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사는 곳에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범죄가 끊이지 않는다. 공자의 시대에도 그 대척점(對蹠點)에 도척(盜跖)이 있었다. 조선 시대에도 오늘날의 조직폭력배와 비슷한 조직범죄단체들이 암약(暗躍)하고 있었다. 이들을 살펴보면 그 첫째가 검계(劍契)이고, 다음으로는 노비나 하층 민중들로 구성되어, 주인을 죽이자는 살주계(殺主契), 양반을 죽이자는 살반계(殺班契), 아무나 죽이고 약탈하자는 살약계(殺掠契) 등이 있었다. 검계는 서얼(庶孼)이나 중인 등 관직을 통한 출세가 불가능한 집단의 사람들이 주 구성원으로 원례 장례(葬禮) 행사를 위한 향도계(香徒契)가 변형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창포 잎처럼 생긴 창포검(菖蒲劍), 대나무 지팡이 같이 만든 죽장도(竹杖刀) 등을 눈에 띄지 않게 패용하고 다니면서 수시로 칼부림을 했다. 구성원의 모집 시에 몸에 칼자국이 없는 사람은 뽑지 않았다고 한다. 속에는 비단옷을 입고 겉에는 허름한 옷을 걸치고, 깊은 삿갓을 눌러쓰고 눈 부위에 구멍을 뚫어 보고 다녔다. 맑은 날에는 나막신을 신고, 궂은날에는 가죽신을 신었다. 또 주로 기루(妓樓)나 주막에서 뒤를 봐주거나 기둥서방 노릇, 돈놀이 등을 하는 왈자도 있었다. 이들은 민중의 생활에 깊숙이 뿌리 박혀 오랜 세월 동안 선량한 사람들의 등을 쳐왔던 것이다.
이들 폭력배들은 생계형 폭력배가 주를 이루지만, 검계라는 집단들은 대체로 출신 성분이 좋고, 정치적 이해관계가 얽힌 경우도 있어서 활동 성격이 조금 달랐다. 이들은 사회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고, 정치적 야합이나 어떤 일을 도모하기 위한 집단적인 무술 훈련, 진법 훈련 등을 하기도 했다. 더욱이 남산에서 집단 무술 대련이나 훈련을 함으로써 민심을 흉흉하게 만들기도 했다. 숙종(肅宗) 대에 검계가 많이 날뛰다가 좀 수그러든 뒤에 영조(英祖) 때에 다시 활계를 치기 시작했다. 영조 때 이름을 날렸던 검계의 우두머리 표철주(表鐵柱)도 원래 영조가 세자 때 세자궁의 별감이었다. 살인사건에 연루되어 도망자 신세가 되면서 검계에 가입했다고 한다. 그가 잡혀서 죽지 않은 이유는 영조가 세자 시절에 데리고 있었던 인연으로 뒤를 봐주어서라는 말이 있었다.
아무튼 영조 대에 이르러 이 검계를 때려잡는 범죄와의 전쟁이 일어난다. 그 중심에 바로 포도대장(捕盜大將) 장붕익(張鵬翼, 1674~1735)이 있었다. 장붕익은 조선 후기 유명한 포도대장 집안이었던 인동 장씨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기운이 넘치고, 작은 일에 얽매이거나 남에게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아버지 장하현(張夏顯)은 숙종 때, 장붕익은 영조 때, 아들 장태소(張泰紹)는 영조 13년에 좌우포도대장, 손자 장지항은 영·정조 때 각각 포도대장을 지냈으니 가히 포도대장 명문가라 할만했다. 1699년(숙종 25) 무과에 급제한 뒤 선전관으로 있을 때 소론 김일경(金一鏡) 일파에게 몰려 파직되는 등 일찍부터 노소당쟁(老少黨爭)의 와중에서 어려움을 겪었으나 다시 기용되어 경상도좌병사를 거쳤다. 1723년(경종 3) 신임사화 때 김재로(金在魯)·신사철(申思喆) 등과 함께 노론 김창집(金昌集)의 당으로 연루되어 함경도 종성에 유배, 2년 뒤 영조가 즉위하자 풀려 나왔다. 그 뒤 군기시제조(軍器寺提調)·어영대장·훈련대장·형조참판·우포도대장 등을 역임한 뒤, 1727년(영조 3) 훈련대장 재직 시 무신으로서 파당(派黨)에 관여했다 하여 일시 파직되었다. 이듬해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한성부좌윤으로서 진어대장(鎭禦大將)에 임명되어 북한산성을 지키며 반란주모자의 한 사람인 평안병사 이사성(李思晟)의 체포에 공을 세웠다. 이어 총융사가 되어 종사관(從事官) 이덕재(李德載)와 함께 수원에 출진, 난군의 일당 이배(李培)를 잡아 포송해 반란군 토벌에 큰 공을 세웠다. 1729년 부사직으로서 과거제(科擧制)의 폐단과 모순을 지적, 상소하였다. 특히 무과 급제자가 수천에 달하나 전혀 임용될 자리가 없다는 것과 시규(試規: 시험 시행상의 규칙) 또한 부실하기 짝이 없다는 점 등을 들어 시정을 촉구하였다. 이 해 한성부판윤에 발탁되고 다시 훈련대장을 거쳐 1734년 형조판서에 올랐다. 이때 별군직(別軍職) 윤필은(尹弼殷)이 써 올린 「전선개조책(戰船改造策)」에 의거, 전선과 거북선의 「개조도(改造圖)」를 새로 작성해 해전의 전술과 해상의 방어대책 강구에 진력하였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무숙(武肅)이다. 화려한 경력이다.
