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국제결혼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나

이주여성과 한국사회,그리고 취재 현장의 기록

by 최국만


2부

국제결혼은 개인의 선택이었을까


그 시절, 이주여성은 ‘사람’이기보다 ‘해결책’이었다


그를 병원에서 만난 뒤

나는 한동안 그 말을 곱씹었다.


“그땐 다들 그렇게 결혼했어요.

저만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


맞았다.

그의 이야기는 예외가 아니었다.


2000년대 초반,

국제결혼은 갑자기 늘어났다.

특히 농촌과 군 단위 지역에서

급격하게 증가했다.


당시 지방자치단체들은

‘총각 문제’를 지역 소멸의 원인으로 보았다.

결혼하지 못한 남성이 늘어나면

마을이 사라진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결혼을 장려했다.

장려금이 붙었고,

중개업체가 연결됐고,

결혼은 하나의 정책이 됐다.


이때부터 국제결혼은

개인의 선택이면서 동시에

행정의 대상이 되었다.


중개업체는 빠르게 늘어났다.

결혼은 상품처럼 설명됐다.


“성실한 여성입니다.”

“도망갈 염려 없습니다.”

“집안일 잘합니다.”


이 말들 속에는

여성의 이름이 없었다.

국적만 있었고,

조건만 있었다.


이주여성은

‘함께 살아갈 사람’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해 줄 존재’로 불렸다.


농촌의 총각 문제,

노동력 부족,

출산율 하락.


그 모든 문제의 끝에

한 사람의 여성이 놓였다.


언론도 그 흐름 안에 있었다.

위장결혼,

사기결혼,

도주.


기사 제목에는 늘

“국제결혼 여성”이라는 단어가 붙었다.

개인의 사연은

범주로 묶였다.


그 시절 기사들을 다시 보면

이주여성은

항상 문제의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왜 왔는지는

잘 다뤄지지 않았다.


많은 이주여성들은

자신의 나라에서도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가난,

가족 부양,

지역 격차,

성별에 따른 기회 제한.


한국은

‘결혼하면 살 수 있는 나라’로

소개되었다.


중개인은 말했다.


“한국에 가면 남편이 있고,

집이 있고,

먹고사는 건 걱정 없다.”


그 말이

완전히 거짓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은 언제나

절반만 사실이었다.


언어는 준비되지 않았고,

문화는 설명되지 않았고,

폭력과 차별에 대한 보호는

제도적으로 약했다.


한국 남성 역시

준비되지 않은 상태였다.


결혼을 앞두고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운 적이 없었다.


그에게 국제결혼은

사랑의 형태라기보다

어머니의 유언이었고,

사회가 허락한 마지막 선택지였다.


두 사람 모두

각자의 절벽에서

밀려난 셈이었다.


그날 병원에서 만난 남성은

자신이 피해자라고 말했다.

그 말은 틀리지 않다.


하지만 그 말이

이야기의 전부는 아니다.


그가 만난 여성 역시

어딘가에서는

다른 언어로

자신을 피해자라고 말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목소리를

거의 듣지 못했다.


취재를 하면서

나는 자주

이 질문 앞에 멈췄다.


국제결혼은 과연

누구의 선택이었을까.


정말 개인의 결정이었을까.

아니면

사회가 만들어놓은 좁은 통로였을까.


그 시절,

이주여성은

환영받는 존재도,

완전히 배척된 존재도 아니었다.


필요했지만

이해받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 틈에서

사람들은

혼자 아팠다.


우리는 다음 취재를 준비했다.

국내만으로는

이 이야기가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매거진의 이전글그 시절, 우리는 국제결혼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