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환갑여행 2일 (광한루, 사랑이 머무는 자리)

소리와 빛 사이에서, 우리는 서로를 다시 바라보았다

by 최국만


광한루 누각 위에 딸이 서 있었다.


난간에 기대어

한 컷, 한 컷 사진을 찍는 그 모습이

유난히도 밝았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생각했다.


참 고맙다.

참 잘 자라주었다.


딸, 아들이 자라오는 내내

우리 부부에게 기쁨이었다.


아이들은 다들 넘치는 사랑을 주었고,

때로는 부모인 우리보다 더 깊은 생각으로

삶을 바라보는 아이들이었다.


그 아이 큰 딸이

이 광한루 위에서

자신의 시간을 기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아이 셋을 구김살 없이 키워낸

아내가 있었다.


나는 아내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었다.


고맙다.

그리고, 미안하다.


아직 아내는

걷는 것이 조금 힘들다.


하루 만 보가 넘으면

몸에 무리가 간다.


나는 무심코 만보계를 들여다봤다.


12,000보.


걸은 시간만도

한 시간 반이 훌쩍 넘었다.


“이제 가자. 엄마 오늘 많이 걸었어.”


그러자 딸이 말했다.


“아빠, 저기 월매집도 있고,

안숙선 선생님 기념관도 있어요.

그것만 보고 가요.”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광한루 안쪽으로 들어서자

시간이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초가집, 낮은 담장,

그리고 오래된 나무들.


이곳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이야기가 살아 있는 공간이었다.


춘향과 몽룡이 사랑을 나누던 자리,

그 사랑이 전설이 되어

지금까지 이어지는 곳.


“엄마, 여기예요.”


딸이 멈춰 선 곳은

안숙선 명창의 기념관이었다.


안으로 들어갔다.

홀로그램으로 재현된 춘향가가 흐르고 있었다.


소리는 단순히 들리는 것이 아니었다.

몸짓과 호흡,

그리고 한(恨)이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딸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아내도 함께 서 있었다.


둘 다

완전히 몰입해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알았다.


이제 딸은

‘노래’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소리’를 배우고 있다는 것을.


판소리는

한 사람의 목소리로

세상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예술이다.


그 안에는

가난, 사랑, 이별, 기다림,

그리고 인간의 모든 감정이 담겨 있다.


그래서 판소리는

기술이 아니라

삶이다.


“엄마…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을까?”


딸이 조용히 물었다.


아내가 말했다.


“그분들은 어린 시절

힘들고 배고플 때도

소리를 놓지 않았어.”


짧은 대화였지만

그 안에는

삶의 무게와 방향이 담겨 있었다.


기념관을 나와

계단을 내려오던 순간이었다.


아내가 잠시 다리를 움찔했다.


“여보, 다리 아프지?”


“응… 오늘 좀 많이 걸었나 봐.”


그 말이

내 마음을 오래 붙잡았다.


월매집을 둘러보고 나왔을 때

어둠이 천천히 내려앉고 있었다.


광한루 입구에서부터 이어지던

청사초롱이 하나둘 불을 밝혔다.


붉은빛과 군청빛이 어우러진 그 빛은

마치 이 도시 전체가

‘소리’로 숨 쉬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남원은

단순한 도시가 아니었다.


이곳은

소리의 고장이었다.


판소리가 태어나고,

이어지고,

지금도 살아 숨 쉬는 곳.


숙소로 돌아왔다.


지리산에서 묵었던 곳보다도

더 넓은 공간이었다.


우리는 한 동을 통째로 빌렸다.


“엄마, 광한루 야경 정말 예쁘지?”


“춘향이랑 몽룡 마음이 이해될 것 같아.”


딸의 말에

아내는 조용히 웃었다.


밤이 깊어졌다.


아내는 자수를 놓고 있었다.


그리고

작게 민요를 흥얼거렸다.


그 소리는 아내가 민요를 배운 이후부터

내가 들어온

가장 익숙하고도 따뜻한 소리였다.


그때였다.


건넌방에서

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쑥대머리…


그 소리는

낯설지 않았다.


그러나

이전과는 달랐다.


이제 그 소리는

단순한 흉내가 아니라

조금씩 삶을 담기 시작한

‘소리’가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생각했다.


오늘 하루,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함께했을까.


광한루의 바람,

청사초롱의 흔들림,

안숙선 명창의 춘향가,


그리고

아내와 딸의 소리.


모든 것이

하나로 이어져 있었다.


아내의 환갑여행.


이 여행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우리 가족이

서로의 시간을 이해하고

서로의 삶을 다시 바라보는

하나의 깊은 여정이었다.


나는 그날 밤

조용히 깨달았다.


사람은 늙어도,

사랑은 늙지 않는다.


그리고 소리는,

그 사랑을 가장 오래 남기는 방식이라는 것을.


그날 밤, 우리는 말보다 더 깊은 ‘소리’가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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