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디를 심고, 생명을 기다리다

베이비부머의 귀촌, 그리고 한 여자의 회복

by 최국만


베이비부머가 대거 현직에서 물러나던 해였다.

도시는 여전히 분주했지만, 많은 이들의 마음은 이미 산을 향하고 있었다.


한적한 시골에 그림 같은 전원주택을 짓고 사는 것.

그것은 단순한 부동산 선택이 아니라, 한 시대의 집단적 로망이었다.

나 역시 그 흐름 안에 있었다.


인천 인하대학교 출신들이 뜻을 모아 일종의 주택 조합을 만들었다.

병풍처럼 둘러선 산자락 아래 계곡 하나를 끼고 마을이 들어섰다.

입주 예정 가구는 50여 세대.

그중 60%가 인하대 출신, 20%는 괴산 토박이, 나머지는 외지인이었다.


도시 아파트에서만 살던 내게 29.3평 농가주택 규격의 전원주택은 꿈이었다.

마을 입구에는 커다란 미루나무가 서 있었고, 언론에서는 ‘괴산 미루마을 전원주택’이라 불렀다.

중앙부처와 기관에서 견학을 오기도 했다.

당시 우리는 그곳이 하나의 모델이 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내게 이사는 단순한 전원생활의 시작이 아니었다.

아내의 삶과 깊이 연결된 선택이었다.




임종을 지키는 사람의 하루


그 무렵 아내는 충주의 노인전문병원에서 요양원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아침부터 퇴근까지, 임종 직전의 노인들을 돌보고 유가족에게 상황을 설명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일주일에 두세 번은 마지막 숨을 지켜봐야 했다.

요양보호사 80여 명을 관리하는 책임도 만만치 않았다.


어느 날 아내가 말했다.


“나도 세월이 흘러 저 모습일 텐데…”


그 말은 단순한 연민이 아니었다.

죽음을 매일 마주하는 사람만이 느끼는, 서서히 스며드는 소진이었다.

몸보다 먼저 마음이 닳아갔다.


그때 우리는 괴산으로 내려왔다.




집을 짓는다는 것


10월에 분양을 받고, 집을 다듬는 데 이듬해 5월까지 걸렸다.

넓은 마당에 잔디를 심었다.

냇가에서 주먹만 한 돌을 주워 와 가장자리에 깔았다.

입구에서 현관까지는 석판돌을 놓았다.


소나무를 심고, 관상용 잣나무를 둘렀다.

경사면에는 딸기 모종을 심었다.

잔디 한편에는 돌을 쌓아 화로를 만들었다.


조경은 대부분 아내의 몫이었다.

나무의 수종과 배치, 계절의 흐름을 읽는 감각은 내가 따라갈 수 없었다.


나는 그저 바랐다.

병원에서 지친 몸과 마음이, 이 집에서만큼은 쉬기를.




소리가 달라졌다


도시 아파트에서는 들을 수 없던 소리가 매일 아침을 열었다.


새소리.

바람소리.

풀벌레 소리.


우리 집에서 불과 100미터 거리의 산이 내는 숨소리였다.


아침에 거실 전창으로 바라보는 운무는, 전날의 피로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산에 걸린 안개는 설명이 아니라 체험이었다.

그 풍경 앞에서는 누구나 무장해제된다.


아내도 말했다.

“몸이 정화되는 것 같아.”


나는 그 말이 무엇보다 기뻤다.

매일 임종을 지켜보던 사람의 눈빛이 조금씩 밝아지고 있었다.




내려놓는 선택


결국 아내는 병원에 사표를 냈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한계에 다다른 뒤였다.


여름이 오고 있었다.

퇴근 후 집에 돌아오면, 아내는 늘 잔디밭에 서 있었다.

잡초를 뽑고 있었다.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잡초가 그렇게 빠르게, 그렇게 끈질기게 자란다는 것을.


땅을 일구는 일은 마음을 돌보는 일과 닮아 있었다.

잡초를 뽑지 않으면 금세 뒤덮인다.

아내는 말없이 허리를 굽혔다.

손에는 흙이 묻었고, 얼굴에는 땀이 맺혔다.


그러나 그 표정에는 병원에서 보던 피로 대신 다른 빛이 있었다.

살아 있는 것을 돌보는 표정.


어느 날, 잡초를 뽑던 아내가 다가왔다.


“여보, 집도 크고 마당도 넓으니… 우리 개 한 마리 키워.”


그 말은 단순한 제안이 아니었다.

돌봄의 방향을 다시 정하겠다는 선언처럼 들렸다.


우리는 아직 알지 못했다.

그 선택이, 우리 삶을 또 한 번 바꿀 것이라는 것을.


(2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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