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의 밤, 딸이 준비한 시간
호텔 방에 들어왔다.
“아빠, 엄마. 3박 4일 일정이야.
엄마, 아빠 취향도 생각했지만 특히 엄마를 위한 힐링과 감성 위주로 짰어. 어때요?”
3박 4일의 숙소와 음식, 주변 볼거리, 그리고 아픈 엄마를 위한 치유 프로그램까지 생각해 여행을 기획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사흘을 묵는 숙소는 편안함과 휴식, 그리고 안정이 가장 중요하다.
나는 딸이 준비해 온 일정표를 잠시 들여다보았다.
동선도 자연스럽고, 프로그램의 흐름도 무리가 없다.
휴식과 이동, 그리고 힐링의 균형이 잘 잡혀 있었다.
나는 속으로 웃었다.
‘이거 완전히 프로그램 기획이네.’
30년 동안 방송국에서 프로그램을 만들었던 내 눈에는 금방 보인다.
이 여행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하나의 기획이었다.
나는 딸에게 말했다.
“이거 누가 짰어?”
딸이 웃었다.
“제가 짰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기획 잘했다.”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PD 아빠의 유전자를 받은 건가.’
프로그램을 짜는 감각이라는 게 있다.
사람의 마음을 읽고, 상황을 고려하고, 흐름을 만드는 감각.
딸이 이번 환갑 여행을 준비하면서 보여준 것은
바로 그런 감각이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문득 생각했다.
딸이 이제 정말 다 컸구나.
저녁 식사를 하기 전에 족욕을 했다.
아내와 나, 그리고 딸이 같은 방 안에서 나란히 발을 담갔다.
암 투병 중인 아내는 항암 후유증이 있다. 특히 걷는 데 다소 불편함이 있다.
발은 ‘제2의 심장’이라 불린다.
따뜻한 물에 발을 담그면 하체 혈관이 확장되면서 혈류가 원활해진다.
암 환자에게 면역력은 매우 중요하다.
족욕은 체온을 올려 면역력을 높이고 다리 부종을 완화하는 데도 효과가 있다.
족욕방에는 힐링 음악이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
아내와 딸이 내 앞에 앉아 있다.
스무 살 무렵 처음 만났던 그 얼굴은 이제 세월의 결이 스며든 중년의 얼굴이 되었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내가 처음 보았던 그 사람이 있다.
나는 딸과 아내를 번갈아 바라보며
문득 지나온 시간들을 떠올렸다.
족욕이 끝나고 우리는 방으로 올라왔다.
지리산의 밤공기가 창문 사이로 천천히 들어왔다.
딸이 먼저 말을 꺼냈다.
“엄마는 어떻게 그렇게 사람들하고 잘 지내?”
아내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사람 관계라는 게 결국 상대를 바꾸는 일이 아니라
내 마음을 다루는 일이더라.”
딸이 조용히 듣고 있었다.
“젊을 때는 사람 때문에 많이 힘들었어.
섭섭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고…
그때는 늘 상대가 문제라고 생각했지.”
아내는 잠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근데 살다 보니까 알게 되더라.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걸.”
방 안은 조용했다.
“그래서 내가 바꾸기 시작했어.
사람을 대하는 내 마음을.”
딸이 다시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돼?”
아내가 말했다.
“내적 근육을 키워야 해.”
딸이 웃으며 되물었다.
“내적 근육?”
“그래. 사람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 힘.”
아내는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내 마음이 무너지지 않는 힘이 있어야 해.
그게 쌓이면 사람을 보는 마음도 달라지더라.”
딸은 가만히 듣고 있었다.
“엄마 그 힘은 어떻게 생겨?”
아내가 말했다.
“상처를 겪으면서 생겨.”
나는 그 말을 듣고 아내를 바라보았다.
수많은 시간 속에서 아내가 겪었을 일들이
그 짧은 문장 속에 담겨 있었다.
“사람 때문에 아프기도 하고
오해도 받고
속상한 일도 겪잖아.
근데 그걸 계속 붙잡고 있으면
내 마음이 먼저 망가져.”
딸이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해?”
아내가 말했다.
“흘려보내야지.”
그리고 조용히 덧붙였다.
“사람을 이해하려고 하면
조금 편해져.”
나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호텔 주변을 둘러싼 금강송 숲이
지리산의 밤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커다란 산의 품 안에
우리가 들어와 있었다.
아내의 환갑 여행
첫날밤은 이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딸이 준비한 프로그램 가운데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아마 지금 이 시간일 것이다.
지리산의 밤,
엄마는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고
딸은 그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깨닫는다.
딸이 어느새 이렇게 성숙해졌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