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우리가 함께 걷기 시작한 이유
강원도의 12월 밤은
칼날 같은 바람이 불었다.
원주를 지나 태백으로 향하던 기차 창밖은
눈으로 덮여 있었고
우리는 들뜬 침묵 속에 앉아 있었다.
편집장인 나를 포함해 일곱 명.
졸업생과 신입생에게 나눠줄 대학 교지를 만드는
편집위원들이었다.
그중 한 사람이
지금의 아내였다.
학도호국단이 사라지고
총학생회가 다시 만들어진 시기,
나는 교지편집위원장이라는 자리를 맡고 있었다.
교지는 거의 완성 단계였지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이념과 구호만 가득한 글들 사이에
‘사람 냄새 나는 이야기’가 없었다.
그때 누군가 말했다.
“편집장님, 우리 현장 취재 가서
르포 기사 하나 싣는 거 어때요?”
그리고 우리는
‘낙동강 600리를 가다’라는 가제를 정했다.
낙동강 발원지 황지에서 출발해
부산 을숙도까지,
강을 따라 사람을 만나고 삶을 기록하는 취재.
그게 우리 20대 청춘이 내린 결론이었다.
태백역에 도착했을 때는 밤 8시.
눈 덮인 플랫폼 위로
숨이 하얗게 흩어졌다.
첫 취재지는 황지 연못,
낙동강의 발원지였다.
지금처럼 정비된 모습이 아니라
철망 하나 둘러쳐진 어두운 연못.
가로등도 없어 우리는 랜턴 불빛에 의지해
물을 비추었다.
연못 밑에서
샘물이 솟는 것이 보였다.
이 작은 물줄기가
낙동강이 되고
사람들의 삶을 적신다는 사실에
나는 오래 서 있었다.
성경 구절 하나가 떠올랐다.
“네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하리라.”
그때는 몰랐다.
그 말이 낙동강 이야기인지,
우리의 취재인지,
아니면 내 인생 이야기인지.
다음 날 우리는
탄광촌으로 향했다.
음식점 주인은 말했다.
“여긴 국영 탄광이라 그나마 낫지…
민간 탄광 가봐요.
굴 안에서 손으로 캐요.”
우리는 밤늦게
민간 탄광 작업 현장을 찾았다.
진폐증을 막으려 두꺼운 마스크를 쓴 광부들,
겹겹이 껴입은 작업복,
석탄 먼지가 내려앉은 얼굴.
나는 준비해 간 질문지를 꺼냈다.
삶, 희망, 두려움, 가족…
한 광부가 말했다.
“진폐증이 제일 무섭죠.
그래도 일은 해야 하니까요.”
다른 이는 말했다.
“여긴 인생 마지막에 오는 데예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뒤에 서 있던 학생들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우리가 따뜻한 방에서 보내는 겨울은
이 사람들의 폐에서 나온 열이었다.
그 사실이
20대에 우리를 침묵하게 만들었다.
주문진에서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생선을 다듬는 아주머니들을 만났다.
갈라진 손,
굽은 허리,
그러나 멈추지 않는 손놀림.
나는 그 손을 보며 생각했다.
저 손이
누군가의 아이를 키웠고
누군가의 삶을 버티게 했겠구나.
취재를 하는 동안
마음이 편한 순간이 없었다.
세상은 왜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할까.
저 고생의 끝은 어디일까.
그 현장에
지금의 아내도 함께 서 있었다.
우리는 말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같은 장면을 보고
같은 표정을 지었다.
어쩌면 그때
아내의 마음속에도
‘타인을 향한 연민’이
조용히 자리 잡았을지 모른다.
그리고 나에게 그 취재는
단순한 교지 기획이 아니었다.
그곳은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처음 배운 현장이었다.
몇 년 뒤
나는 방송국에 들어갔다.
아나운서를 그만두고
시사 프로그램 PD가 되었다.
위험한 현장,
가려진 이야기,
힘없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찾아다녔다.
돌아보면
그 시작은 태백의 탄광이었고
주문진의 방파제였고
황지 연못의 샘물이었는지도 모른다.
낙동강 600리 르포는
그렇게 탄생했다.
젊은 우리가
처음으로 세상의 무게를 안고 돌아온 기록.
그 빛바랜 사진 속에는
20대의 우리 얼굴들이 있다.
그중 한 사람이
지금 내 곁에서
평생을 함께 걷고 있다.
그 겨울의 취재는
기사 한 편으로 끝났지만
내 삶에는
지워지지 않는 문장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