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생각한다, 장애는 죄가 아니다

그저 다른 삶일 뿐이다

by 최국만

제10편


나는 오랫동안 현장에서 수많은 장애인과 그 가족을 만났다.

그중 많은 부모들이 이렇게 말했다.

“내가 죄를 받아서 그래요. 내 탓이에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먹먹했다.

누가 그들에게 그런 말을 하게 했을까.

누가 그들에게, 아이의 탄생을 ‘벌’이라 믿게 만들었을까.


장애아를 둔 부모는 아이보다 먼저 세상의 시선을 마주한다.

그 시선은 때로는 동정이고, 때로는 편견이다.

“불쌍하다.”

“전생의 업보다.”

“부모가 잘못해서 그런 거다.”

그 말들은 무심한 듯하지만, 부모의 가슴을 깊이 찌른다.


많은 부모가 그런 시선 속에서 자신을 탓한다.

‘내가 임신 중에 무언가를 잘못했을까?’

‘기도를 덜 했나?’

‘조상의 업이 나에게 온 걸까?’


하지만 나는 확신한다.

장애의 탄생은 죄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생명의 한 형태이며, 인간 다양성의 한 표현이다.


물론 의학적으로 보면 장애의 원인은 다양하다.

유전적 요인, 태아 발달 중 염색체 이상, 환경적 요인, 혹은 예측할 수 없는 돌연변이.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원인을 따지는 일보다,

그 생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인간은 누구나 태어날 때 완벽하지 않다.

누군가는 몸의 일부가, 누군가는 마음의 일부가,

또 누군가는 삶의 여건이 결핍되어 있다.

장애는 그저 다른 형태의 인간 조건일 뿐이다.

어떤 생명도 ‘정상’이라는 기준으로 평가될 수 없다.


장애아를 품은 부모들은 종종 신에게 묻는다.

“하나님, 왜 나에게 이런 아이를 주셨습니까?”

그 물음에는 고통이, 절망이, 그리고 믿음이 섞여 있다.


나는 그 물음 앞에서 생각한다.

혹시 그 아이가 우리에게 사랑을 배우게 하려고 온 것은 아닐까?

고통을 통해 인간의 한계를, 그리고 생명의 신비를 깨닫게 하려는 것은 아닐까?


불교에서는 모든 인연을 ‘연기(緣起)’라 한다.

즉, 모든 것은 어떤 이유로든 서로 연결되어 생겨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장애아의 탄생도 ‘업보’가 아니라 인연의 표현이다.

그 아이는 누군가의 죄를 갚기 위해 온 존재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사랑의 의미’를 가르치기 위해 온 존재일지도 모른다.


나는 방송을 하며 많은 장애시설을 취재했다.

그곳에는 슬픔보다도 더 깊은 사랑이 있었다.

자식의 손을 잡고 하루에도 수십 번 미소 짓는 부모들,

밤새 아이의 호흡을 확인하며 잠드는 어머니들,

그들의 얼굴에는 체념이 아닌 ‘사랑의 각오’가 있었다.


그 사랑은 조건이 없다.

말을 못 해도, 걸음을 못 걸어도, 그 존재 자체로 감사한 사랑이다.

그 사랑은 우리 사회가 잃어버린 인간의 본질적인 따뜻함이다.

나는 그 부모들의 얼굴에서 신의 얼굴을 본다.

그리고 깨닫는다

장애는 인간의 불완전함이 아니라, 사랑의 완전함을 증명하는 형태라는 것을.


나는 지금 장애인활동지원사로 일하며,

그들의 일상을 곁에서 지켜보고, 때로는 그들의 침묵을 대신 느낀다.

그들의 세상은 느리지만 깊고, 단순하지만 아름답다.

그들과 함께할수록 나는 더 인간다워진다.


그래서 나는 믿는다.

장애는 벌이 아니라 선물이다.

그 선물은 불편하고, 때로는 고통스럽지만,

그 속에는 우리가 잊고 살던 사람의 온기, 존재의 의미, 그리고 사랑의 본질이 들어 있다.


장애아를 둔 부모는 죄인이 아니다.

그들은 오히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삶은 인간의 연약함 속에서 피어난 가장 강한 빛이다.


나는 생각한다.

장애는 신의 실수도, 인간의 벌도 아니다.

그것은 ‘다름’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곁에 온 생명의 한 형태이며,

우리에게 ‘사랑의 본모습’을 배우게 하는 신의 또 다른 언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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