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여성과 한국 사회, 그리고 취재 현장의 기록
1부
병원 침대 위에서 시작된 이야기
도로의 가로수에서 잎이 하나둘 떨어지고 있었다.
날씨는 초겨울로 접어들고 있었다.
병원에 도착해 원무과에서 입원자 명단을 확인했다.
김 00.
병명 옆에는 ‘척추 골절’이라고 적혀 있었다.
“안녕하세요. KBS 최국만 PD입니다.
우리 작가가 연락드렸죠.”
침대에 누워 있던 남자가 고개를 아주 조금 돌렸다.
몸을 일으킬 수 없다고 했다.
침대를 약간 세워서 이야기를 나눴다.
“척추를 크게 다쳤습니다.
의사 말로는 최소 6개월은 입원해야 한답니다.”
잠시 숨을 고른 뒤 그가 말했다.
“창피해서요.
이런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게… 참 창피합니다.”
우리는 당시 이주여성과 국제결혼 문제를 취재하고 있었다.
지금처럼 다문화라는 말이 익숙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군 단위 지자체에서는
결혼하지 못한 농촌 총각을 위해
결혼 장려금까지 지급하던 때였다.
국제결혼은
개인의 선택이면서 동시에
국가와 지역이 개입한 제도이기도 했다.
그는 평생 비혼으로 살 생각이었다고 했다.
어머니와 둘이 살았고,
결혼은 자신의 삶에 없던 선택지였다.
아흔이 넘은 어머니가 임종을 앞두고 남긴 말이
그의 삶을 바꿔놓았다.
“이 어미 평생소원이 네 결혼 보는 건데,
그걸 못 보고 가는구나.
나 죽거든 꼭 결혼해서 살아라.”
그는 이미 40대 후반을 훌쩍 넘긴 나이였다.
주변에서는 국제결혼도 괜찮다고 했다.
어머니의 마지막 말이 마음에 남아
결국 결혼을 결심했다.
당시 국제결혼의 상당수는
중국 조선족 여성과 이루어졌다.
문제는 언어가 통한다는 점이
오히려 위장결혼과 이탈로 이어지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는 국제결혼 업체에 분명히 말했다고 했다.
“한국말을 모르는 중국 한족 여성을 소개해달라”라고.
중국에서 한 번,
국내에서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서 다시 한번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결혼 생활은
그가 상상했던 ‘가정’과는 달랐다.
아내는 밥을 하지 않았고
집안일에도 관심이 없었다.
식사는 대부분 그가 준비했다.
중국에 있는 부모가 아프다며
돈을 요구하는 일이 잦아졌다.
남편으로서 거절할 수 없었다고 했다.
돈을 보내주었다.
한 번, 돈을 보내지 않은 적이 있었다.
그날 이후 아내는 말을 하지 않았고
잠자리를 거부했으며
하루 종일 누워 있기만 했다.
언어는 통하지 않았고
전화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울렸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그래도
혼자 살 때보다 가정이 생긴 것이 기뻤다고 했다.
외식을 하고
옷을 사주고
패물도 마련했다.
그러던 어느 날,
퇴근하고 돌아온 집에
아내는 없었다.
옷장과 화장대는 비어 있었다.
어머니가 남겨준 귀금속까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그 배신감이…
사기결혼의 피해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죽기보다 싫었습니다.”
그는 며칠을
죽을 생각만 하며 보냈다고 했다.
아파트는 13층이었다.
죽기로 마음먹고 몸을 던졌다.
“그런데요,
3층에 공사용 그물망이 쳐져 있었습니다.”
그물망에 걸렸다.
목숨은 살았고
척추는 부서졌다.
“그때는…
죽는 것도 마음대로 안 되는구나 싶었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사건은
그 개인의 불행으로 끝나지 않았다.
당시 전국 곳곳에서
비슷한 사건들이 동시에 벌어지고 있었다.
국제결혼이라는 이름 아래
사람들이,
그리고 특히 이주여성과 남성들이
제도 안에서 서로를 전혀 알지 못한 채
맞부딪히고 있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여기서 멈추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