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죽이지 못한 고통은 결국 나를 ‘최고‘로 만들었다
후배야,
지금 네 마음이 얼마나 무너져 내리고 있을지 나는 안다.
공황장애와 우울증, 언제 다칠지 모른다는 막연한 공포.
잠을 못 자 수면제에 매달려야 하는 그 밤들이 얼마나 길고 괴로운지 말이다.
나 역시 그 길을 먼저 걸어본 사람으로서, 네 고통이 남의 일 같지 않구나.
사실 나도 그랬다.
화려해 보이던 아나운서에서 PD로 직종이 바뀌었을 때,
내 삶은 통째로 흔들렸다.
남이 써준 원고만 읽으면 되던 시절은 끝났다.
기획, 취재, 편집, 방송까지 혼자서 ‘종합예술’을 진두지휘해야 했다.
아무도 일을 가르쳐주지 않았고,
나는 매일 현장에서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그때 내 몸은 이미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내일이 오는 게 두려워 매일 밤 수면제를 먹어야 겨우 눈을 붙였다.
스트레스 때문에 지독한 변비를 달고 살았고, 몸은 늘 천근만근이었다.
오죽하면 아이 셋을 키우던 내 아내가 울면서 말렸겠나.
“내가 어떻게든 벌어 먹일 테니, 제발 그만두라”라고.
당시 우리 식구는 다섯 명이었다.
연년생 아이 셋이 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이었고,
막내는 고작 세 살이었다.
서울, 광주, 청주, 대구 중 아내의 연고지인 청주로 발령받았지만 집 구하기는 지옥 같았다.
애가 셋이라는 말에 전셋집 주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문을 닫아걸었다.
결국 처가 2층 슬래브집에 얹혀살며 하루하루를 전쟁처럼 버텼다.
그렇게 전직하고 1년이 지났을 때,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막대한 예산이 투입되는 ‘특집 다큐멘터리’ 제작이었다.
PD로 이제 겨우 눈을 뜰까 말까 한 내게 그 특집은 거대한 사형 선고 같았다.
제작 기간 5개월 동안 내 불면증은 극에 달했다.
“망치면 내 인생은 끝이다”라는 공포가 매일 밤 나를 짓눌렀다.
하지만 후배야,
그 절벽 끝에서 나를 살린 건 결국 ‘부딪힘’이었다.
잠이 안 오면 일어나서 기획안을 다시 썼고, 취재원을 만나 진심으로 설득했다.
아나운서 시절의 감각과 대학 학보사 때의 경험이 그제야 하나로 합쳐지기 시작했다.
죽을 것만 같았던 그 5개월은 나를 ‘최고의 프로듀서’로 만든 뜨거운 용광로였다.
나는 결국 최고의 찬사를 받으며 명예롭게 정년을 맞이할 수 있었다.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
지금 네가 겪는 공황과 공포는 네가 약해서 생기는 게 아니다.
네 인생의 마지막 ‘특집’을 앞두고 에너지가 잠시 고갈된 것뿐이다.
40대, 50대. 우리는 모두 비슷한 무게를 짊어지고 산다.
가족이라는 책임감, 직장에서의 생존, 무너져가는 건강 사이에서 외로운 줄타기를 한다.
후배야,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동료들아.
당장 완벽하게 해내려 하지 마라.
나도 수면제를 먹으며, 변비로 고생하며, 처갓집 2층에 얹혀살며 그 길을 걸어왔다.
지금의 고통이 끝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이 아직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정년까지 남은 5년, 혹은 남은 인생의 고비들.
길어 보이지만 인생 전체로 보면 아주 짧은 찰나일 뿐이다.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힘들면 잠시 누군가의 어깨에 기대라.
자네는 충분히 잘해왔다.
지금 이 어둠을 뚫고 나가면,
반드시 밝은 빛 아래서 웃으며 마침표를 찍는 날이 온다.
내가 끝까지 네 페이스메이커가 되어주마.
기운 내라. 우리가 우리 뒤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