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筆者) 금삿갓도 이제 옛사람들이 말하던 고희(古稀)에 접어들고 보니 감회가 조금씩 달라진다. 5 년 전에 지하철무료 탑승카드를 받았을 때가 약간 충격이었고, 고희라는 감정은 친구나 동창들이 고희 기념여행을 한다는 소식을 들을 때 그런가 보다 생각했다. 금삿갓도 나이는 숫자라는 생각으로 살아왔지만 막상 한 해 한 해가 가고 몸이 예전처럼 기능하지 않음을 느끼면서 조금씩 자각을 하게 된다. 이런 시기에 선현들의 생각이 문득 떠오른다. 조선의 대표적인 학자였던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노인관을 살펴보자. 그는 <성호사설(星湖僿說)>의 인사문(人事門)에서 “노인의 10가지 좌절”이라는 것을 다음과 같이 들었다. ①백일돈수(白日頓睡) / 대낮에는 조아려 졸고, ②야간불교첩(夜間不交睫) / 밤에는 눈썹을 붙이지 않고, ③곡즉무루(哭則無淚) / 곡할 때는 눈물이 없고, ④소즉읍하(笑則泣下) / 웃을 때는 눈물이 흐르네. ⑤삼십년전사총기득(三十年前事總記得) / 30년 전의 일을 모두 기억해도, ⑥안전사전두망료(眼前事轉頭忘了) / 눈앞의 일은 머리를 돌리면 잊어버리고, ⑦끽육두리무(喫肉肚裡無) / 고기를 먹으면 배 속에 없고, ⑧총재아봉리(總在牙縫裡) / 모두 이 사이에 끼네. ⑨면백반흥(面白反黑) / 흰 얼굴은 도리어 검어지고, ⑩발흑반백(髮黑反白) / 검은 머리는 도리어 희어지네. 이는 송(宋) 나라의 태평노인(太平老人)이 지은 <수중금(袖中錦)>에 나오는 구절인데, 이를 인용하면서 본인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추가하였다. ①미제원조즉유변(微睇遠眺則猶辨) / 눈을 가늘게 뜨고 멀리 보면 오히려 분별하는데, ②대개목근시반미(大開目近視反迷) / 눈을 크게 뜨고 가까이 보면 도리어 희미하네. ③지척인어난별(咫尺人語難別) / 지척 사람의 말은 알아듣기 어려운데, ④정야상문풍우성(靜夜常聞風雨聲) / 고요한 밤 비바람 소리는 들린다. ⑤빈빈유기의(頻頻有飢意) / 배고픈 생각은 자주 있으나, ⑥대안각불능식(對案却不能食) / 밥상을 대하면 먹지 못한다.
<견한잡록 : 심수경>
이러한 노인들의 병통을 기록한 것은 송나라의 주필대(周必大, 1126~1204)가 지은 <이로당시화(二老堂詩話)>에 “노인십요(老人十拗)”가 나온다. 이것은 북송(北宋)의 시인 곽상정(郭祥正, 1035~1113)의 글을 인용한 것이다. 곽상정의 글은 이렇다. ①불기근사기득원사(不記近事記得遠事) / 가까운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먼 일을 기억한다. ②불능근시능원시(不能近视能远视) / 가까운 것은 못 보고, 먼 것은 보인다. ③곡무루소유루(哭無淚笑有淚) / 곡하면 눈물이 없는데, 웃으면 눈물이 난다. ④야불수일수(夜不睡日睡) / 밤에는 잠 못 자고, 낮에는 졸고, ⑤불긍좌다호행(不肯坐多好行) / 앉아 있지 않고 돌아다니길 좋아한다. ⑥불긍식연요식경(不肯食軟要食硬) / 연한 것을 안 먹고, 딱딱한 걸 먹으려 한다. ⑦아자불석석손자(兒子不惜惜孫子) / 자식은 아끼지 않고, 손자를 아낀다. ⑧대사불문쇄사서(大事不问碎事絮) / 큰일은 묻지 않고 사소한 일에 잔소리가 길다. ⑨소음주다음다(少飮酒多飮茶) /술은 적게 마시고, 차를 많이 마신다. ⑩난불출한즉출(暖不出寒即出) / 따스할 때는 나가지 않고, 추우면 나간다. 반면에 다산(茶山) 장약용(丁若鏞)은 노인의 상태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즐기는 태도로 <노인일쾌사육수효향산체(老人一快事六首效香山體)>라는 장시(長詩) 6 수를 지었다. ①탈모(脫毛)로 머리 감고 치장할 일이 없는 이로움, ②발치(拔齒) 즉 이 빠지니 치통이 없는 이로움, ③혼안(昏眼) 즉 눈 어두워 안갯속의 꽃 보는 것 같은 이로움. ④이농(耳聾) 즉 듣기 싫은 소리 안 듣는 귀 어두움의 이로움, ⑤종필(縱筆) 즉 붓 가는 대로 쓰는 즐거움, ⑥대국(對局) 즉 하수를 골라 바둑 두는 즐거움이다.
