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인생에서 보폭이 좁아지는 시기가 있다

그 시기는 임시정거장에 가깝다

by 춘림

고시원 방 안에서 나는 ‘걷는다’는 감각을 잃어가고 있었다.

문을 열면 바로 침대였고, 침대 옆에는 책상, 책상 아래에는 의자가 있었다.

그 사이를 공간이라 부르기엔 민망했다. 고작 한두 걸음이면 끝나는 세계.

활동 반경이 좁아져 살이 쪘고, 마음은 자꾸만 고향 집 거실로 달려갔다.

현관문을 열면 쏜살같이 달려 나오던 강아지,

그 녀석의 꼬리를 쫓아 안방에서 거실로, 다시 주방으로 오가던 보폭들.

그때의 나는 공간을 ‘활보’하고 있었지만, 지금의 나는 공간에 ‘갇혀’ 있었다.


회사는 그럭저럭 적응하고 있었다. 일도, 사람들도 나쁘지 않았다.

이 정도면 오래 다녀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나는 마음속에 플랜 B라는 비상구를 만들어두고 있었다.

공모전에 원고를 내고, 정부 창업지원사업에 도전해 보려고 사업계획서도 써보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한 달이 다 되도록 결론이 나지 않았다.

이 회사를 계속 다닐지, 고시원을 나가 방을 구할지, 다시 고향으로 내려갈지...

고시원 방문 위에 '비상문'이라는 팻말이 붙어있다


내가 바라는 삶은 분명 존재했다.

고향집에서 프리랜서로 일하며 창작을 이어가고,

내가 구상한 사업 아이템으로 지원사업에 도전하며,

그 시도가 누적되어 결국 하나의 업으로 자리를 잡는 삶.

하지만 그 삶은 나의 선택만으로 가능한 삶이 아니었다.


나는 결정을 미루는 이들의 임시 정거장 같은 고시원 생활을 한 달 더 연장했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 대표가 나를 회의실로 불렀다.

표정이 무거웠다.

“안 좋은 얘기를 좀 해야 할 것 같아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생각했다. 나 짤리는 건가? 근데 왜?

대표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내 연봉이 부담된다고 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제 와서?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올해 수주가 기대에 못 미쳤다는 말이 뒤따랐다.

그래서 결론은? 그런 표정으로 대표를 바라보자

그는 조심스럽게 프리랜서 전환을 제안했다.

처음 겪는 상황이라 당황스러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반가운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고시원의 두 걸음짜리 삶을 정리하고,

고향 집 거실에서 강아지와 함께 뒹굴며 창작을 이어갈 수 있는

완벽한 명분이 생긴 셈이었으니까.

내가 반색하자, 오히려 당황한 건 대표였다.

권고사직을 당하면서 이렇게 좋아하는 직원은 처음 본다는 얼굴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생각하게 되었다.

내 삶의 선택과 결정이 언제나 나의 의지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때로는 내가 결정을 미루고 있을 때,

보이지 않는 손이 나 대신 방향을 정해주는 순간이 있다는 것을.

좋은 일이 반드시 좋은 얼굴로 찾아오는 것도 아니고,

나쁜 일이 늘 나쁜 결말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인생은 내가 여러 문 앞에서 망설이고 있을 때,

조용히 하나의 문을 열어

나를 다음 장면으로 밀어 넣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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