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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마치 Oct 28. 2022

오색찬란하게 빛나는 '나'

영화 <인사이드 아웃>



 



 대학교 3학년 심리학 수업에서 <인사이드 아웃> 보고 감상평을 쓰는 과제가 있었다. 수업 시간에 영화를 보여  테니, 다음 주까지 레포트를 써오라는 교수님의 주문. 교수님께는 죄송하지만, 교수님의 기나긴 설명보다  영화  편이 기초 심리학을 이해하는  훨씬 도움이 됐다. 장기기억, 망각 등의 어려운 용어를 무작정 암기하는 것과는 비교할  없을 정도로 쏙쏙 머리에 들어왔다. 영화로 지식까지 얻는 진귀한 체험이다. 물론 지식보단 감동이 훨씬 앞선다.  때마다 너무도 귀엽고 사랑스러운 '인생 영화' 됐으니.

 

수업  배운 심리학 이론과 연관 지어 영화 감상문을 써야 했는데 글쓰기를 시작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과제는 신경  겨를도 없이 영화가 뿜어낸 감동의 소용돌이에서 허우적대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디즈니' '픽사' 애니메이션은 워낙 어른에게도 감동을 주는 클래식이긴 하지만,  그렇게 많이   애니메이션 영화  처음이었다. 수업 시간에 '디즈니 영화' 보며 우는 것을 옆자리 동기들에게 들킬까  무던히 애를 썼는데, 다행히 그들도 눈물에 번지는 마스카라를 열심히 닦아내고 있었다. '주인공 꼬맹이의 심리에 공감하는   혼자 아니다' 작은 안도감.  


대학교 3학년은 그런 시기였다. 스물둘셋. 어른도 애도 아닌 애매한  나이는 우리에게 슬픔도 개의치 않을 성숙한 면모와, 천진하고 명랑한 모습을 모두 요구한다.  슬픔으로 향하는 마음을 애써 붙들어 매고 기뻐져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다. <인사이드 아웃> 바로  지점을 정확하게 찌른다. 무방비 상태로 급소를 찔렸으니 울컥울컥 올라온 눈물을  빼낼 수밖에.






기쁨(Joy), 슬픔(Sadness), 버럭(Anger), 까칠(Disgust), 소심(Fear). 주인공 라일리의 머릿속에 사는 다섯 감정들이다. 라일리는 사춘기가 오기 시작한 11 소녀다. 영화 속에서 감정 오총사의 무대는 라일리의 머릿속이다. 이른바 '감정 컨트롤 본부'에서 이들은 라일리의 외부 상황에 따라 감정을 출력한다. 가족과의 장난,  등교 같은 상황에선 라일리 안에서 기쁨이가 신나게 춤을 추고, 라일리는 웃게 된다.  버럭이가 분노 데시벨을 올리면 라일리는 퉁명스럽게 말한다.


머릿속  다른 공간에는 '기억 저장소' 있다. 라일리의  순간이 기록된 기억들은 구슬 형태로 보관돼 차곡차곡 쌓여있다. 인생에서 중요한 순간들인 '핵심 기억' 따로 저장되어 있다.  핵심 기억은 때때로 감정 컨트롤 본부에서 요긴하게 쓰인다. 예를 들어, 하키 게임에서  골을 넣은 순간은 즐거운 핵심 기억으로 남아 떠올릴 때마다 행복함을 느낄  있다.

기억 저장소들과 본부를 연결하는  인격을 형성하는 ''이다. '가족 ' '우정 ' '엉뚱 ' 등의 인격 섬이 모여 라일리의 성격을 형성하게 된다. 이밖에도 장기기억, 단기 기억, 꿈을 꾸는 과정  그 복잡하고 광범위한 심리 과정 전반을 놀라울 정도로 실감 나게 구현했다.


 행복했던 라일리의 일상은 이사와 전학으로 뒤죽박죽이 되기 시작한다. 라일리의 심리적 불안과 함께 까칠이와 슬픔이 등 다른 감정들도 제 존재감을 드러내고,  행복한 핵심 기억을 지키려던 기쁨이가 감정 컨트롤 본부를 이탈하게 되면서 본부와 라일리의 심리는 흔들리기 시작한다. 기쁨이가 진두지휘하던 감정 컨트롤 본부에도 위기가 찾아온다.




