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운서에서 프로듀서로, 한 방송인의 기록
제2편
눈썹 하나에도, 나는 방송을 붙들고 있었다
아내와 눈썹 이야기를 꺼냈다.
시청자 게시판에 어떤 글이 있었는지는
굳이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
대신, 그런 이야기가 나왔다는 정도만 전했다.
아내는 내 얼굴을 한참 바라보더니 말했다.
“여보,
내가 보기엔 특별히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시청자가 보기엔 또 다르게 보였나 봐.
미용실 가서 문신하는 건 어때?”
말은 조심스러웠지만
아내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 문제를 나는
쉽게 지나가지 못할 거라는 걸.
지금으로부터 거의 40년 전 일이다.
요즘처럼 눈썹 문신이
흔한 선택이던 때가 아니었다.
그 시절엔
아주 일부 사람들,
대부분은 여자들이 하던 일이었다.
“여보, 남자가 무슨 눈썹 문신이야.
그것도 눈인데,
잘못되면 그걸 평생 어떻게 안고 살아.
난 안 해.”
그렇게 말하며
나는 이 문제를 밀어두었다.
하지만 마음은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일주일이 지났다.
나는 여전히 매일 출근했고,
뉴스를 마치고 나면
자연스럽게 시청자 게시판을 열었다.
혹시 또 그런 글이 올라왔을까 해서였다.
다행히
더 이상 아무 글도 없었다.
북한식 발음에 대한 지적은
원인을 찾았다.
부모님이 전쟁 통에 북에서 내려오신 분들이라
어릴 적부터 몸에 밴 억양이 있었다.
그건 고칠 수 있었다.
의식하고, 연습하고,
조금씩 바꾸면 됐다.
그런데 눈썹은 달랐다.
출퇴근을 반복하면서도
자꾸 신경이 쓰였다.
아나운서를 계속한다면
이 문제를 그냥 넘겨도 되는 걸까.
집에서도, 방송국에서도
나는 거울을 자주 봤다.
표정을 바꿔보며
눈썹이 만들어내는 얼굴의 인상을
유난히 오래 바라봤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고민이 찾아왔을까.
한 달쯤 지나서
내가 먼저 말했다.
“여보,
그래. 가자.”
아내는 놀라지 않았다.
이미 남자 눈썹 문신을
잘하는 곳을 알아두었다고 했다.
그 말에
괜히 마음이 놓였다.
미용실 문을 열자
원장이 반겼다.
“어서 오세요.”
아내가 내 얼굴 사진을 가져와
상황을 다 설명해 두었다고 했다.
나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의자에 앉았다.
아나운서의 얼굴,
그중에서도 눈썹이라서였을까.
원장은 바늘 하나를 찌를 때마다
유난히 조심스러웠다.
아팠다.
그 시절에는
마취도 거의 없었다.
부분 문신이라
참을 수는 있었지만
눈가에 전해지는 감각은
또렷했다.
끝나고 거울을 봤다.
낯설었다.
분명 나인데
아닌 사람처럼 보였다.
“보름 정도는
세수할 때 조심하세요.
관리가 중요합니다.”
돌이켜보면
그 선택을
꾸밈이라고 부르기에는
마음이 너무 무거웠다.
그건
방송을 계속하기 위한
작은 결심에 가까웠다.
방송인은
보이는 직업이고,
시청자는
그 보이는 것에서
먼저 말을 건다.
나는 그 시선을
완전히 거부할 수도,
아무 생각 없이 따를 수도 없었다.
그 사이 어딘가에서
나는 타협했고,
버텼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지금은 잘 믿지 않는다.
“어디 눈썹 좀 봅시다.”
그때 그 원장이
얼마나 정성을 들였는지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눈썹은 거의 그대로다.
이제는 나이가 들었다.
요즘은
눈 밑 지방 제거 같은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꺼낸다.
그때는 한 달을 고민했지만
지금은
조금 덜 망설이게 된다.
시간이
사람을 그렇게 만들었다.
방송은
말과 표정으로 하지만
그 말과 표정 뒤에는
이런 선택들이
조용히 쌓여 있다.
시청자의 관심은
때로는 날카롭고,
때로는 무심하다.
하지만 그 관심이 없었다면
나는 이 자리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다.
눈썹 하나에도
나는
방송을 붙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