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살아왔다고 다 아는 건 아니었다. 겸손은 사람에 대한 이해였다
예순일곱.
내 삶은 어느덧 일흔의 문턱에 와 있다.
젊을 땐 아는 것도 많았고,
해야 할 말도, 할 수 있는 일도 많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조용해졌다.
말수를 줄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른다는 걸 더 자주 깨닫게 되어서.
사람이 나이를 먹는 건
지혜를 얻는 일일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돌아보니,
진짜 나이를 먹는다는 건
조금씩 ‘내려놓는 일’,
조금씩 ‘겸손해지는 일’이었다.
젊을 땐 몰랐다.
세상을 바꾸려던 날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먼저 바뀌어야 할 때라는 걸 안다.
일흔을 앞둔 지금,
나는 늦게나마 겸손을 배우고 있다.
사람의 본성은 태어날 때부터 선할까, 악할까.
유학의 맹자는 인간을 성선하다고 했고,
순자는 성악하다고 했다.
나는 곧 일흔을 맞이하는 나이에 이르러,
다시금 이 오래된 질문 앞에 선다.
유아기에는 생각이라는 것이 없었고,
청소년기에는 생존이 먼저였다.
집안의 몰락으로 수십 곳의 공장을 전전하며 일한 10대의 나는,
세상의 온기를 느끼기보다는 사람의 날카로운 이면을 먼저 배웠다.
밥 한 끼의 싸움, 야박한 말투, 착취와 멸시 속에서
나는 ‘인간은 본래 악한 존재’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방송국 PD가 된 후 30년 동안 나는 그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시사고발 프로그램을 통해 사회의 어두운 구석을 드러내야 했고,
늘 의심하고 파헤쳐야 했다.
카메라 렌즈는 진실을 담기 위해서였지만,
내 마음의 렌즈는 점점 더 날카로워지고, 감정은 거칠어졌다.
정의감이라는 이름으로 달려온 시간이었지만,
돌아보면 마음 한구석은 늘 경직되어 있었다.
사람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했고, 겸손보다는 판단과 개입이 앞섰다.
그렇게 60대 중반에 이르렀고, 퇴직한 지금,
나는 괴산이라는 조용한 농촌에서 살아간다.
논길을 걷다 문득, 나는 내게 묻는다. “너는 진정 한 번이라도 겸손했던 적이 있었느냐.”
방송 앞에서, 사람들 앞에서, 혹은 가족 앞에서…
나는 얼마나 나를 낮춰 본 적이 있었던가.
이곳에서 나는 비로소 겸손이라는 단어를 새롭게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낮춤’이나 ‘겸양’의 차원을 넘어, 더 깊은 마음의 울림,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온기 같은 것을 나는 겸손이라 부르고 싶다.
아마도 이 마음은 도시에서는 쉽게 만날 수 없는 감정일 것이다.
시간에 쫓기며 분주하게 살아가는 도시의 삶 속에서는
자신을 돌아보기도, 낮추기도 쉽지 않다.
반면, 농촌의 시간은 다르다.
자연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그 자리에 있다.
시냇물이 흐르고, 바람이 지나가고, 나무가 서 있다.
누구를 심판하지도, 앞서려 하지도 않는다.
노자가 말한 무위자연(無爲自然), 바로 그 삶의 모습이다.
나는 그 속에서 다시 사람을 배우고 있다.
본성이란 결국 환경의 반영이 아닐까.
불교에서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하여, 세상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한다고 .
나 역시 변해가고 있고, 그 변화 속에서 겸손이 스며들고 있다.
루소는 “자연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부처가 고집멸도의 진리를 깨달은 것도 인공의 세계가 아닌 보리수 나무 아래, 자연 속이었다.
모든 위대한 깨달음은 결국 자연 안에서 피어난다.
나는 이제 ‘겸손’이라는 말 속에서 ‘자연’을 본다.
그리고 ‘자연’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마다 내 마음은 저절로 낮아진다.
진정한 겸손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자연스러운 감정이 되어, 내 삶에 스며들고 있다.