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여성과 한국사회, 그리고 취재 현장의 기록
3부
그 뒤로, 국제결혼은 ‘사건‘에서 ’ 정책’이 되었다
바뀐 것은 제도였고, 바뀌는 중인 것은 시선이었다
그 병원 침대에서 들은 이야기 이후로,
나는 한동안 “국제결혼”이라는 단어가 어디에 놓이는지 자주 보게 됐다.
예전에는 그 단어가 주로
사건 기사 제목에 달려 있었다.
사기, 도주, 폭력, 파국.
국제결혼은 늘 뭔가 터진 뒤에야 불렸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국제결혼은 기사보다 먼저
정책 문서와 법 조문 속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변화의 표면에는 2008년이 있다.
그해 정부는 다문화가족지원법을 제정했고,
결혼이민자와 그 가족을 대상으로
생활정보 제공, 교육, 상담, 적응 지원 같은 제도를 법의 언어로 만들었다.
같은 시기, 국제결혼을 “알선하는 산업”도 손보기 시작했다.
「결혼중개업의 관리에 관한 법률」 체계가 잡히고, 국제결혼 중개업이 등록·관리의 대상이 됐다.
그때부터 국제결혼은
개인의 선택이면서 동시에
“관리되어야 하는 영역”이 되었다.
현장에서 느껴진 건
문제가 사라졌다는 감각이 아니라,
문제를 더 이상 ‘사람의 잘못’만으로 설명할 수 없게 됐다는 감각이었다.
몇 년 지나지 않아
국제결혼은 국내 문제를 넘어
국가 간 문제로도 불거졌다.
불법·무등록 중개업체 단속이 “일제단속”이라는 말로 등장하고,
정부가 보도자료로 단속을 예고하는 시기가 온다.
신문 지면에는 “신부 쇼핑” 같은 단어가 실렸고,
단속 이유에는 “국가 간 범죄로 비화될 우려” 같은 표현이 붙었다.
이 시기부터 국제결혼은
더 이상 개인의 사연만으로 수습되지 않았다.
국가가 개입해야 하는 영역이 됐다.
인권의 언어도 늦게나마 들어왔다.
국가인권위원회는 결혼이주여성의 안정적 체류와 관련해
당시 제도(신원보증서 제출)가 헌법적 가치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보고
제도 개선 의견을 냈다.
지자체가 국제결혼을 “지원”한다는 이름으로 만들었던 일부 조례·사업이
이주여성을 인구정책의 도구처럼 다룬다는 비판도 공식적으로 다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국내의 문제”는
국제기구의 시선으로도 반복해서 확인된다.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CEDAW)는
한국의 이주여성(특히 결혼이주여성)이 겪는 어려움과
폭력 피해 신고·지원 체계 등과 관련해
권고를 지속적으로 내고 있다.
그 무렵 또 하나의 변화가 일어난다.
국제결혼은
‘결혼하면 들어오는 비자’가 아니라
심사 기준을 갖춘 제도가 되어간다.
법무부는 결혼이민(F-6) 비자의 심사기준이 변경돼 2014년 4월부터 전면 시행된다고 공지했고, 혼인신고를 했더라도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면 비자가 나오지 않을 수 있음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이후에도 결혼이민(F-6) 관련 소득요건 산정 방식 등
운영상의 기준이 구체적으로 안내된다.
지금 생각하면,
이 변화는 양면이었다.
한쪽에서는
무분별한 중개와 ‘급하게 만든 결혼’을 줄이려는 장치가 생겼고,
다른 한쪽에서는
제도가 개인의 삶을 더 많이 심사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분명한 건
이후의 국제결혼은
과거처럼 “알아서 하다 사고 나면 개인이 감당하는 방식”으로만
남아 있기는 어려워졌다는 점이다.
그리고 사회의 언어도 바뀌었다.
예전 기사에서 이주여성은
“국제결혼 여성”이라는 덩어리로 불렸지만,
어느 순간부터 행정과 지원체계는
“다문화가족”, “가족센터”, “정착지원” 같은 말로
새로운 범주를 만들었다.
지금 ‘다누리’ 같은 포털과 가족센터 프로그램 안내를 보면
한국어 교육, 상담, 적응 프로그램이
일상적으로 운영되는 풍경이 보인다.
그 풍경이 생기고 나서야
국제결혼은 조금씩
“사건”에서 “생활”의 영역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나는 여기까지 쓰면서도
한 문장을 쉽게 못 쓰겠다.
“부정적 이미지가 사라졌다.”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분명 달라진 것이 있다.
예전에는 국제결혼을 둘러싼 문제가 터지면
‘누가 나쁜가’가 먼저였다.
지금은 최소한
‘어떤 구조가 사람을 고립시키는가’를 함께 보려는 장치가 생겼다.
법이 생기고,
센터가 생기고,
국제기구가 같은 질문을 반복하고,
국가가 비자와 중개업을 손보는 과정이 겹치면서
국제결혼은 더 이상
한쪽의 수치나 한쪽의 범죄로만 포장되기 어려워졌다.
그 병원 침대의 남성을 다시 떠올리면
나는 그를 미화하고 싶지 않다.
그의 선택은 비극이었고,
그 비극은 그 한 사람만의 사연이 아니었다.
동시에,
그의 이야기만 남기면
이주여성은 영원히 “의심받는 존재”로만 남는다.
그래서 3부의 결론은
해답이 아니라 관찰이다.
그 시절 국제결혼은
사람을 너무 빨리 묶었다.
언어도, 제도도, 보호도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는 “결혼”이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낯선 나라에 던져 넣었다.
그 뒤에 한국 사회는
늦게나마 개입하기 시작했다.
법을 만들고, 중개를 규제하고, 정착을 지원하고,
국제적 기준과 시선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국제결혼은 조금씩
덜 폭력적인 단어가 되어갔다.
아마 부정적 이미지는
“사람 져다”기보다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게 됐다.”
누군가를 단정하기보다
구조를 묻는 문장이 늘어난 만큼,
이주여성이 ‘사건’이 아니라 ‘이웃’으로 읽히는 순간도
조금씩 늘어난 만큼.
나는 그 변화를
현장에서 천천히 확인했다.
그리고 그 변화가 완전해지려면
앞으로도 오래 걸릴 것이다.
다만
예전처럼, 누군가가 사라지거나
누군가가 뛰어내린 뒤에야
우리가 문제를 발견하는 방식만큼은
조금씩 줄어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건 교훈이 아니라,
그 시절을 지나온 취재자로서
지금까지 남은 감각이다.
다시 병원을 찾았다.
“ 김 00 씨가 준 휴대폰 통화 내용을 중심으로 취재를 했습니다.
아내의 마지막 통화가 끊긴 곳이 안산 반월공단 근처까지는 확인이 됐습니다 “
“돌아오지 않을 사람입니다. “
“빨리 쾌유해서 일상으로 돌아오세요”
병실을 나서는 나도 마음이 무거웠다.
지금 그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