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슈슈 Jul 17. 2024

꾸준히 쓰다 보면 뭐라도 되겠지

소소한 에세이 모임 6개월 차 중간 정산 

 ‘글을 읽는 나’와 ‘글을 쓰는 나’를 좋아한다. 

나는 두꺼운 책의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면 책 내용보다는 ‘이 책을 완독 한 기특한 나’에게 빠지는 이상한 사람이다. 그런 면에서 글쓰기라는 액션이 들어가 있고 혼자서는 절대 쓰지 않았을 것 같은 글 한편이라는 아웃풋이 나오는 이 모임은 나에게 자기애를 촉진시키고 있다.

 나에게 글쓰기는 문방구 앞 뽑기와 같은 존재다. 코 묻은 몇백 원을 넣으면 쓸모를 알 수 없는 과하게 반짝이는 장난감이 나오는 뽑기. 사실 글을 쓰면서도 당최 뭐가 나올지 모르겠다는 점에서도 뽑기 핸들을 돌리는 아이의 마음이 이해된다. 딱히 쓸모는 없는 글이지만 결과물에 따라 기쁨도 실망도 잠시 스쳐간다. 


 글감을 바닥에 붙은 누룽지처럼 주걱으로 벅벅 긁어가며 기억을 더듬어 글을 써본다. 원래 바닥에 붙은 누룽지가 제일 맛있는 법이다. 변변찮은 무언가라도 만들어보려고 이리저리 붙여내 글 한편을 완성시키고 나면 이것은 작문이 아니고 산고이며 출산이다. 내가 낳은 글 한편.      


 어릴 적부터 도서관이라는 공간이 주는 에너지는 언제나 나를 흥분시켰다. 다독가는 아니지만 이사를 갈 때 집 근처에 도서관이 어디 있는지를 체크하는 것은 집 근처에 버스정류장이나 편의점이 어디 있느냐와 같은 체크리스트 중 하나였다. 밤샘 근무를 하고도 퇴근길에 근처 도서관에서 책을 한 아름 빌려 자취방을 돌아가던 나는 읽는 양에 비해 글쓰기는 빈약했는데, 간혹 쓰던 일기와 SNS에 쓰던 가벼운 문장 몇 줄이 다였다. 하지만 내면에는 언젠가 나는 글을 써서 책을 내고 싶다는 무지막지한 야욕이 있었다. 다행인지 이 야욕에는 ‘죽기 전에 이뤄야 할'이라는 전제 조건이 붙었기에 늘 나를 안도하게 했다.   

   

 글쓰기 모임을 시작 한지 수개월이 지난 후 이제 사적인 글쓰기에서 공적인 글쓰기로 나아가야 하겠다는 결심을 했지만 네이버 블로그를 시작할까 브런치를 시작할까만으로도 한 달을 넘게 고민했다. 여행기를 주제로 글을 쓰기 위해 서랍 구석에서 11년 전에 쓴 일기를 찾아 폈는데 이런 말이 쓰여 있었다.

*여행 전에 꼭 해야 할 일: 네이버 블로그 만들기 

그때도 여행 가기 전에 블로그를 만들어서 무언가 해야겠다는 작은 결심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결심을 11년이 넘도록 하고만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실소가 났다. ‘뭐 대단한 거라고, 생각만 하고 하지를 못하니..’

정작 15년 전에 만들어 놓은 블로그에는 ‘2016년 영등포 돌잔치 플로렌스 추천!’이라는 첫째 아이 돌잔치 예약 할인을 받으려고 쓴 후기 글이 외로이 올라가 있었다. 젊을 때 만들어놓고 방치했더니 블로그 이름마저 ‘잘 있나요, 청춘?’이다. 지금 마흔이 코앞인데 청춘 타령이라니. ‘잘 있나요, 불혹?’으로 바꿔야 하나 고민하며 오글거리고 게으른 나 자신의 바닥을 본 것 같아 낯이 뜨거워진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 세상은 역시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인류애 넘치는 결론으로 말이다. ‘혼자 가면 빨리 가지만 같이 가면 멀리 간다’는 협업과 관련된 면접 프리 패스 명언이 이럴 때 쓰는 건가? 

