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나무 꽃 여울 마을,다시 시작되는 계곡의 숨소리
이탄교를 건넜다.
달천강 지류 위를 지나는 작은 다리다.
여름이면 피서객들로 붐비는 길.
지금은 한겨울인데도, 주말이면 캠핑카 몇 대가 보인다.
사람은 계절을 가리지 않고 자연을 찾는다.
이탄마을로 들어섰다.
‘배나무 꽃 여울’마을.
지금은 스무 가구 남짓 살아가는 조용한 산골이다.
마을을 둥글게 감싸고 선 성불산이
이곳이 사람보다 자연의 자리라는 걸 말해준다.
사계절 꽃이 바뀌며 피고 지는 동네.
그 산자락 외길을 따라 십 분쯤 오르면
우리 밭이 나온다.
그 길은 등산로이기도 하다.
외길 아래로 작은 계곡이 흐른다.
깊은 산속이지만 물은 많지 않다.
그래도 소리는 난다.
조용한 곳에서는 작은 물소리도 크게 들린다.
아내가 아픈 뒤로
이곳은 거의 1년 가까이 사람 손길이 닿지 못했다.
원래는 외길 입구부터 밭까지
풀이 정리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길의 윤곽조차 흐릿하다.
퇴직을 앞둔 어느 날, 아내가 말했다.
“여보, 우리 퇴직하면 자연인처럼 살아보자.
내가 계곡 옆에 밭을 하나 사뒀어.”
그때 나는 일에 치여 있었고
아내는 나보다 먼저 퇴직 이후의 삶을 준비하고 있었다.
8년 전, 친구가 이곳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여긴 농사 안 돼. 산이 바로 붙었잖아.
옥수수, 배추, 무? 다 멧돼지 밥이지.
그냥 운동하고 쉬러 오는 땅이야.”
맞는 말이었다.
산 밑 밭은 사람보다 야생의 영역에 더 가깝다.
전기울타리를 둘러도
야생동물은 들어온다.
그래서 나는 처음부터
농작물 대신 나무를 심었다.
두릅나무 400그루
엄나무 400그루
추위에 강한 묘목을 구하려
강원도 홍천까지 가서
3년생 나무를 사 왔다.
아내와 나란히 구덩이를 파고
묘목을 세우던 날을 아직도 기억한다.
“이걸 팔 수 있을까?”
잠시 그런 생각도 했지만
곧 마음을 접었다.
우리가 먹고
아는 사람 나누고
이곳에서 쉬면 그걸로 충분했다.
봄이 오자
나무는 약속처럼 순을 밀어 올렸다.
두릅을 꺾을 때 나는 ‘톡’ 소리,
엄나무순의 쌉싸래한 향.
계곡 바람이 지나가던 4월,
우리는 말없이 웃었다.
그때 알았다.
삶의 여유는
시간이 많아서도
돈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함께 꺾어 들 수 있는
한 줌의 봄이 있다는 것.
그게 여유였다.
오늘 다시 찾은 밭은
폐허에 가까웠다.
시멘트 외길은 부서지고
풀은 무릎까지 자랐다.
나무들 사이사이
커다란 구덩이가 패여 있다.
멧돼지 흔적이다.
겨울이면 먹을 것이 없어
땅을 뒤집어 지렁이를 찾는다.
그 과정에서 나무 뿌리도 상한다.
절반 가까운 나무가 쓰러져 있었다.
물 고인 자리엔 발자국과 배설물이 남아 있다.
“너희도 힘들었겠지.”
입 밖으로 말이 흘렀다.
이곳은 원래 그들의 산이었으니까.
예전에 누군가 말했다.
덫을 놓으라고.
창애를 설치하라고.
나는 할 수 없었다.
취재 현장에서
올무에 걸려 몸부림치던 짐승들의 눈을
나는 잊지 못한다.
이 밭도
저 멧돼지도
같은 산의 식구라는 생각이
내 마음을 붙잡는다.
“그래도 다 파헤치진 않았네.”
혼잣말처럼 웃음이 났다.
지금 밭은 삭막하다.
하지만 입춘은 지났다.
곧
흙이 풀리고
순이 올라오고
계곡 바람이 부드러워질 것이다.
그 봄에는
아내와 다시 이 길을 걷고 싶다.
톡, 하고 부러지는 두릅
쌉싸래한 엄나무순 향
그리고 옆에서 웃는 사람.
나는 그 장면을
미리 꺼내 보듯 마음속에 그려보며
외길을 내려왔다.
봄은
오고 있다.
우리 밭에도,
우리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