아무튼 영조 2년(1725년) 9월 3일, 한양 하늘에 총소리가 울렸다. 영조의 명으로 장붕익이 우포도대장(右捕盜大將)에 취임하는 날이었다. 그는 취임 일성으로 “온 도성 사람들에게 나의 포도대장 부임을 알려라. 포수들은 하늘에 총을 쏘아라.”라고 지시했다. 폭력과 범죄집단에 대한 일종의 선전포고였다. 포졸들은 오랜만에 기가 살아 범인을 마음껏 때려잡을 수 있다며 사기충천했고, 무뢰배들은 기가 죽어 슬금슬금 몸을 숨기기에 바빴다. 장 대장은 억강부약(抑强扶弱)의 상징이자 조직폭력배에겐 자비를 잊은 채 잔인한 처단을 하는 열혈의 포도대장이었다. 취임 첫날 저녁, 그는 직접 야간 순찰에 나섰다. 통행금지 후 숭례문 쪽 순찰 중에 술에 취해 배회하는 별감(왕실 비서) 한 명과 마주쳤다. 장 대장은 한 방에 잡아 거꾸로 매단 뒤 포졸의 육모 방망이를 빼앗아 발바닥을 사정없이 때렸다. “관리들의 범죄는 더욱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 그래야 나라의 기강이 바로 서느니라. 알겠느냐?”라며 나라의 녹을 먹는 관리일수록 준법에 솔선수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뒤 잇단 화재 현장에도 나타나 방화범과 빈집털이범을 일망타진하니 한양의 범죄자들이 몹시 두려워했다. 검계들이 운영하고 갈취하는 기방이나 유흥가, 금주령 위반, 불법 도박장, 위조 화폐 등을 발본색원하며 하나하나 소탕해 갔다. 영조의 검계 소탕 작전 명을 받아 장붕익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했던 것이다. 불심검문에서 조금이라도 수상한 자가 있으면 무조건 윗옷을 벗겨 칼자국을 확인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조선판 조폭’이었던 검계(劍契) 조직에 가입하려면 몸에 칼자국이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때 최대 검계 조직인 죽림칠현파 두목 표철주는 은신하고 있다가 조직이 무너질 위기감에서 포도대장 암살에 직접 나섰다. 장붕익은 체포한 검계 조직원들의 발뒤꿈치를 자르거나, 죽여서 일벌백계로 다스렸다.
장붕익의 범죄와의 전쟁으로 그는 당시 검계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대상이었다. 후대의 인물 이규상이 쓴 장붕익의 전기 <장대장전>에는 도입부부터 장붕익의 위용에 대해 찬양한 대목이 있다. 한 검계 깡패가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대장군 중 이완(李浣), 류혁연(柳赫然), 신여철(申汝哲), 김석주(金錫胄)가 있는데, 장붕익은 그들 이상이니 알아서 기라고 훈계시켰다 한다. 이런 상황에서 검계들이 장붕익을 살해하려는 일이 발생했다. 영조 9년(1733) 5월 12일, 선정전(宣政殿)에서 주강을 행하는 자리에 지경연사 김취로(金取魯) 등이 입시하여 《예기》를 진강 하고, 문신들의 한어 학습, 아동 교육에 관한 문제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그때 영조가 훈련대장 장붕익을 특진관으로 입시시켜서 전날의 살해 기도 상황을 상세히 듣게 되었다. 내용은 이렇다.
