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곡의 노래, 그리고 우리

그날 밤 내가 불러준 노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by 최국만


새벽 5시다.

정적 속에 도마 소리만 울린다.

당근을 썰고, 표고버섯을 다듬는다.


정수기 위 휴대폰에서 노래가 흘러나온다.


거리에 가로등 불이 하나둘씩 켜지고

검붉은 노을 너머 또 하루가 저물 땐

왠지 모든 것이 꿈결 같아요


동물원의 '거리에서'다.


“아, 그때 그 노래구나.”

당근을 썰던 손이 멈췄다.


80년대, 암울했던 대학 시절이었다.

편집실 일을 마치면 밤 10시가 넘곤 했다.

학생회관을 나서면 세상은 온통 칠흑 같은 밤이었다.


아내가 편집위원이 되겠다고 찾아왔을 때부터 나는 아내에게 푹 빠졌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 보았던 그 잔상은 스물 일곱살 복학생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훤칠한 키, 환한 얼굴, 긴 머리에 하얀 파커를 입은 스무 살의 앳된 모습.


당시 편집장이었던 나는 여학생은 뽑지 않겠다고 호기롭게 공언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녀가 시험장에 앉아 있는 것을 본 순간, 내심 간절해졌다.


“제발 시험만 잘 봐라. 그럼 무조건 뽑는다.”


채점 결과가 나왔다.

“편집장님, 이 여학생이 제법 글을 잘 썼습니다. 독문과 1학년입니다.”

내심 쾌재를 불렀다. 원칙을 꺾고 그녀를 선발했다.


그것이 내 생애 가장 잘한 결정이었다.


고향이 청주였던 그녀는 이미 고교 시절 문단에 글을 발표한 수재였다.

매일 밤늦게까지 함께 남아서 글을 쓰고 대화를 나눴다.

그녀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내 삶은 충만했고 용기가 솟았다.


밤 10시, 텅 빈 교정을 둘이서 걷는다.


집까지는 시외버스를 타고 한 시간을 가야 한다.

KBS 아나운서에 합격할 만큼 내 목소리는 유독 맑았다.


담배도 할 줄 모르던 서툰 사내가 건넨 고백은 노래였다.

“내가 노래 한 곡 불러줄까?”

“네, 편집장님 노래 잘하시잖아요.”


학교 앞 정류장까지 가는 300미터의 길.

사실 버스는 이미 끊긴 시간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산에서 불어오는 밤바람 사이로 우리 둘의 발자국 소리와 옷깃 스치는 소리만 들린다.


그리운 그대 아름다운 모습으로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정류장을 지나쳐 둘이서 하염없이 걸었다.

김정호의 '하얀 나비'와 '이름 모를 소녀'도 불렀다.


밤은 깊어갔고, 이대로 헤어짐 없이 우주 끝까지 걷고 싶었다.

나는 노래를 조용히 따라 부르고 있었다.

등 뒤에서 아내가 말했다.

“ 여보,우리 대학교 때 생각나, 당신 목소리 변함이 없네”


나는 가슴에서부터 뜨거운 것이 올라오며 눈물이 핑 돌았다.

내 어깨가 조금 들썩였다.

“여보, 왜 울어? 그 노래, 대학 때 나한테 불러준 거잖아.”

“ 당신이 불러주는 그 노래 나 정말 좋아했는데”


아내가 앞치마를 두른 나를 뒤에서 안아 주었다.

“응, 아침 준비하는데 갑자기 이 노래가 나오네.


40년 전 당신 처음 만난 날이 떠올라서 괜히 눈물이 나.”


아내가 속삭인다.

“여보, 나도 눈물이 나요, 어제 같은 그 날이 40년 전이라는 게…

고마워, 항상 사랑해 줘서.”


우리 부부의 삶은 이제 더 빨리 흐를 것이다.


하지만 40년 전 그 밤길에서 불러준 세 곡의 노래에는

내 목소리에 담긴 사랑과 진실이 여전히 살아있다.


나는 오늘도 다짐한다.


앞으로도 죽도록 당신을 사랑하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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