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사례로 비춰본 한국 장애인복지의 현재
제9편
한국 사회에서 장애인복지를 이야기할 때
자주 나오는 말이 있다.
“우리나라도 많이 좋아졌어요.”
“예산도 계속 늘고 있고요.”
틀린 말은 아니다.
장애인복지 예산은 해마다 증가했고,
제도는 점점 더 세분화되었다.
그런데도 이상하다.
기종이 어머니의 불안은 줄지 않았고,
부모들은 여전히
자신 이후의 삶을 상상하지 못한다.
왜일까.
해외의 복지 선진국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시설 중심 돌봄’이
문제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덴마크, 스웨덴, 영국 같은 나라들은
시설을 없앤 것이 아니라
시설이 유일한 답이 되지 않도록 만들었다.
그들은 질문의 방향부터 달랐다.
“이 사람을 어디에 둘 것인가”가 아니라
“이 사람은 어디에서 살아왔는가.”
그래서
집과 비슷한 소규모 주거,
익숙한 동네 안의 그룹홈,
개인별 지원 인력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그 과정에서
가장 먼저 바뀐 것은
건물이 아니라 태도였다.
장애인은
‘관리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이웃’이라는 전제가
사회 전반에 깔려 있었다.
반면 한국 사회는
아직도 장애인을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본다.
보호는 필요하다.
그러나 보호만 있고
선택이 없을 때,
그 보호는 쉽게 통제가 된다.
한국의 시설은
여전히 효율을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다.
많은 사람을
한 공간에서 관리하는 방식은
예산 집행에는 편리하다.
하지만 그 편리함의 대가는
개인의 삶이다.
시설에 들어가는 순간
사람은
이름보다 번호로 불리고,
취향보다 일정에 맞춰 움직이게 된다.
우리는 그 불편한 진실을
알면서도 말하지 않는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는 말로
스스로를 설득한다.
해외 사례가
완벽해서 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들 역시 시행착오를 겪었고,
예산 부담도 컸다.
그럼에도 방향을 바꾼 이유는 분명했다.
시설은 사람을 편하게 관리할 수는 있지만
사람을 존엄하게 살게 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예산이 적어서가 아니다.
복지를
‘사후 처리’로 생각한다는 데 있다.
부모가 살아 있을 때는 가족에게 맡기고,
문제가 생긴 뒤에야 제도가 움직인다.
그 결과,
시설은 언제나 늦게 등장하지만
너무 강력한 선택지가 된다.
선진국들은
부모가 살아 있을 때부터
‘이후의 삶’을 준비했다.
그래서 시설은
마지막이 아니라
하나의 선택지로만 남을 수 있었다.
기종이의 삶을 떠올려 본다.
아직 집에 있고,
아직 어머니의 손이 닿아 있다.
바로 지금이
가장 중요한 시간일지도 모른다.
시설로 갈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시간이 아니라,
시설 말고도 다른 길이
존재할 수 있음을 준비하는 시간.
복지는
미래를 미루는 제도가 아니라
미래를 나누는 방식이어야 한다.
우리는 이제
해외 사례를 부러워하는 데서
멈추지 말아야 한다.
그들이 바꾼 것은
시설의 숫자가 아니라
사람을 바라보는 눈이었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묻자.
우리는 언제까지
어쩔 수 없다는 말 뒤에
사람의 삶을 숨겨둘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