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환갑여행 2일 (남원, 소리로 이어진 세 사람)

청춘은 흘러도, 소리는 남는다

by 최국만


고속도로 위를 달리는 차 안,

창밖으로는 남쪽의 들판이 끝없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른 새벽이라 길은 한산했고,

그 고요 속에서 우리 가족의 하루가 천천히 열리고 있었다.


운전대는 오늘도 딸이 잡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눈을 붙이려던 참이었다.


“아빠, 안 주무시면 제가 노래 한 곡 부를까요?”


나는 웃으며 말했다.

“그래, 불러봐.”


속으로는 가벼운 트로트나 7080 노래를 떠올렸다.

그런데, 다음 순간 들려온 소리는

내 예상을 완전히 뒤집었다.




이 산 저 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아왔건마는

세상사 쓸쓸하더라




딸의 목소리였다.

낯설면서도 묘하게 깊은 울림이 있었다.


그리고 곧이어,

또 하나의 목소리가 그 위에 얹혔다.


아내였다.




내 청춘도 날 버리고

오늘 백발 한심하구나




두 사람의 소리가 겹쳐지는 순간,

나는 눈을 감은 채 더 이상 잠들 수 없었다.


그 소리는 단순한 노래가 아니었다.

세월의 무게와 삶의 결이 담긴,

살아 있는 시간의 울림이었다.




판소리는 단순한 음악이 아니다.


조선 후기, 글을 모르는 백성들이

자신들의 삶과 설움, 기쁨과 희망을

목청 하나로 풀어낸 이야기였다.


흥부의 가난, 춘향의 사랑, 심청의 효심,

그 모든 이야기는

우리 민중이 살아온 역사이자 감정의 기록이었다.


특히 ‘사철가’는

봄·여름·가을·겨울을 빌려

인생의 무상함과 덧없음을 노래한다.


그래서 그 노래를 듣는 순간,

누구나 자기 인생을 떠올리게 된다.




세월아 세월아 가지 말아라

아까운 청춘들이 다 늙는다




차 안에서 들었던 그 한 구절은

내 가슴을 오래 붙잡고 있었다.




딸은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지금은 공직에 있다.


그리고 어느 날,

뜻밖의 말을 꺼냈다.


“엄마, 나 판소리 배우려고 등록했어.”


우리는 말렸다.

이미 충분히 바쁘게 살아온 아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딸은 멈추지 않았다.


그 아이는 지금,

자신의 삶에 ‘소리’를 더하고 있었다.




남원 톨게이트를 빠져나오며

딸이 말했다.


“이번 여행, 그냥 여행 아니야.

‘판소리 로드’야.”


그 말에 우리는 웃었지만,

그날의 여정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첫 번째로 찾은 곳은

조선 후기 판소리의 거장,

송흥록 명창의 생가였다.


그곳은 조용했고,

시간이 멈춘 듯 고요했다.


대나무가 바람에 흔들리고,

초가집의 처마는 낮게 숨을 쉬고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생각했다.


이곳에서 태어난 한 사람의 목소리가

얼마나 많은 사람의 가슴을 울렸을까.




아내는 민요를 배우고 있고,

딸은 판소리를 배운다.


민요는 삶의 곁에서 부르는 노래이고,

판소리는 삶을 이야기로 풀어내는 노래다.


그 둘이 함께 있을 때,

노래는 더 이상 기술이 아니라

‘삶’ 그 자체가 된다.




툇마루에 앉은 아내와 딸이

서로를 바라보며 웃는다.


“애야, 여기 앉아봐.

이 집이랑 잘 어울린다.”


그 모습은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한 장면 같았다.




딸이 조심스럽게

춘향가 한 대목을 흉내 낸다.


완벽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안에는 분명

진심이 있었다.


우리는 박수를 쳤다.


기술이 아니라

마음에 대한 박수였다.




나는 아내에게 말했다.


“여보, 아까 차 안에서 당신이랑 딸이 부른 사철가…

그건 그냥 노래가 아니었어.

나는… 참 행복했어.”


그 말은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솔직한 고백이었다.




대나무가 다시 흔들렸다.


아직 꽃은 피지 않았지만

곧 이곳에도 봄이 올 것이다.


그리고 그 봄 속에서,

또 누군가가 소리를 배우고

또 누군가가 그 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인생을 떠올릴 것이다.




아내의 환갑여행.


그 여행은 단순한 기념이 아니라

세 사람이 함께 걸어가는

‘시간의 길’이었다.




청춘은 지나가지만,

소리는 남는다.


그리고 그 소리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

세월보다 오래 살아남는다.




우리는 다시 차에 올랐다.


남원의 더 깊은 곳으로,

소리의 고향으로.


그리고 나는 알았다.


오늘 이 여행은

언젠가 글이 아니라

한 편의 ‘소리’로 남게 될 것이라는 것을.


“ 그날, 우리는 말 대신 소리로 서로를 사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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