<과거 시험 모습>
그런데 이번에 이야기할 사람은 두 실학자의 생각을 초탈하여 노인이라는 굴레를 아주 뛰어 넘어서 그야말로 노익장(老益壯)을 과시한 기네스(Guinness) 기록감이다. 그는 바로 조선의 문신 청천당(聽天堂) 심수경(沈守慶, 1516~1599년)이다. 심수경은 중종 때 좌의정을 지낸 화천부원군(花川府院君) 심정(沈貞)의 손자로, 홍문관 직제학과 만포진첨절제사(滿浦鎭僉節制使·정3품 당상관)를 지낸 심사손(沈思遜)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참의(參議·정3품) 이예장(李禮長)의 딸이다. 할아버지 심정은 중종반정에 가담한 공신이자 남곤 등과 함께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 등을 제거한 인물이었다. 정권이 바뀌어도 다행히 심수경은 할아버지에 연좌되지 않고 관직에 나갈 수 있었다. 아버지가 13살 때 여진족에게 살해되고, 17세 대에 할아버지가 사사(賜死) 당했다. 심수경은 31세에 문과에 장원급제 후 좌의정 영중추부사에 이르렀다. 문신으로 호당(湖堂)과 지제교에 뽑혀 문장으로 명성을 날렸고, 무신이 뽑히는 자리인 겸선전관(兼宣傳官), 순찰사, 종사관, 비변사 낭청과 제조, 평안도 병마절도사에 뽑힌 유장(儒將)이었다. 8도 관찰사를 모두 역임하였고, 한성판윤(漢城判尹), 형조·병조 판서, 우의정을 역임했다. 70세 이후 여러 번 사직할 것을 원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조정에 출사를 거르거나 출사를 거부하고 마을의 노인들과 어울려 시를 쓰고, 술 마시며 활쏘기·바둑으로 노년을 소일했다. 81세에 이르러 비로소 사직 돼 경기도 과천으로 은퇴했다. 그는 벼슬에 대한 복록(福祿)은 많았지만 청렴결백하게 지내서 늘 가산이 청빈하였다. 그런데 여복(女福)과 건강복은 아주 타고났었나 보다. 그는 75세에 처음 은퇴하고서 쉬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한성부로 달려가서 왕을 호종(扈從)하려 하였으나 왕이 먼저 떠나고 없자 77세에 스스로 의병장이 되어 의병을 모집하여 일본군에 대항했다. 이 소식이 선조의 귀에 들어가서 삼도체찰사(三道體察使)로 임명되고, 벼슬을 우의정에 보했다. 1598년 영중추부사를 끝으로 물러났다.
