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PD가 가장 깊이 고민하는 순간
그 사람을 처음 만난 건
정부양곡보관창고를 취재하던 때였다.
정확히 말하면
만난 건 아니다.
그의 목소리를 들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 목소리는
지금도 가끔 내 안에서 울린다.
나는 아이템을
신문이나 방송에서 찾지 않았다.
출근하는 곳은 늘 현장이었다.
가을 추수가 막 끝날 무렵,
우연히 진천의 한 경로당에 들렀다.
늘 하던 대로 물었다.
“어르신, 이 동네 사시면서
힘든 일 없으세요?”
어르신 한 분이 말했다.
“힘든 건 없는데 말이야,
기자 양반.
우리가 쌀 한 톨 만들려면
손이 백 번은 가야 하는데
마을 입구 양곡보관창고 가서
쌀을 어떻게 보관하는지 좀 봐요.
쥐들이 잔치야, 잔치.”
그 말이
취재의 시작이었다.
진천군에서 시작한 취재는
곧 다른 시·군으로 이어졌다.
보관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결국 방송은
전국 9시 뉴스에 나갔다.
충북도청은 물론
당시 농림부에서도
강한 질책이 쏟아졌다.
전국 양곡보관창고에 대한
대대적인 점검이 이루어졌다.
취재의 시작점이었던
진천군은
말 그대로 초토화됐다.
방송이 나간 뒤
며칠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내 전화가 울렸다.
“최 PD님이시죠?
양곡보관창고 방송 만드신 분 맞죠?”
“네, 맞습니다.
어디서 전화 주셨나요?”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가 말했다.
“제 아버지가
그 창고 책임자였습니다.”
나는 말이 막혔다.
“아버지는
시골 한직에 계시다가
퇴직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소장 임무를 맡고
고향으로 돌아오셨어요.
그렇게 행복해하셨어요.”
그리고 그는 물었다.
“그렇게까지 방송을 해야 했나요?
아버지의 마지막 꿈까지
무너뜨려야 했나요?”
나는 취재를 대충 하지 않았다.
검토에 검토를 거쳤고,
원고 하나, 편집 컷 하나까지
모두 확인했다.
시사회까지 거쳐
방송을 내보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과장되거나 왜곡된 부분이 있었습니까?”
그는 답했다.
“그건 아니에요.
하지만…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나요.”
그 질문 앞에서
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전화를 끊고
나는 한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공익을 위한 방송이었다.
분명 필요했다.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했다.
그런데
그 책임이
한 사람의 마지막 꿈이었을 줄은
나는 계산하지 못했다.
옳은 일의 기준은
어디까지일까.
그 가족의 슬픔을
나는 과연 이해할 수 있을까.
시사 PD는
옳은 일을 하면서도
늘 누군가를 다치게 한다.
그래서 더 냉정해야 하고,
그래서 더 치열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아무리 공익을 위한다 해도
가슴에는
뜨거운 피가 흘러야 하지 않을까.
지금도 나는 묻는다.
왜 그렇게까지
지독하게 취재했을까.
조금 덜 아프게
말할 수는 없었을까.
30년 가까이 시사 PD로 살며
마음에 남은 아픔은
이 일 하나만은 아니다.
이름을 잊은 얼굴들,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목소리들.
은퇴를 하고 나서야
그들이 하나씩
내 앞으로 걸어 나온다.
이제 나는
방송을 만들지 않는다.
하지만 글을 쓸 때도,
사건을 읽을 때도
나는 여전히 멈춘다.
이 이야기를
지금 꺼내도 되는지,
누군가의 삶을
다시 흔들지는 않는지.
그때 들었던 그 목소리 덕분에
나는 아직도
멈출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아마도 그것이
은퇴 후에도
내가 시사 PD였다는 사실을
부끄럽지 않게 붙들고 사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