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마음은 작은 것에서 드러난다

복숭아 한 박스가 가르쳐준 인간관계의 본질

by 최국만


귀촌한 지 어느덧 15년이 된다.

뒤돌아보면 길다면 긴 시간이지만,

농촌의 시간은 도시와 달리 계절의 속도로 기억된다.

벚꽃이 지고, 장마가 지나고,

벼가 익어 고개를 숙일 때면

우리 부부도 한 해 더 뿌리를 내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송을 하며 얼굴이 알려져 있어서인지

처음 정착할 때도 큰 어려움은 없었다.

농촌 역시 도시처럼 다들 자기 삶에 바빠

타인의 삶에 깊게 관여하지 않는다.

귀촌인은 귀촌인대로,

토박이는 토박이대로 조용히 어울리며 살아간다.


그 사이에서

우리 부부 역시 많은 사람들과 인연을 맺었다.

아내는 나이 위의 언니들을 마음으로 따르고,

나는 형님이 생기며 자연스럽게 지인을 얻었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원래 그렇듯

가까웠던 관계가 어느 날 작은 일로 멀어지기도 하고

또 예상치 못한 사람에게서 큰 위로를 받기도 한다.


나와 아내는 모두

오랫동안 ‘사람’을 듣고 읽는 직업을 가졌다.

나는 32년 넘게

억울한 사람의 사연, 아픈 사람의 고통을 듣는 PD였고,

아내는 노인과 청소년을 만나

삶의 깊은 이야기를 듣는 상담자였다.


그런 삶을 오래 살다 보면

사람의 속마음은

말보다 행동, 행동보다 ‘기운’에서 먼저 느껴진다.


어떤 이는 작은 걸 건네도

그 진심이 손바닥에서 따뜻하게 느껴지고,

또 어떤 이는 큰 것을 주고도

그저 체면치레에 지나지 않을 때가 있다.


살아보니,

그 차이는 ‘크고 작음’이 아니라

마음의 온도였다.


귀촌 후 우리 부부와 유독 깊은 정을 나눈 분이 있다.

아내보다 몇 살 위의 언니,

작은 농사를 짓고

틈나면 봉사하러 다니는 분이다.


아내가 암으로 누워 있던 시절,

그분은 자신의 형편도 빠듯한데도

늘 빈손으로 오지 않았다.

여름에는 복숭아를 따다 주었고

겨울에는 김장을 담가 가져왔다.


어느 날이었다.

아침 일찍 현관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현재 씨, 나야. 문 열어봐. 복숭아 갖고 왔어.”


박스를 열어보니

오늘 아침 일터에서 돌아오며

땀도 마르기 전에 우리 집으로 온 복숭아였다.

그녀는 말했다.


“A급은 아니야. 흠도 좀 있어. 그래도 좋아.”


나중에야 알았다.

그 복숭아는

그날 받을 일당을 포기하고 가져온 것이라는 사실을.


그 사실을 들었을 때

나는 오래 말없이 있었다.

누군가가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기꺼이 건네는 마음이란

돈으로도, 말로도 환산되지 않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마음이 닫힌 사람도 있다


귀촌을 하면 다양한 사람을 만난다.

알면 알수록 더 가까워지는 사람이 있고,

아무리 만나도 마음의 거리만 넓어지는 사람이 있다.


겉으로는 잘해주는 것 같지만

마음이 따라오지 않는 사람,

베풀면서도 속으로는 셈을 하는 사람,

질투와 비교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도 있다.


나는 수십 년 동안

그런 사람들을 수도 없이 봐왔다.

그리고 하나의 결론을 얻었다.


사람은 나이가 들어도

마음 공부는 끝나지 않는다.


최근에도 그 언니는

아내에게 김장을 담가 왔다.


“현재씨, 몸 안 좋으면 김장 못 하잖아.

우리 집에서 담근 배추로 조금 가져왔어.”


그 김치의 맛은

고춧가루와 마늘 맛이 아니라

그분의 마음맛이었다.


우리가 베품을 받으면서 느낀 건

‘고마움’보다도

인간관계의 본질은 결국 진정성이라는 사실이었다.


사람은

큰 것을 받아도 남는 것이 없을 때가 있고,

작은 것을 받아도 오래도록 기억될 때가 있다.


남이 주는 것이

그 사람의 삶에서 ‘얼마만큼의 희생이 담겼는지’

그걸 느끼면

마음이 저절로 숙연해진다.


귀촌 15년이 가까워오는 지금,

나는 더 확신한다.


인생 종착역에 가까워질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돈도, 명예도, 능력도 아니다.


사람의 진정성,

마음을 나눌 수 있는 한 사람,

그리고 그 사람에게 건네는 작고 따뜻한 손길.


그것이 삶을 지탱하는 마지막 힘이다.


나는 아내를 보며 배웠다.

아내는 천성적으로 베풀기를 좋아한다.

주고 나면 더 행복해지는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아내 곁에는 늘 사람들이 모이고

웃음이 나고

삶의 온도가 높아진다.


베풀어 사는 삶

그것은 손해가 아니라

삶을 더 넓히는 방식이다.


그래서 나는

귀촌을 단순한 환경의 변화가 아니라

사람 공부의 2막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자연은 우리에게 계절을 가르쳐 주었고,

사람들은 우리에게 관계의 본질을 알려주었다.


베풂은 인생 후반부의 품격이고,

진정성은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마지막 등불이다.


우리는

그 등불을 품은 사람들과 함께

오늘도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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