의 사위가 말하였다. “옷을 벗지 말고 다시 빨리 가셔서 대감께서 세상을 떠나시는데 임종하십시오.” “무슨 말을 하는가? 내가 방금 대감을 뵈었더니 손님과 이야기를 주고받으시면서 조금도 불편한 기색이 없으셨는데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긴 말씀 마시고 빨리 가십시오.” 하인이 다시 가서 뵈었더니, 이준경이 바야흐로 수건으로 낯을 닦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가 겨우 눈을 떠서 하인을 보고 말하였다. “네가 어떻게 알고 갔다가 곧장 왔는가?” “쇤네의 사위가 말해 주었으므로 오기는 하였습니다만 어떻게 해서 병환의 진행이 갑자기 이 지경에 이르도록 위독해지셨는지를 모르겠습니다.” “너의 사위는 범상한 인물이 아니니 너는 그가 하는 말은 굽혀서 따르고 어기지 말라.” 이 말을 마치고 이준경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4년 후에 사위가 갑자기 장인에게 청하였다 “제가 조금 시험해 볼 일이 있으니 바라건대 수천 금을 제게 주어 장사밑천으로 삼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즉시 허락 하였다. 5~6개월이 지난 후 빈 손으로 돌아와 말하였다. “돈이 적어 장사를 잘할 수 없었습니다. 만약 또다시 5~6 천금을 얻을 수 있다면 소매가 길어 을 출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말에 따라 준비해 주었다. 다시 일 년 후에 또 빈손으로 와서 청하기를 “이미 벌린 춤을 중간에 그만둘 수 없습니다. 지금 만약 돈이 없다면 집과 농장과 논밭을 모두 팔아서 내게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노비 하인이 상공(相公)의 유교(遺敎)를 한결 같이 따라서, 조금도 의심하거나 돌아보지 않고 준비하여 주고는 이에 한 달팽이집을 빌려 살면서 비록 집안사람들이 번갈아 꾸짖고 동료나 친구들이 비웃어도 돌아보지 않았다. 일 년이 다시 지나자 또 소매를 흔들며 돌아와서는 말하기를 “장인댁에는 이미 남은 재산이 없으니, 상공댁에 가서 몇 천 꿰미의 돈을 빌릴 수밖에 없겠습니다.”하고는 마침내 함께 가서 상공의 아들에게 그 일을 고했다. 그 역시 즉시 허락하여 5~6 천금을 준비하여 주었다. 겨우 일 년 만에 또다시 전과 같이 빈손으로 와서 말하였다. “전답과 주택을 모두 팔아서 나에게 주되 피씨 어른과 같아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했다. 상공의 아들이 한마디 말도 없이 마침내 하락하니 이와 같은 즈음에 5~6년의 세월이 흘렀다. 하루는 피옹(皮翁)과 상공의 아들을 모아놓고 말하였다. “양가의 가산을 모두 녹여 없앴으니 지금에 이르러 몸을 의탁할 곳이 없으니, 어찌 감히 입을 놀리겠습니까마는 일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오직 양가는 권속을 이끌고 저와 더불어 가서 시골에 머물면서 살아갈 도리를 삼기를 바랍니다.”했다. 모두 말하기를 “좋습니다.”라고 하였다.
두 집안이 한결 같이 그의 지시를 들어준 것은 동고(東皐)의 유훈이 있었기 때문에 감히 어기지 못한 것이다. 마침내 날을 잡아 여정에 올라 상하노소가 말을 세내어 타고, 소에 바리바리 실어 일제히 행차하여 동(東)을 향해 간지 수일만에 길이 바뀌어 깊은 산골짜기에 이르니 구불구불 산길이 험하여 산길이 다하고 막히어 다시는 더 갈 곳이 없게 되었다. 이에 소와 말을 풀어 돌려보내고, 바위 아래에 모여 앉아 서로 돌아보며 근심하고 한탄했다. 조금 있으니 바위 절벽 위에서 비단 필 수백 가닥이 늘어트려 내려왔다. 마침내 각각 한 가닥씩 잡고 개미처럼 붙어 올라가서 고개를 넘어 내려갔더니, 평원 광야가 아득하여 끝없어 보였다. 기와집과 초가집 백여 호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꽃과 나무가 서로 비추고 닭과 개소리가 서로 들리니 참으로 무릉도원이라고 말할만하였다. 상자와 창고의 곡식 가마솥 따위와 삼베, 비단, 소금, 된장과 일용 집물이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었다. 두 집 사람들이 각각 가서 자리에 안착하니, 비로소 전날 가져간 돈이 이 토구(菟裘)를 경영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 훌륭한 전답, 기름진 토지가 있어서 구획 정리가 잘 펼쳐져서 봄이면 갈고, 가을에 걷어 들여 남녀가 기뻐하니 산중의 재미를 편안히 누리고 세상의 소식은 듣지 못하였다.
동고의 두 아들이 번화한 곳에서 낳고 자라, 갑자기 적막한 끝자락에 머무르니 매양 울적하여 옛날 살던 곳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었다. 하루는 피씨의 사위가 손을 이끌고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서 한 곳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공께서는 저쪽의 개미같이 진을 치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습니까? 저들은 모두 왜병입니다. 금년 4월에 왜병이 크게 몰려와 8도가 모두 함락되고 임금의 행차가 지금 의주에 머물러 계시니 이때에 만약 집이 서울에 있었으면 보존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선대상공의 지우(知遇)의 은혜에 보답하려는 것입니다. 우선 안심하고 여기에 살며 산을 나갈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8~9년이 지난 후에 갑자기 동고의 아들에게 말하였다. “영원히 여기에 살고 싶습니까?” “나는 이곳이 편안하다.” “그렇지 않습니다. 공이 만약 영구히 세상에 나가지 않는다면 선대 상공께서 조정에 세운 위대한 업적을 누가 능히 드날릴 수 있겠습니까? 지금은 왜병이 다 돌아가고 국내가 깨끗하니 바로 옛땅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피씨 어른이 말했다. 나는 자녀가 없으니 세상에 나가서 무엇을 하겠는가, 그대와 더불어 이곳에서 늙으려 하노라. 사위가 말했다. “진실로 마땅합니다.” 마침내 동고의 아들을 권하여 가족을 이끌고 산을 나가 함께 청주군 남산 아래에 이르러 말하였다. “이곳에 터를 잡는 것이 매우 좋으니, 영구히 이곳에 머물러 사시고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는다면 대대로 대부의 반열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마침내 작별하고 떠나니 그 죽은 곳을 알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