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친구 절벽

“나이가 들수록 친구는 줄어든다. 그러나 남는 친구는 마음의 길이가 깊다

by 최국만


“나이가 들수록 친구는 줄어든다.

그러나 남는 친구는 마음의 길이가 깊다.


젊을 때는 친구가 많았다.

같이 술 마시고, 웃고, 세상을 바꿀 이야기까지 했다.

전화번호부엔 이름이 빼곡했고,

심지어 내 휴대폰에는 무려 연락 번호가 3000개가 넘었다.

누가 먼저 만나자고 하면 언제든 달려 나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이가 들수록 그 이름들이 하나둘 지워졌다.

퇴직 후엔 더 빨랐다.

직장이라는 울타리가 사라지자

함께 있던 사람들도 자연스레 멀어졌다.


퇴직 후 1~2년이 지나면

전화는 줄고,

모임은 흐지부지된다.

어쩌면 친구가 사라진 게 아니라

‘내가 속한 세계’가 바뀐 것이다.


나는 방송국에서 30년 넘게 일하며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기자, PD, 작가, 카메라맨, 관계자들…

그리고 수많은 제보자들.

그때는 모두가 친구 같았다.

그런데 퇴직하고 나니 그 수많은 인연이

한순간에 ‘추억’으로 바뀌었다.


처음엔 서운했다.

함께 밤을 새워 취재했던 동료들이

이젠 다른 곳에서 바쁘게 살고 있었다.

나는 잠시 세상에서 밀려난 사람 같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알게 됐다.

친구는 많을 때보다,

없을 때 더 잘 보인다는 것.


이제 남은 친구는 몇 안 된다.

10년 넘게 함께한 동네 후배들,

가끔 괴산 산길을 함께 걷는 이웃들,

그리고 인생 이야기를 터놓을 수 있는 단 한 사람

내 아내.


예전엔 친구가 많을수록 인생이 풍성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진짜 친구는 수가 아니라 깊이다.

말이 없어도 통하고,

한참을 침묵해도 불편하지 않은 사람.

그런 친구 하나면 충분하다.


요즘은 ‘친구 절벽’이라는 말이 있다.

은퇴와 함께 인간관계가 끊기고

새로운 관계를 맺기 어려운 현실을 뜻한다.

나도 그 절벽을 한동안 마주했다.

그 절벽 앞에서 가장 외로운 순간은

누군가를 그리워하면서도

더 이상 연락할 용기가 없을 때였다.


하지만 그 절벽 위에도 꽃은 핀다.

그건 ‘새로 피운 관계’가 아니라,

오래된 관계가 다시 살아나는 꽃이다.

오랜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그때 고마웠어.”

한마디만 해도 마음이 환해진다.

특히 요즘은 과거 제보자들 한테 연락이 많이 온다


“ 최PD님, 그때 정말 고마웠습니다”


아내는 내게 종종 말한다.

“여보, 친구가 없다고 너무 외로워하지 말아요.

당신은 이미 친구 같은 삶을 살고 있잖아요.”

그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돌이켜보면, 내가 지금 돌보는 장애인 친구들,

함께 밭을 매는 마을 사람들,

그들 모두 내 삶의 또 다른 친구들이다.


이제 나는 ‘친구 절벽’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절벽 위에서

진짜 사람을, 진짜 마음을 본다.


젊은 세대에게 말하고 싶다.

인생의 어느 시점이 되면

사람보다 ‘나 자신’과 친구가 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혼자 있는 시간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 속에서 자신을 다듬는 법을 배우라고.


나이 들어 친구는 줄지만,

그 대신 마음의 자리가 넓어진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