아무튼 나는 '하고 싶은 것 No.5' 리스트가 항상 준비된 사람인 것에 비해 실행력이 떨어지는 사람임을 인정한다. 쌓아둔 마른 장작 같은 나란 사람에게 늘 필요한 것은 불쏘시개였고, 마침 앞집에 사는 이웃사촌은 나에게 불쏘시개가 되어 줬다. 아이들의 태권도 하원 차량을 기다리며 알게 된 그녀의 글쓰기 모임에 대한 존재와 공석이 있다는 것, 내가 그 시기에 글쓰기에 대한 열망이 있었다는 점에서 이것은 마치 운명이 아닐까. 사실 도서관에서 공식적으로 게시한 글쓰기 프로그램의 인원 모집 포스터를 봤다면 ‘나는 이 시간에 바빠서 못 가. 이건 무자녀 직장인을 위한 프로그램이야.’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엄마 타이틀을 단 여성에게 일곱 시에서 아홉 시 시간대는 전쟁의 시간이다. 내가 할 일은 절대 少少하지 않았으며 이 시간을 대체 가능한 남편이라는 동료 노동자는 퇴근을 언제 할지 알 수 없었다. 

 이 모임이 나에게 고무적인 성과를 준 것이 하나 있다면 이 고정관념을 깨고 저녁 시간대에도 내가 듣고 싶던 수 많은 강의나 모임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경험치를 준 것이다. 상황이 여의치 않아도 눈치 볼 일 없이 아이 둘을 데리고 모임에 갈 수 있게 만드는 분위기의 소소한 에세이 모임은 나를 용기 있게 만들어 줬다. 엄마 따라가는 글쓰기 모임이라니, 어릴 적 엄마의 계모임과 같은 친근함에 글쓰기 모임이라는 교육적인 효과까지! 얘들아, 부디 이날을 기억하렴!  


 저녁 일곱시 반, 퇴근 후 휴식을 취해야 할 시간이지만 현생에 바쁜 다섯 명의 여인들에게는 절대 휴식의 시간이나 여유시간이 아님이 분명하다. 금쪽같은 시간을 내어 마을 도서관에 모이고 서로의 글에 대해 소담히 이야기 나누다 보니 이 모임이 결코 가볍게 느껴지지 않는다. 에세이 쓰기는 나를 내면의 검은 바다 심해로 끌고 가기도 하고 어릴적 울던 아이를 달래기도 한다. 지나간 기억의 파편이라도 주워보려 오랜만에 친구에게 전화를 해 “그때 있었던 일 기억 나나?”로 시작하여 과거로 갔다가 과거와 현재의 나를 이어 미래라는 구슬을 꿰어보기도 한다. 이렇게 써보니 글쓰기가 개인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타인들과의 유대관계를 증진시킨다는 점에서 심리치료의 역할을 하고 있다. 나 역시 글을 쓰며 정체가 흐릿하던 덩어리의 감정과 기억들을 끄집어내어 그것들의 정체를 재확인해 보는 과정을 거치다 보니 에세이를 쓰며 나와 더 친해지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더불어 함께 글 쓰는 동료들의 글을 읽다 보면 요즘 사람들에게는 쉽게 묻기도 대답하기도 곤란한 타인의 삶에 녹아들어 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간혹 온라인 뉴스를 읽다 보면 에세이 유형의 기사에 항상 달리는 댓글이 있다. “일기는 일기장에!”

에세이스트의 어깨를 잔뜩 움츠리게 만드는 이 멘트는 항상 나를 괴롭힌다. 혹시 다른 사람은 궁금하지도 않은 나의 추억을 혼자 신나서 떠들고 있나? 인쇄된 글을 째려보며 고뇌에도 빠진다. ‘이것은 신경 써서 쓴 일기인가, 에세이인가?’ 일기에 대중의 공감 한 스푼이 들어간 것이 에세이가 될 수 있다면 누구나 이런 생각 한번 즈음은 했을 테니 이 글도 에세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문학을 몰라도, 전공과 무관해도, 특별한 에피소드가 없더라도, 그저 먹고 자고 생활하는 ‘생활인’이 에세이스트의 필수 조건 아닐까. 그런 점에서 한 달에 두 번씩 산고 끝에 성실히 글을 낳아오는 ‘소소한 글쓰기’ 동료들은 이미 문인이자 에세이스트다. 나의 좌우명 ‘꾸준히 하다 보면 뭐라도 되겠지’에 근거하여 꾸준한 글쓰기와 애정이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면 우리는 뭐라도 되어 있을 것 같다. 


사진: UnsplashCathryn Lavery

작가의 이전글 모로 가도 산티아고 (prologue)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