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나강의 아베마리아

얼지 않은 시간의 노래

by 최국만


사하공화국 야쿠츠크에 도착했다.

세계에서 가장 추운 땅, 시베리아의 중심이다.


우리 취재팀이 도착했을 때는

1년 중 단 두 달만 허락된, 비교적 ‘따뜻한’ 시기였다.

겨울이 되면 레나강은 얼어붙고

그 강 위는 배가 아니라 트럭과 자동차가 달린다.

강이 길이 되고, 대지가 되고, 삶의 통로가 되는 곳.

그것이 시베리아였다.


우리는 이곳에

시베리아 전역에 불고 있는 태권도 열풍을 취재하러 왔다.

야쿠츠크 광장에서, 한국어 학교에서,

또 지역을 옮겨가며 시범과 수업, 인터뷰를 이어갔다.


모든 취재를 마친 뒤

이틀 정도의 여유가 생겼다.

그 시간 동안 우리는

이 땅이 가진 본래의 얼굴을 기록하고 싶었다.


동토의 시장, 고려인의 얼굴


먼저 찾은 곳은

야쿠츠크 중앙시장.


날씨는 풀렸다지만

공기엔 여전히 찬 기운이 배어 있었다.

쇠고기와 사슴고기, 각종 육류가

아무런 냉장시설도 없이 난전에 진열돼 있었다.


상인들의 얼굴을 보며

나는 낯설지 않은 느낌을 받았다.

피부색, 눈매, 말투까지

우리와 닮아 있었다.


그들은 고려인이었다.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으로

이 동토의 땅까지 내몰린 사람들.

춥고 배고픈 시간을 견디며

이제는 중앙시장의 한복판에서

삶을 이어가는 이들이다.


코디의 설명을 들으며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이주 1세대는 대부분 세상을 떠났고

이제 2세대, 3세대가

이 땅에서 태어나 이 땅을 고향으로 부른다.


그들의 삶은

혹독했지만 단단했고,

조용했지만 뿌리가 깊었다.


레나강, ‘큰 강’ 위에 올라


다음 행선지는 레나강.

길이 4,400km,

세계에서 열 번째로 긴 강.


‘레나’라는 이름은

원주민의 말로 ‘큰 강’을 뜻한다고 한다.

이곳에선 그 말이 과장이 아니다.

강은 바다처럼 넓었고

수평선은 강의 것이었다.


마침 우리가 도착한 날은

강이 완전히 녹아

여객선이 기념 출항하는 날이었다.

나는 그 배에 오를 수 있었다.


배 안은 축제처럼 붐볐다.

출항을 기념해

야쿠츠크 음악영재학교 학생들이

연주를 준비하고 있었다.


저녁 무렵,

배는 레나강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기암괴석, 동토의 땅,

그 속에서도 꿋꿋이 자라는 나무들이

강 양쪽으로 펼쳐졌다.


그리고 음악이 시작됐다.


강 한가운데서 들은 ‘아베 마리아’


20여 명의 학생이 연주하는 선율.

바람은 차분했고

강은 숨을 죽인 듯 고요했다.


그중 한 곡.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


그 음악은

바이올린 현에서 울렸지만

분명 삶의 노래였다.


동토의 대지,

얼지 않은 강,

그리고 차분히 흘러가는 배 안에서

그 음악은

인간이 끝내 잃지 않는 어떤 존엄과

고요한 기도를 닮아 있었다.


나는 말없이 그 연주를 들었다.

그 순간만큼은

취재도, 카메라도, 일정도

모두 강 저편으로 흘러갔다.


연주가 끝난 뒤

학생들이 CD를 팔았다.

나는 열 장을 샀다.

기념이 아니라, 기억으로 남기고 싶어서였다.


우리는 그 배에서 1박을 했다.


레나강의 어부


다음 날,

선착장에서 내려

레나강 주변을 취재했다.


광활했다.

너무 넓어서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차로 한 시간 넘게 달린 끝에

겨우 집 한 채를 발견했다.

굵은 통나무로 지은 집.

주인은 70대쯤 되어 보이는 어부였다.


그는

“여기 대접할 건 없고

강에서 고기나 잡아먹읍시다“

라고 말했다.


그는 작은 투망 하나를

강에 던졌다.


놀랍게도

그물은 단번에 고기로 가득 찼다.


강가에서

나뭇가지로 삼각대를 만들고

작은 냄비를 걸었다.

내장을 제거한 고기에

소금 한 줌.


그 맛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문명도, 기술도, 조미료도 없이

자연과 함께 살아온 맛.


나는 그 어부가 부러웠다.

쫓기지 않는 삶,

과장 없는 말투,

가식 없는 환대.


“여기서 다음 집은

70~80km는 더 가야 해요.”


그 말이

이상하게도 평온하게 들렸다.


돌아오며 생각했다


전 세계를 취재하며 다녔지만

지금도 내 마음에 가장 오래 남아 있는 장면은

레나강 위에서 들은 슈베르트의 선율과

그 강에서 고기를 잡던 한 어부의 해맑은 얼굴이다.


그것이

어쩌면 인간이 본래 지녔던

참모습은 아니었을까.


우리는

너무 빨리 달리고,

너무 많이 소유하며,

너무 쉽게 마음을 잃어버린 건 아닐까.


삶의 방식은 저마다 다르지만

마음의 온도를 지키는 삶,

정서의 균형을 잃지 않는 삶

그런 삶이

더 바람직한 삶은 아닐까.


레나강은

지금도 흘러가고 있을 것이다.

슈베르트의 음악처럼

조용히, 그러나 깊게.


그리고 나는

그 강 위에서

삶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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