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 술 취했어”. 뱀의 아버지가 가르쳐준 진심
퇴직 후 사무실에서 들고 나온 박스 안에는
30년의 세월이 박제되어 있었다.
10권이 넘는 명함첩과 손때 묻은 20여 권의 취재수첩들.
초창기 아나운서 시절의 다이어리부터
현장을 누비던 프로듀서 시절의 기록까지,
그 속에 담긴 인연의 무게가 묵직하다.
당시에는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공간도 없었건만,
마치 오늘을 예견이라도 한 듯 이 기록들을 고스란히 챙겨 나온 것을 보면
이것이야말로 거부할 수 없는 인연의 법칙, 연기법이 아닐까 싶다.
어느 휴일,
책장 한구석에 박혀 있던 명함철을 꺼내
첫 장부터 천천히 넘겨보았다.
30년간 시사 프로그램을 제작해 온 나의 궤적을 증명하듯,
명함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환경 관련 교수나 전문가들이었다.
나에게 그 명함들은 단순히 이름이 적힌 종이가 아니라 치열했던 현장의 증명서다.
이름 석 자와 소속 뒤에는 그 사람의 성격과 인물됨,
그리고 세상을 향한 뜨거운 관심사가 투명하게 비친다.
유독 내 명함첩에 환경 전문가들이 많은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생태계를 보전하겠다는 일념으로 앞장섰던
그들은 나에게 단순한 취재원 그 이상이었다.
험한 산속을 함께 헤매고,
강바닥에서 수생식물을 채집하며,
숨이 막히는 시멘트 먼지 속에서도 그들은 늘 나를 믿어주었다.
나의 카메라가 진실을 전달할 것이라는
그들의 신뢰와 열정이 있었기에,
나는 수많은 자연 다큐멘터리를 세상에 내놓을 수 있었다.
명함집을 넘기다 모서리가 노랗게 바랜
심 박사님의 명함 앞에서 손길이 멈췄다.
지금은 고인이 된, 국내 최고의 뱀 권위자.
어느 날 오전 10시,
밀렵 취재를 위해 찾아간 연구실에서
그는 50도짜리 고량주에 취해 있었다.
" 뱀 하고 놀려면 독주를 마셔야 해, 얼굴이 벌건데 인터뷰 괜찮겠어?"라며 허허 웃던 그 당당함.
결국 인터뷰는 못 했지만
돌아오는 길의 마음은 왠지 풍요로웠다.
뱀의 친구이자 아버지로 살았던 그분처럼,
내가 만난 전문가들은 모두 자기 삶의 진실을 온몸으로 증명하던 이들이었다.
수천 명을 만나고 수천 가지 아이템을 기획했던 30년의 시간.
이제 와 그 시절이 더 또렷하게 기억나는 이유는
그 힘든 현장을 그들과 '함께' 통과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분들의 깊은 지식과 나를 돕고자 했던 뜨거운 열정이라는 은덕 덕분에
나는 비로소 프로듀서로 완성될 수 있었다.
명함 한 장 한 장을 넘길 때마다 잊고 있던 얼굴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간다.
기록은 기억을 붙잡고,
인연은 시간을 넘어 다시 말을 걸어온다.
이제는 빛바랜 명함 한 장이 내게 가르쳐준다.
우리가 그토록 지키려 했던 환경은
결국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진심이었다는 것을.
30년 전 그들이 보내주었던 깊은 신뢰가
오늘을 쓰는 나의 펜 끝에 여전히 따뜻하게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