 <인사이드 아웃>은 라일리의 행복을 위해 길을 나선 슬픔이와 기쁨이의 여정을 통해 '슬픔의 소중함'에 대해 전한다. 기쁨이는 라일리의 감정을 해칠까 봐 슬픔이를 움직이지 못하게 가둬둔다. 행복으로 충만했던 라일리의 핵심 기억이 변질될까 구슬에는 손도 못 대게 한다. 나 역시 '기뻐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던 터라, 라일리의 기억들이 자꾸 파랗게 변하고, 슬픔이가 눈치 없이 자꾸 울어대서 조금 짜증이 났다. 하지만 바로 이어지는 타이밍에 <인사이드 아웃>의 메시지를 제대로 깨닫게 된다. 슬픔은 꼭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일탈한 라일리를 다시 일으킨  슬픔으로부터 나온 공감과 위로였다. 기쁨이는 절대    없는 일들. 징징거리는  같던 슬픔이의 울음은, 울고 나서야만 얻을  있는 치유와 안정을 가져온다. '없어졌으면 좋겠다' 생각했던 슬픔이에게 무한히 미안해지면서, 슬픔이를 애틋한 눈길로 다시 보게 한다. 슬픔 뒤에 오는 기쁨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임을 알아차리면서, 황금빛으로만 빛나던 라일리의 핵심 기억들은 슬픔이의 손을 거쳐 파랑과 노랑이 섞인 아름다운 구슬이 된다.


 감동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슬픔이의 존재로 마음이 울렁거렸다면, '빙봉'은 눈물샘을 터뜨리는 장본인이다. 꼬마였던 라일리가 상상으로 만든 존재 빙봉. 라일리의 머릿속에 여전히 살아있던 그는 점점 망각된다. 빙봉은 기쁨이와 슬픔이를 도와주면서 라일리를 위해 스스로 소멸을 택한다. 여전히 라일리와의 놀이를 추억하면서. 그 장면에서 내 안에 살고 있던 어린애와 순수하고 철없던 시절의 기억 조각들이 한꺼번에 밀려오는 것이다. 아마도 나의 빙봉 역시 기억 쓰레기장에서 천천히 잊혔겠지만, 내게도 순진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또는 시절)가 있었음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그런 기억들은 잊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너무 잊고 살았던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스친다.

 

빙봉의 소멸은 필연적인 성장 과정이다. 그럼에도, 다시 돌아갈  없는 어린 시절이라는 막연한 그리움이 아니라 어느 존재의 영원한 사라짐이라고 생각하니 너무나 치명적인 슬픔으로 밀려온다. 유년기와 청소년기에 마주해야만 했던 좌절과 실패를 겪고, 시간이 흘러 그보다   무너짐 개의치 않아지는 경지에 오르면서  안의 빙봉들은 말없이 사라지거나 짓밟히고 깨졌다는 것을 '아차'하며 깨닫게 된다.  

빙봉은 "라일리를 달에 데려다줘!"라고 외치며 기억 폐기장의 어둠 속에 파묻힌다. 꼬마 라일리와 상상 속에서 달나라행 로켓을 타던 것을 기억하며 기꺼이 자신을 희생한다. 나의 빙봉은 사라지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분명 내게도 달나라에 함께 갔던 빙봉이 있었으리라. 이제 와서 지난 기억을 되살릴 수는 없지만 그래도  가지 다행인  <인사이드 아웃> 같은 영화를 보면서 잠시라도 어린 시절이 담긴 핵심 기억들을 꺼내볼  있다는 것이다.



 


수업 시간의 영화 상영이 끝나고 교수님은 "여러분의 감정 컨트롤 본부에선 누가 주도권을 갖고 있냐" 질문했다. 동기  일부는 '슬픔'이라고 했다.  친구는 "슬픔이 주된 감정이면  되는 거라 생각했었는데, 우울할  그냥 슬퍼하고 울어도 괜찮은  같다" 털어놓았다. 그때 나의 대답 역시 슬픔이었다. 11 라일리에게도 슬픔이 찾아왔듯, 지금 돌이켜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들이 당시엔 크나큰 슬픔 덩어리였다. 대체 그게  슬픔이었는지도 잊었을 만큼 가볍고 티끌 같은 상념들이 나를 괴롭혔다.


 지금은 기쁨이가  감정 컨트롤 본부를 지휘한다. 슬픔이 오면 오는 대로, 가면 가는 대로 받아들이게 되자 비로소 기쁨이가 주도권을 찾았다. 고작    사이에도 현실에 이리 저리 치이고, 누군가에 뻥뻥 차이고, 그럼에도 이를 아득바득 갈며 쌓아온 씩씩함으로부터 되찾은 기쁨이다(어쩌면 기쁨이와 까칠이  어느 경계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짧은 기간에도 사회와 시간은 사람을 어느 정도 철면피로 만드니까. 그런 점에서 라일리 부모님 메인 캐릭터들이  슬픔과 분노였는지   같기도 하다.


 슬픔을 받아들이게 되면 울음 끝이 짧아져 금세 회복하게 된다. 사소한 행복이 모여 핵심 기억이 되고, 생명력을 얻고, 기꺼이 기쁨에게 감정 컨트롤을 맡기게 된다. 이젠 기쁨이 뒤에 든든한 슬픔이가 함께라는 것을 안다. 앞으로도 숱하게 무너지고 화가 나겠지만 그때마다 슬픔이의 새파란 위로를 받고  훌훌 털고 일어날 것임을. 오색찬란한 다섯 덩어리들의 이야기로 사랑과 희망, 행복의 메시지를 전한 <인사이드 아웃> 역시, 나의 노랗고 파란 핵심 기억이다.



인사이드 아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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