상(上)이 이르기를, “훈련대장은 앞으로 나아오라.”
하니, 장붕익이 나아와 엎드렸다. 상이 이르기를, “어제 승지가 한 말을 들었는데, 너무나 놀랍고 해괴한 일이니 당시 사건의 정황을 낱낱이 진달 하라.”
하니, 장붕익이 아뢰기를,
“그저께 저녁에 군호(軍號)를 반포한 뒤 잠시 잠이 들었다가 깨어나 보니, 소신이 자고 있던 방 안의 옆문 밖에 사람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열어 보려다가 도로 그만두었는데 다시 바깥쪽 창밖에 달빛이 희미한 가운데 어렴풋하게 사람 그림자가 있었습니다. 신의 생각에 도적이 들어왔다 싶어, 베갯머리에 있던 환도(環刀)를 집어 들고 크게 소리치며 창을 열고 튀어 나갔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사람이 검을 잡고 마루 위에 서 있다가 깜짝 놀라 뛰어내려서는 섬돌 위에 그대로 서서 검으로 신을 향해 공격하였습니다. 신 또한 검으로 맞서서 그렇게 서로 치고받다가 바깥문까지 이르자 그놈이 몸을 솟구쳐 담장을 뛰어넘어서 가 버렸습니다. 신이 그때 저도 모르게 소리 높여 성을 내며 외쳤으므로 바깥 방에서 자고 있던 아들과 종들이 깜짝 놀라 허겁지겁 나와 보았지만 이미 미칠 수 없었습니다. 입번(入番)한 장교들도 모두 문밖에 모여들었으나 바깥문이 자물쇠로 단단히 잠겨 있었기 때문에 들어올 수는 없었습니다. 소신이 갖고 있던 검이 꽤 좋은 것이었는데 칼등 쪽 여러 곳에 칼날끼리 부딪친 흔적이 있었으니 도적의 검 역시 좋은 것 같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 사람의 용모는 키가 어떠하든가?”
하니, 장붕익이 아뢰기를,
“몸은 보통 사람보다 키도 작고 왜소했으며 수염이 없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복색은 어떠하였는가?”
하니, 장붕익이 아뢰기를,
“머리에 작은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색깔은 구별하지 못하겠으나 흰털은 아닌 것 같았으며, 몸에 걸친 명주옷은 무릎까지 오고 행전(行纏)을 차고 있었습니다. 애초에 들어온 경로를 확실하게 알 수는 없으나, 문을 닫기 전에 미리 잠입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는 필시 물건이나 훔치는 도둑이 아니다.”
하니, 장붕익이 아뢰기를,
“마루 옆에 두고 날마다 쓰는 놋그릇이 가치가 수십 냥은 나가는데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검을 지니고 온 자가 어찌 의도가 없겠는가.” 하였다. 장붕익은 타계 2년 전인 60대의 노인으로 잠결에 자객에 맞서 검을 들고나가 자객을 몰아붙였으니 보기 드문 혈기 넘치는 노익장일 정도로 검술의 달인이었나 보다.
그래도 결국은 암살 모의자를 색출하지 못했다. 하지만 검계의 조직은 많이 와해가 되었다. 검계의 보스였던 표철주가 조직의 운명을 걸고 장붕익을 암살하려 시도하다가 실패한 후 한양을 떠나 도망친 것으로 여겼다. 모든 조직은 두목이 쓸어지면 와해되므로 유야무야 되었다. 표철주는 2년간 도망 다니다가 장붕익이 죽은 이후에 한양으로 돌아와서 집주름 즉 부동산 소개일을 하면서 초라한 말년을 보냈다고 한다. 한 때 영조가 세자 시절에 별감 비서역할을 했던 표철주였지만 검계와 관련되어서 비참한 최후를 보낸 것이다. 표철주는 노년에 “장 대장이 죽었는가? 저승에서 또 그를 만날까 너무 두려워 내가 죽지도 못한다.”라고 고백했단다. 장붕익은 무관이었지만 조선왕조실록에는 185건, 승정원일기는 835번이나 그의 이름이 언급됐을 정도로 경종, 영조, 정조 대에 그의 집안이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