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곳의 겨울이 나를 만들었다

주물공장의 살인적인 열기,봉제공장의 부끄러움,막노동 현장의 눈물 같은 땀

by 최국만


내 삶에서 잊을 수 없는 세 곳의 장소가 있다.

주물공장, 여성 봉제공장, 그리고 막노동현장

그곳들은 모두 다르고, 사람들도 달랐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곳들은

나를 부숴버릴 수도 있었고,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 수도 있는

깊은 겨울 같은 장소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겨울들을 견디며

‘나만의 정신’이라는 온기를 얻었다.


1. 주물공장

뜨거움 속에서 배운 고단함의 무게


처음 주물공장에 들어갔을 때는 17세였다.

나는 그 뜨거운 공기가 살아 있는 생물처럼 느껴졌다.


쇳물은 숨이 있는 것처럼 요동쳤고,

용광로는 사람의 체온을 앗아가는 대신

정신까지 녹여버릴 것만 같았다.


기계음이 귓속을 때리고

쇠를 두드리는 망치질이

하루 종일 뼈 속에 파고들었다.


17살의 내 손바닥은

그곳에서 매일 조금씩 딱딱해졌다.

하지만 손보다 더 단단해진 것은

아마도 마음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걸까…?”

작업대 앞에 서 있을 때면

언뜻 그런 생각이 스쳤지만

그 생각을 오래 붙들지는 않았다.


집에 가져갈 품삯을 생각하면

힘들어할 자격조차 없었다.


주물공장은 내게

‘고단함이 삶의 일부일 수 있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가르쳐준 곳이었다.

그리고 그 고단함을 버틸 수 있는 마음까지도

그곳에서 얻었다.


2. 봉제공장

따뜻함과 부끄러움이 뒤섞인 소년의 마음


부산의 여성 봉제공장(보세공장)은

주물공장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바늘이 바쁘게 움직이고,

미싱 소리는 바람처럼 이어졌고,

여성 백 명 사이에 서 있는 나는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는

손과 시선과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잘해줬다.

극장도 데려가 주고,

힘들다고 용돈을 쥐여준 사람도 있었다.


지금 돌아보면

그 모든 호의가 고마웠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그 친절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기 바빴다.


내가 가진 건

가난뿐이었고,

내가 내세울 건

꿈뿐이었다.


그들의 따뜻한 관심 앞에서

나는 어린 나이에

왠지 모를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 따뜻함이 고마우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내 마음을 불편하게 흔드는 그 느낌.


돌아보면, 그 부끄러움은

사람의 정을 거절한 게 아니라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을

흐려지게 두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었다.


그때 이미 나는

삶의 방향을 잃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던 것이다.


3. 막노동 현장

힘든 역경 속에서 배운 ‘한 발 더’의 의미


막노동판은

삶의 바닥 같았다.


거친 욕소리,

허리가 끊어질 듯한 노동,

뜨거운 여름과 얼어붙는 겨울을

그대로 온몸으로 견뎌야 했다.


어느 날은

너무 힘들어 오전 일만 마치고

도망치듯 나왔던 적도 있었다.

그날 나는

버스가 다니는 큰길까지

한 시간 넘게 걸어 내려오며 울었다.


나는 실패한 걸까?

겁쟁이인가?

그런 생각들이 산길처럼 이어졌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날의 나는

도망친 것이 아니라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살아내기 위한 선택이었고,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한 후퇴였다.

후퇴도 때로는

사람을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을

나는 그때 알지 못했다.


막노동 현장은 내게

세상에 지지 않는 법이 아니라

지면서도 다시 일어나는 법을 가르쳐준 곳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곳에서, 나를 지켜낸 단 한가지


주물공장의 살인적인 뜨거움도,

봉제공장의 부끄러움도,

막노동의 눈물 나는 역경도

나를 꺾지 못했던 이유는

어떤 대단한 능력 때문이 아니었다.


나는 어렸지만

분명한 마음 하나를 갖고 있었다.


“이 삶을, 나는 절대 망치지 않는다.”

“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되겠다.”


술도, 담배도,

잠시의 유혹도

그 다짐 앞에서는

아무런 힘을 쓰지 못했다.


삶이 나를 흔들어도

내 안에는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이

주물공장의 겨울도,

봉제공장의 봄도,

막노동의 여름도 모두 이겨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세 곳이 나의 선생님이었다.


그들은 거칠고, 힘들고, 때로는 잔인했지만

내 마음의 근육을 키워준

삶의 훈련장이었다.


주물공장에서 나는

‘고단함을 견디는 법’을,

봉제공장에서

‘따뜻함 앞에서 나를 잃지 않는 법’을,

막노동판에서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법’을 배웠다.


그 모든 것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세 곳의 겨울을 지나온 나는

이제 안다.


내가 버티며 걸어온 길은

어두운 길이 아니라

나를 빛으로 이끈 길이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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