<평생도>
그는 정경부인(貞敬夫人) 신씨(申씨)와의 사이에 2남 5녀를 두었고, 성명 미상의 두 명의 첩을 두었다. 첫 번째 첩에서 1남을 두었고, 두 번째 첩으로부터 2남을 보았다. 이 두 명의 아들이 아주 늦둥이라서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킨 것이다. 그의 저서 <견한잡록(遣閑雜錄)>에 그는 이렇게 기록해 두었다. “여어칠십오세생남(余於七十五歲生男) / 내가 75세에 아들을 낳고, 팔십일세우생남(八十一歲又生男) / 81세에 또 아들을 낳았으니, 개비첩출야(皆婢妾出也) / 모두 비첩의 몸에서 태어났다. 팔십생자(八十生子) / 80세에 자식을 낳은 것은, 근세한견(近世罕見) / 근세에 드문 일로, 인왈경사(人曰慶事) / 사람들은 경사라 하나, 이여칙이위재변야(而余則以爲災變也) / 나는 재변이라고 여긴다. 희음이절(戲唫二絶) / 장난삼아 두 절구를 읊어서, 정우서교죽계량로계량로개화지(呈于西郊竹溪兩老契兩老皆和之) / 서교(西郊, 송찬)와 죽계(竹溪, 안한) 두 늙은 계원(契員) 친구에게 보냈더니, 두 노인이 모두 화답하였다. 잉치전파(仍致傳播) / 그런데 이것이 세상에 전파되었으니, 우가소야(尤可笑也) / 더욱 우습다.” 조선 시대의 사람으로서 이렇게 건강하고 정력적인 사람은 역사상 기록감이다. 그 나이면 대부분 죽었거나 살아 있어도 거동이 불편할 텐데, 첩을 들여서 건강한 아들을 낳았다니 정말 대단한 것이다. 더구나 비아그라도 없던 시절에. 현대에 들어와서는 영국의 데일리메일지의 보도에 따르면 인도 하리아나주(州)에 사는 람지트 라그하브(Ramjit Raghav)가 96세에 54세의 부인과의 사이에 둘째 아들을 낳았단다. 그는 2년 전에도 첫째를 낳아서 세상을 놀라게 했는데, 자신의 기록을 경신했단다.
<청천당집 : 심수경>
심수경은 아들을 낳은 기쁨을 이렇게 두 수로 읊었다.
七五生男世固稀(칠오생남세고희) / 75세 생남도 세상에 드문 일인데
如何八十又生兒(여하팔십우생아) / 어이하여 80에 또 생남했나?
從知造物眞多事(종지조물진다사) / 조물주가 참으로 하는 일이 많을 알겠네.
饒此衰翁任所爲(요차쇠옹임소위) / 이 늙은이를 너그럽게 하는 대로 맡긴 것을.
두 번째 시는 이렇다.
八十生兒恐是災(팔십생아공시재) / 80 생남은 재앙인가 두려우니
不堪爲賀只堪咍(불감위하지감해) / 축하는 감당치 못하니 웃기나 하소
從敎怪事人爭說(종교괴사인쟁설) / 괴이한 일이라고 다투어 말하게나
其奈風情尙未灰(기내풍정상미회) / 이를 어쩌랴, 풍정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것을.
<견한잡록 : 심수경>
이런 기쁨을 안고 태어난 심수경의 늦둥이 서자(庶子)들은 조선의 신분제도에서 관직에 나가지 못하는 굴레에서도 벗어나 있었다. 첫 째 첩으로부터 낳은 아들은 전체 순서로 3남인데, 관상감정(觀象監正 )에 올랐고, 둘째 첩으로부터 낳은 4남은 인동부사(仁同府使)를 지냈고, 5남은 해미현감(海美縣監)을 지냈다. 아주 독특한 이력과 경력을 가진 옛사람이다. 심수경과 교류한 서교(西郊) 송찬(宋贊)은 심수경 보다 6살 위이고, 죽계(竹溪) 안한(安澣)은 3살 위였다. 이들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폐허가 된 서울에 돌아왔을 때 모두 80세를 넘었다. 집도 모두 없어지고 셋방살이를 하면서도 계모임으로 시회(詩會)를 열면서 노년의 우의를 다졌다. 송찬은 나이 90세에 숭정대부(崇政大夫, 종1품)에 가자(加資)되었다. 이때 심수경이 하례하는 시를 보내고, 송찬도 화답하는 시를 보냈다. 정말 대단한 노인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